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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6. 2018

시간을 물들인 낭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고

예술은 과거를 탐닉한다. 동시에 정확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어설픈 리얼리즘은 시대의 편린을 담아내는데 불과하다. 그저 그리움과 동경에 상상의 여지를 주는 것, 그것이 예술이 과거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우디 앨런은 과거를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 그는 예술영화의 새로운 누벨바그를 일으키며 도시적인 감성에 과거를 올려놓고 아름다운 상상을 버무리는 장면의 미학을 선사한다. 20세기의 그가 인생의 페이소스를 담아내는데 주력했다면 21세기의 그는 황혼이 반추하는 아련한 과거를 조명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바로 그 변화의 산물이다.


과거에 대한 사랑과 특정한 장소가 주는 풍취.


우디 앨런은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직조해냈다.


그는 1920년대의 예술을 주목했다. 1935년생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향수와 당대 예술에 대한 동경심이 절묘하게 맞물린 결과일 테다. 의외랄 것이 있다면 배경이 되는 장소이다. ‘뉴욕 예찬론자’인 우디 앨런은 파리를 선택했다. ‘잃어버린 세대’의 찬란한 부흥을 예술의 도시에서 펼치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도, 잃어버린 세대도 파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오프닝을 수놓는 아름다운 파리의 전경과 달콤하게 울려 퍼지는 ‘Si Tu Vois Ma Mere’는 우디 앨런의 선택에 당위를 제공해주기에 손색이 없다. 그렇게 <미드나잇 인 파리>는 시작부터 특별한 감각을 선사한다.



이야기는 파리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길 펜더의 시선을 차용한다. 그는 아름다운 파리에 욕망과 허영이라는 자욱한 안개를 드리우는 주변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 1920년대의 낭만적인 파리를 조우한다. 시나리오 작가라는 캐릭터의 특성처럼 그가 만나는 인물들 역시 인상적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등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문학인부터 살바도르 달리나 피카소 같은 화가들과의 만남은 길로 하여금 환희의 순간을 목도케 한다. 주목할 점이 있다면 당대 인물들이 익살스럽고 역동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역사적인 순간에 생기 넘치는 상상을 불어넣고 싶은 감독의 욕심이라 추측해도 무방할 정도로 영화는 음악과 춤, 대화로 가득한 1920년대의 열정을 과감하게 그려낸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콜 포터의 ‘Let’s do it’ 역시 낭만적인 사랑을 꿈꿨던 과거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도와준다.



전반적인 플롯은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에 굳이 매끄러운 이음새를 연결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어떻게 2010년대의 파리에서 1920년대의 파리로 넘어갈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영화는 공존할 수 없는 두 공간을 시간의 연속성에 놓으면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집중할 뿐이다. 이 얼토당토않은 상상에 머쓱했는지 우디 앨런은 <신데렐라>의 ‘12시’와 ‘마차’ 개념을 슬며시 가져와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동화를 빌려온 것은 아마도 사랑하는 파리의 시간을 비트는 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일지도 모르겠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크게 두 가지의 핵심 플롯을 제시한다. 우선 하나는 자신의 소설을 동경하는 대상들에게 보여주는 과정이다. 소설과 작품을 통해서만 마주했던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생각을 나누며 글을 평가받는 일련의 과정은 저 유명한 E.H. 카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처럼 영화는 같은 시공간에 과거와 현재를 배치시킨 후 대화를 통한 교감을 형성하게 만든다. 상상력을 통해 예술의 영역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연속적인 궤가 가지고 있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길의 시선은 1920년대의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마주하게 하면서 독창적인 예술가의 정신과 평범한 인간의 번민을 복합적으로 선사한다. 무작정 좋아하기만 했던 이들을 자세히 알게 되면서 넓어지는 이해의 외연은 자연스레 그의 소설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두 번째는 길과 아드리아나의 만남이다. 몸보다 말로 교감하며 정제된 사랑의 감정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대화는 각자의 현실에 대한 모종의 인식을 불러온다. 인상적인 부분은 단연 두 사람이 1890년대로 회귀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이중 회귀 구조를 통해 각자가 생각하는 과거가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상대성을 보여준다. 길이 사랑하는 과거인 1920년대는 아드리아나에게 엄연한 현재이다. 그녀는 ‘벨 에포크’로 지칭되는 1890년대라는 과거를 사랑한다. 이질적인 시간들이 동시에 다른 과거를 동경하는 모습은 결국 무망하고도 끝없는 상상이 현실의 불만을 대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의 염증을 과거에 대한 낭만적인 상상으로 치유하고자 함은 절대적인 황금시대의 부재를 방증한다.


영화는 그렇게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라는 시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결론은 명징하다. 삶이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환상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 대해 충실하게 이해하고 마주해야 한다. 길이 매일같이 마주했던 1920년대의 파리는 이상적인 상상의 종착역이기도 하지만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이기도 하다. 하지만 환상으로 치부했던 도피는 다시 현실로 귀결된다. 그제야 길은 자신이 소설을 쓰고 숨 쉬며 살아가는 현재를 마주한다. 확신할 수 없는 사랑의 공허함을 상상에서 채우고자 했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타임 슬립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상상력이 종국에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물음을 던져준 셈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아름답다. 재즈의 선율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파리의 모습은 매혹 그 자체이다. 역시 도시의 감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우디 앨런의 연출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영화의 메시지에 담겨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다. 우리를 태우러 올 자정의 마차는 없다. 고로 황금시대라는 과거를 확인할 길은 없다. 이제 영화가 질문한다. ‘진정한 황금시대가 정말로 있을까?’ 답은 영원히 유보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생동하는 1920년대를 예술적 감성으로 물들인 이 영화는 이미 낭만적인 한 표를 던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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