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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6. 2018

그래도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영화 <더 랍스터>를 보고

사람들은 짝을 찾고자 호텔에 모였다. 그러나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된다. 그들은 동물이 되고 싶지 않다. 고로 사랑을 ‘찾아야만’ 한다. 이처럼 명징한 회로에서 사랑은 절박한 생존본능과 맞물린다. 호텔 안은 부자연스럽다. 그들의 얼굴에선 희로애락을 찾을 수 없다. 그저 무미한 공기만이 자욱하고 피상적인 서로를 대면한다. 그리고 작위적이고 상투적인 대화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신기한 것은 그런 와중에도 누군가는 짝을 찾아 떠나고 누군가는 동물이 된다는 것이다. 결론은 생존의 문제다. 한마디로 <더 랍스터>의 사랑은 벼랑 끝에 있다.


살기 위해서라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은 감각의 전이를 전제로 한다. 감각은 인지에서 비롯된다. 일단 그들은 호텔엔 결핍된 신체와 정신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일 테다. 연민하거나 싫어하거나. 그러나 영화는 과감하게 모든 선택지를 배제한다. 감정을 지우는 것이다. 진실한 감정이 생산되는 개인의 공간도 지워버린다. 통제된 삶은 철저한 규율과 감시를 통해 행위적 사랑에 가닿는다. 그래서 은밀할 것도 없고 알고자 갈망할 것도 없다. 호텔에서 형성되는 공통된 인식은 두 명이서 행복한 삶이 아닌 그저 혼자일 때 불행한 삶이다. 짝을 찾아야만 불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전반에 산재하는 심리적 압제는 ‘공통점 찾기’라는 영역에 방점을 찍는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상대와 공통점을 형성해서 짝을 이루고자 한다. 공통점은 대개 피상적인 모습에서 도출된다. 코피를 흘리는 것이나 냉정한 모습처럼 눈에 보이는 특징이 매개가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니 자연스레 진실한 자아는 뒤로 숨는다. 사람들은 힘겹게 포착한 기회라는 옷에 자신을 구겨 넣는다. 실로 사랑을 해야만 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가식이다. 그야말로 허울의 향연이다.



여기서 데이비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는 근시를 가지고 있다. 근시는 말 그대로 가까운 것을 잘 보고 먼 것을 보지 못하는 시각적 현상이다. 안경만 쓰면 삶에 전혀 지장이 없는 흠결이 아내와의 이별을 초래했다. 이 황당한 이유는 시각의 범주를 확장시키는 순간 나름의 당위를 획득한다. 그는 짝을 찾기 위해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여성에게 자신을 맞추고 이내 후회하며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목전의 이해에만 천착해 넓게 바라보고 판단하지 못하는 어수룩함은 근시안적인 그의 성향을 짐작케 한다. 시각적 차원에서의 근시에만 머물면 안 되는 이유이다.


그는 적어도 안경을 쓰고 있으니까 말이다.



넓게 바라보는 사랑은 치열한 경쟁이다. 사냥이란 기제는 이러한 과정이 함축하는 냉정한 현실을 도식화해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호텔에 머물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사냥을 통해 누군가를 잡아야 한다. 음산한 숲속에서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총을 겨누는 장면은 ‘사랑은 전쟁’이라는 지독한 명제를 충족시키기에 손색이 없다. 사랑을 쟁취하고 지녀야만 한다고 종용하는 극단성이 낳은 최적의 생존논리인 셈이다. 그러나 필사적인 과정에서 지리멸렬하는 사랑은 종잡을 수 없고 여전히 그들은 표정이 없다. 단지 이기적인 가식만이 사랑의 영역을 메워가고 있을 따름이다.



영화 속의 세계는 사랑해야만 하는 곳과 사랑해선 안 되는 곳으로 철저하게 양분되어 있다. 데이비드는 이질적인 두 영역을 모두 가로지른다. 강요받는 사랑에 지친 그는 사랑이 금지된 영역에서의 삶을 맞이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근시를 지닌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이는 이전의 공간에서 무수하게 목도한 공통점과는 확연히 다르다. 억지로 맞출 필요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공통된 결핍을 나누며 완연한 동질감이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흠이라면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이다. 자유의지를 되찾았지만 그는 서성일 수밖에 없다. 이유는 명료하다.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는 생존에 대한 의식은 어느 곳에서나 유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랑은 생존과 본능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혼란 속을 부유한다.
 
필사적인 갈구의 영역으로 사랑을 밀어 넣은 자들은 유약하다. 삶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 100년이나 살며 평생 번식이 가능한 랍스터로 변하고자 하는 데이비드도 마찬가지다. 최악에서도 최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그러니 짝을 찾기 위해선 자아의 사멸 정도는 담보로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숲속에는 뚜렷한 제약이 없다. 본능과 욕구에 잠식되기 충분한 조건이다. 데이비드와 근시의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뤄질 사랑은 척박한 토양에서도 싹을 틔우기 마련이다. 호텔에서의 무수한 노력을 무위로 치환시킬 수 있는 대목이 반대급부로 등장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을 조명하는 후반부의 플롯은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자연스러움이 물씬 묻어난다. 진정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다.



사랑을 택한 그들은 평범한 도시로 도망치기로 한다. 사랑을 하지 못해 도시에서 도망쳤던 이들이 이제는 사랑을 위해 도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기묘한 역설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빛을 발한다. 근시의 그녀는 식당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데이비드를 기다린다. 영화는 이 기다림에 1분의 정적을 할애했다. 미동도 없는 카메라의 시선 때문인지 1분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와중에 홀로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사랑을 약속한 이의 부재를 의식하게 만든다. 충족되지 못한 미완의 1분에서 우리는 사랑이 언제나 결여된 것임을 마주하게 된다. 결핍은 사랑하지 않을 때도 존재했고 사랑할 때도 여전하다. 도시는 잘못한 것이 없다. 창문 밖의 도시는 생동하지만 안에 홀로 남겨진 그녀만이 외롭고 정적일 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사랑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일면의 결핍이 공간의 분위기를 좌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랍스터>는 사랑을 해부했다. 그리고 온전할 수 없는 본질을 드러냈다. 사랑은 언제나 갈망 혹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 어느 쪽을 택해도 필연적인 결핍이 수반된다. 영화는 그런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그려내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다른가?’ 여기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여자는 동물을 쏴 죽인다. 영화의 설정을 차용하자면 그 동물도 어떤 사람이었을 테다. 만약 둘이 짝이었다면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증오했거나 죽일 만큼 사랑했거나. 영화의 세계는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하거나 사랑할 수 없거나. 그리고 영화의 끝에 데이비드는 없다. 다시 질문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굳이, 사랑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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