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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7. 2018

처연한 삶을 어루만지다

영화 <밀양>을 보고

그녀의 세상은 기울었다. 상실의 심연은 가늠할 수 없이 깊고 사선처럼 어긋나고 비틀린 삶은 희망에 안녕을 고하듯 무망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망자가 되뇌던 바람 한 움큼을 쥔 채 처진 그림자를 이끌고 비밀의 볕에 들어선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상실을 마주한다. 섭리나 운명 따위로 치부하기엔 가혹하다 못해 부조리하게 다가오는 절망이다. 평범함조차 허락되지 않는 비루한 일상에는 분노와 절규만이 그득하다. 이윽고 그녀는 모진 운명을 씹어 먹고자 포효한다. 이토록 처절한 <밀양>의 서사는 광활한 들판에 내리쬐는 햇볕마냥 강렬하게 다가온다.



신애에게 밀양은 낯선 공간이다. 그저 죽은 남편의 고향이라는 것만이 밀양과의 유일한 접점이다. 막상 서울에서 내려와 살기로 했지만 생경함이란 무게를 견디다 못했는지 차는 도로변에 멈춰 선다. 그리고 카센터 사장 종찬이 등장하며 그들을 밀양 안으로 인도한다. 이후 유쾌하고도 살가운 그의 존재는 두 모자를 돕는 조력자의 형태로 비춰진다. 신애 역시 재기를 위한 의지를 밀양에 대한 애착으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하며 피아노 학원도 운영하고 이웃 주민들과도 친근한 교류를 이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맞이한다. 믿고 지냈던 이가 유괴하고 앗아간 아들의 흔적은 허망함과 배신감으로 얼룩졌다. 아픔을 잊기 위해 찾아온 밀양에서 또 다시 마주한 상실감은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영화는 평온한 정착기에 다시 상실의 순간을 배치시키며 비참한 변주를 이어나간다.



절망 속을 배회하는 신애가 교회에 처음 들어서면서 목 놓아 통곡하며 극단의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은 가히 인상적이다. 고여 있던 눈물이 신앙이란 이름 앞에 방류되고 그녀는 있는 힘껏 가슴의 응어리를 토해낸다. 이를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종찬의 표정은 당혹과 연민을 번갈아 내비치며 불안정한 심리를 보여준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특별한 말을 건넨다거나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고 삶을 내려놓을 것만 같은 그녀를 종찬은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처연한 읍곡에 절망의 감각을 새기는 그녀의 시간을 온전하게 지켜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유는 자명하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리고 침묵이야말로 종찬이 가장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 진심이었다.



이후 신앙을 통해 용서와 사랑을 깨달은 신애는 결국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한다. 하지만 면회 장소에서 만난 그는 이미 믿음을 통해 구원받았다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용서를 가능케 했다는 사실은 신애로 하여금 격렬한 분노에 휩싸이게 만든다. 그녀는 이 부조리함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금 비탄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이것이 이창동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이다. 출구 없는 밀실 속을 방황하며 희미한 희망을 부여잡지만 이내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벽을 마주하는 현실. <박하사탕>의 영호도, <오아시스>의 종두와 공주도 그런 현실을 살아간다. 희망의 부재를 단정하지 않지만 절망의 영역이 더 깊고 넓음을 보여주는 이창동의 영화는 고통을 인내하며 뿌리 깊은 상처를 짓이긴다. <밀양> 역시 신애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도려내고 다시 깊게 패인 상처를 마주하게 하면서 삶은 그저 덧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음을 역설한다.

숱한 변곡점을 지나온 신애는 변화에 지치다 못해 자기 파괴적인 행보를 택한다. 정도(正道)의 선을 지워버린 그녀는 거침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자신을 내려놓기도 하고 던져버리기도 한다. 결국 그녀가 희망을 심었던 밀양은 절망의 꽃을 피워냈다. 그러나 과연 밀양이 희망을 심을만한 공간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영화 전반에 걸쳐 제기될 만하다. 신애의 동생이 던진 말이 사실이라면 밀양은 외도를 하다가 죽은 남편에 대한 아픔이 상기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그녀는 괜찮았노라고 자위하며 밀양에서 희망을 심고자 했고 그렇게 했다.


그러나 신애는 과거의 아픔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새로운 출발은 곧 현실에 대한 회피이기도 하며 기존의 감정에 대한 조작적인 편집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러한 자기기만이 애써 아픔을 차치한 채 밀양으로 달려간 신애의 삶이 반등의 기회를 맞이할 수 없었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밀양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과연 그녀가 행복했을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이미 공간의 차원을 뛰어넘었다.


종찬의 말처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신애의 아픔을 전달함에 있어서 영화는 줄곧 종찬의 시선을 빌려온다. 종찬은 신애에 의해 ‘속물’로 규정된 인물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다. 그는 돈을 밝히고 다방 레지와 성적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인맥 관리에 여념이 없다. 그야말로 속물적인 삶을 가꿔나가는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신애에 대한 그의 사랑만큼은 속세적인 차원에 결부시키지 않는다. 그는 사랑을 앞세워 그녀의 삶을 온전하게 흡수하기 시작한다. 또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미세한 파동조차 개입시키지 않으며 그녀의 발자취를 뒤따른다. 이처럼 영화 전반에 걸쳐 흐트러지지 않는 종찬의 일관성은 신애의 삶에 비춰봤을 때 종교보다 더욱 큰 안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신애가 망가질수록 그의 존재감은 더욱 빛이 나며 현실에서의 소소한 위안을 선사한다. 사방을 헤집던 그녀가 언제나 제자리에서 기다리는 그를 바라볼 때 속물적인 현실은 자그마한 안식처가 되어 다가온다.


<밀양>은 지독하게도 현실적이다. 영화 속의 시간은 신앙이 가닿을 수 없는 삶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며 상처받은 인생에 적정한 페이소스의 덩어리를 펴 바른다. 이는 속 빈 동정이 아니다. 참상의 총체를 목도한 누군가만이 조심스레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이다. 그리고 영화는 불행을 잠식시키고자 등장하는 선의의 허상을 짚어내고 그림자마냥 늘 뒤를 따라다니는 투박한 진심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마지막에 머리카락을 자르는 신애에게 거울을 비춰주는 종찬은 한없이 밝은 웃음을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는다. 볕든 땅은 여전히 축축하고 상심과 슬픔이 짓이긴 상처를 메우기에 진심은 실로 버겁다. 가늠할 수 없는 비밀의 볕에 우리네 삶이 겹쳐진다. 그저, 별다를 것 없이 고된 삶이다.


신애의 것이나 나의 것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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