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인칭 시점 Oct 16. 2018

차가운 절망을 머금은 여자

영화 <레이디 맥베스>를 보고

<레이디 맥베스>는 여러모로 차갑다. 창백한 시선은 꼿꼿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제약된 공간은 플롯 전반을 지배하며 생동하는 핏기를 지워버린다. 게다가 저주받은 듯 음산한 공기는 인물들을 에워싸며 격렬한 충동을 갈망하게 한다. 그 충동의 기저에 압제적인 질서가 존재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중반의 영국은 소위 빅토리아 정신을 숭상했다. 여성들은 가정적이고 순수한 여성이라는 굴종적인 미명 아래 가둬졌고 육욕을 위시한 본능이 주는 쾌미를 불식시켜야만 했다. 캐서린은 이러한 시대의 전형으로 등장하며 가부장 사회의 억압을 투영시킨다. 그녀는 가문 존립을 위한 재생산의 도구로써 압박을 받으면서도 정작 남편으로부터는 동침을 거부당한다. 말 그대로 허식과 관념으로만 점철된 공허한 삶이다.


그리고 그녀의 자리에는 언제나 짙은 음영이 서려있다.


자유분방한 성격과 함께 격식으로부터의 일탈을 갈망하는 캐서린은 분명 시대적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이다. 시아버지와 남편으로 대변되는 남성이란 존재가 주 무대인 집에서 사라지자 캐서린은 동적인 해방감을 만끽한다. 그리고 그녀는 은은한 냉소를 머금은 채 관습적 질서를 타파해나가며 따갑게 직사되는 주변의 시선을 과감하게 굴절시킨다. 캐서린의 태도 변화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급격한 태도의 선회는 당시 남성 사회의 지배력이 단지 관념에 머물렀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선명하게 제시된다. 또한 그녀는 하인인 세바스찬과의 밀회를 통해 결혼을 통한 가정의 형성이 실효적이지 못한 담론에 지나지 않았음을 방증해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공고했던 질서의 지층에 균열이 생기면서 영화는 정적이었던 이야기의 템포를 가속시킨다.
 
캐서린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속 레이디 맥베스를 많이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았다. ‘천진난만한 꽃처럼 보이되 꽃 아래 몸을 감춘 독사가 되어야 한다’는 원작의 레이디 맥베스처럼 캐서린은 삶의 주제의식을 분명히 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조명된다. 하지만 행동의 방향성에는 차이가 있다. 원작의 레이디 맥베스는 남편인 맥베스의 왕위 찬탈을 위한 헌신적인 조력자로 그려지지만 캐서린은 온전히 자신을 위한 욕구를 분출해내는 인물이다. 스스로 발현시킨 의지와 행동이 가닿는 지향점의 차이가 선연하게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영화에 묻어있는 페미니즘의 색채를 엿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레이디 맥베스의 역할을 그려내면서 남편의 비극적 운명을 촉발시키는 매개라는 측면에 방점을 찍었다. 주옥같은 그녀의 명언조차도 이야기의 큰 틀 안에서는 잔잔한 여운만을 남긴 채 지나갈 따름이다. 그러나 영화의 레이디 맥베스는 삶의 무대를 총괄하는 방식을 택했다. 기획부터 연출까지 아우르는 캐서린의 행보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영화의 지향점을 상징한다.



19세기를 전후로 해서 태동한 페미니즘 문학은 주체적인 여성상 확립의 가닥을 크게 두 가지로 잡는다. 우선 가출을 통한 해방이 있다. 자신을 찾고자 하는 여성들은 집에서 벗어나 행동반경을 넓히면서 주체적으로 견문을 넓히고 생활양식을 재편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음으로 자기 파멸을 통한 승화가 있다. 현세의 질서를 딛고 살아가는 육신을 저버리면서 자유로운 여성으로 재탄생한다는 측면에서 당대에는 꽤나 파격적인 접근이었다. 케이트 쇼팽의 소설 <각성> 속 바다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에드나의 마지막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두 형식의 공통분모는 다음과 같다. 어떤 경우에도 남성 사회는 훼손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19세기 문학 속 페미니즘은 역동하는 여성에 비견되는 정적인 남성 사회의 전통을 보존한다. 적재된 분노의 무게를 거뜬하게 받아내는 남성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공분을 끌어내기엔 그들이 온전한 것이 최적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레이디 맥베스>는 주저하지 않고 파격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욕망을 탐닉하는 일탈과 질서에 젖은 관성이 절묘하게 배치되는 상황에서 캐서린은 살인이라는 전복의 카드를 꺼내든다. 시아버지부터 남편, 그리고 혼외자식을 연쇄적으로 파멸시키는 그녀의 행동은 한 가족 사회의 남성성을 종식시키는 극단에 안착한다. 공생은 그녀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대척점에 존재하는 남성들이 사라질 때 비로소 그녀의 일탈이 완성되는 것이다. 시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식사자리에 앉은 캐서린의 미소와 여유로움에선 전복의 희열과 함께 조용히 내면에 침잠하는 광기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침실에서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삶과 죽음이 혼재된 소름끼치는 난상을 떠올리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특이한 점은 살해의 순간을 함께 목도한 주변인에게서도 이러한 광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인 안나와 세바스찬은 적극적으로 범죄의 과정에 가담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한 존재의 죽음을 방조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질적인 존재로 분리되지 않는 이유는 피지배계층으로 살아가며 쌓아온 일말의 감정들이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안함과 분노로 버무려진 그들의 시선은 캐서린의 살기에 힘을 실어주며 지워지지 않는 파멸의 발자취를 남기기에 이른다.



욕망의 혈류가 요동치는 파괴의 동맥은 놀랍게도 캐서린에 의해 끊어진다. 그럼에도 그녀는 죽지 않는다. 의아하게 여길 즈음에 영화는 무기력하게 죽음을 관망하던 주변인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원죄를 그들에게 전가하기에 이른다. 캐서린은 이미 자신의 발자취를 지워버렸고 그녀와 함께 한 자들은 여전히 무기력하다. 배신을 택한 캐서린에게 원색적인 욕설을 내뱉는 세바스찬의 분노와 목소리를 잃은 채 황망한 표정만 내비치는 안나의 모습에선 무망함만이 그득하게 느껴진다. 영악하게도 캐서린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도 책임을 완벽하게 회피해내는 기지를 발휘한 셈이다. 결국 끊어진 동맥은 약자 중의 약자에게서 삶을 앗아갔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면서 결국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 질서를 다시 생성해내는 캐서린의 역설적인 행보는 파괴의 비극성을 가중시키는 효과를 불러온다.



격렬했던 광풍이 잠시 멎고, 캐서린은 다시 소파의 정중앙에 앉는다. 곱게 빗었던 머리는 어느새 가닥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졌다. 배는 이전보다 더욱 불룩하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다. 삶을 잉태한 자가 삶을 절멸의 단계로 끌어내린 후 지어보이는 미소는 위악적인 실소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악성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마지막은 어김없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그녀는 집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을 옥죄었던 곳이자 타인의 피를 묻힌 곳에서 심지어 일말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무표정한 시선만이 차디찬 실내를 잠식하고 있다. 여전히 그녀의 자리엔 음영이 짙다. 이 짙은 어둠이 자유롭고 싶었던 한 여자에게 묻는다.


진정으로 당신은 해방되었냐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황량한 착취의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