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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8. 2018

우리라는 이름으로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고

부성애는 무겁고 낯설다. 탯줄로 모성과 교감했던 태아기의 유대감에 가려진 탓일까. 아니다. 구태의연하지만 가장의 무게를 생각해보자. 수많은 아버지들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친밀감은 뒷전이었던 고독한 가장의 역사를 답습했다. 심지어 영어로 가장은 ‘breadwinner’다. 가족이 먹을 빵을 가져와야만 비로소 가장의 자격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란 존재에게 생존은 숙명이었다. 온몸으로 받아낸 숙명의 무게는 숱한 가장들에게 각자의 자리를 정해줬다. 그리곤 치열한 삶의 터전에 뿌리를 내리게 했다.


그렇게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버무려진 세월의 선에서 그들은 여전히 무겁고 꼿꼿하다.



료타도 이런 가장의 관성에 편승한 인물이다.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전형인 그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일로 가득하다.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하다며 너털웃음을 지어보이는 아내에게 그는 머쓱한 웃음만 지을 따름이다. 그리고 시선은 다시 책상에 가득히 놓인 업무 자료로 향한다. 실로 익숙한 현대 가족의 풍경이다. 료타에게 사회적인 성공은 곧 가족의 행복으로 치환된다. 6살 난 아들 케이타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 마음껏 피아노 교육을 시키기 위해선 그에게 일이 최우선의 가치여야 마땅하다. 그가 보여주는 사랑은 이렇다.


지금을 살아가는 여느 아버지들처럼 말이다.



이렇듯 단조로운 그의 일상에 큰 전환점이 마련된다. 아이가 바뀐 것이다. 흠결을 용납하지 않았던 삶에서 큰 숙제를 안게 된 료타는 고민을 거듭한다. 그리고 자신의 친아들인 류세이를 데리고 있는 사이키의 가족을 마주하게 된다. 허름한 옷차림에 어설픈 행색으로 가득한 유다이의 가족은 료타에게 생경한 감정을 불러온다. 무능력해 보이는 상대에 대한 심리적 우월감을 느끼면서도 자신과는 다르게 아이들에게 한없이 살갑고 친근한 아버지로 존재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대조되는 두 가지의 삶을 병치하며 일전에 없던 심리적 자극을 유발한다. 이는 온전치 못한 두 가장의 결핍성과 상대적 장점이 교차되면서 진정한 아버지의 존재를 모색할 계기를 마련한다고 볼 수 있다.



낯선 환경을 마주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류세이는 정제된 규정으로 가득한 일상을 거부한다. 젓가락질을 교정하고 예의범절을 강조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이타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움은 케이타에게 불편한 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두 가지 환경에 대한 거부반응은 호오의 차원에서 논할 이유가 없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친근함이다. 진짜 아버지보다도 나의 편한 일상을 꾸려준 아버지의 존재가 우선적인 가치인 셈이다. 이렇게 영화는 자연의 섭리를 되짚어가는 두 가정에 연신 생채기를 내며 통속적인 관념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이어간다.



료타에게 닮아간다는 것은 피를 나눈 자손에게만 주어지는 필연이다. 하지만 사이키 가족은 다르다. 낳았기 때문에 닮는 것이 아니라 같이 지내기에 닮는 것이라는 그들의 말은 완고했던 료타의 폐부를 깊숙하게 파고든다.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사이키의 말도 궤를 같이 한다. 그는 부단한 노력과 애정만이 비로소 아버지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촉매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료타에게 생소하기만 하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을 하거나 연을 날린 추억조차 없다. 각자도생이라는 차가운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환경만이 료타의 과거를 설명할 뿐이다. 멀찌감치 떨어져 자식의 성장을 묵묵히 관조하는 아버지. 료타에게 아버지란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새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다가온 지금,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극히 보통의 아버지란 무엇일까.



영화에서 어른들의 시선은 한없이 부족하다. 현실은 아버지가 양육권을 결정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이가 아버지의 존재를 선택하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이를 방증한다. 료타는 분명 좋은 외부적 조건을 지닌 아버지로 그려진다. 하지만 자신의 방식대로만 훈육의 방향을 결정하는 모습은 분명 교감하지 못하는 부성의 무능력함을 상정한다. 케이타에겐 피아노 연습을 통해 승부욕을 강요하고 류세이에겐 아버지라 부르길 강요하는 그의 모습은 가족의 본질적인 가치를 모르는 자의 과신에 불과하다. 료타는 여전히 가족이라는 테두리 위만을 겉돌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아이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정하고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의 순수한 시각에 바람직한 당위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가치가 무형의 헌신보다도 눈에 보이는 애정으로 다가오기를 바랐던 아이들의 간절함은 영화 전반을 있는 힘껏 휘감는다. 애정 어린 엄격함보다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서 함께 물장구를 쳐줄 수 있는 다정함이 고팠던 아이들 앞에서 부모는 한없이 죄스러워진다. 그렇게 영화는 진심을 교감하지 못하는 부모의 어리석음과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방법을 실천했던 부모에 대한 연민을 필연적으로 교차하게 만든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는 원체 불완전하기에 성장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말이다.



료타는 매미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15년이나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동안 료타의 삶을 지배했던 시간은 자연의 시간이었다. 당연하게 주어져서 당연하게 흘러가는 순리와도 같았던 것이다. 아버지라는 가치도 그러했다. 그저 혈연의 이름으로 마땅하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 지당했던 순리에 애정의 이름을 덧칠할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마주하는 시간을 켜켜이 쌓아 비로소 아버지라는 존재가 되겠노라 외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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