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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8. 2018

오늘도 경주는 숨을 쉰다

영화 <경주>를 보고

살다보면 물결처럼 흘러가던 세월이 바삐 가는 발목을 붙잡을 때가 있다. 촘촘하게 메워진 과거에 균열이 생기고 묵직한 공허함만이 자욱할 때, 시간은 잠시 우리를 멈춰 세운다. 잠시나마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면 정교하게 찍힌 흙빛 발자국이 있다. 우리는 그 흔적으로부터 과거의 내가 꾸려온 어렴풋한 삶을 반추한다. 그리고 이런 역순의 과정은 추억이란 말로 치환되곤 한다.


<경주>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역행한다. 등장인물들은 지난 세월의 추억과 말들로 오늘과 내일을 채워간다. 장소마저도 경주다. 천년의 사멸이 역사로 회자되며 숨 쉬고 있는 곳에서 인물들은 삶을 이야기하고 개인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이처럼 이야기와 장소의 절묘한 앙상블은 잔잔한 일상의 공기를 휘감은 채 영화 전반을 꾸려나간다.



한국의 정서가 품고 있는 경주는 우정 그 자체이다. 이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남겼던 사진 한 장은 퍽퍽한 일상 속에서 이따금씩 그리움을 일렁이게 만든다. 하지만 <경주>의 사진은 영원한 이별의 정점에서 제시된다. 현이 선배 창희의 장례식에서 발견한 영정사진은 지난날 그들이 같이 찾았던 경주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창희의 웃음은 역설적으로 저릿한 아픔을 느끼게 만들지만 곧 바라보는 이의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그렇게 현은 당시를 느껴보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힌다. 비록 추억의 동반자는 죽었지만 그가 내쉬었던 숨결이 경주 어딘가에 배어있을 거란 무망한 기대감은 현을 순식간에 경주에 데려다놓는다.
 
영화는 경주의 풍경을 조용하게 담아낸다. 어떠한 부연설명도 없고 그저 숨죽인 채 찰나의 일상을 조명할 뿐이다. 유독 영화는 역사와 일상이 뒤섞인 풍경에 집중한다. 왕릉 주변을 거니는 아이들과 연인들부터 한옥에서 차를 마시는 도시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개인의 역사가 천년고도에 아로새겨지고 있다. 현 역시 이곳에서 자신의 역사를 훑어본다. 그는 옛사랑에게 연락해 만나보기도 하고 오래전 들렀던 찻집을 찾아가 벽에 있던 춘화를 찾아보기도 한다. 반추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가며 의식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리고 고요한 행간 속 인물들은 복잡다단한 심상을 옅게 뿜어내며 다양한 시간이 어우러진 현재를 주목하게 만든다.



옛사랑인 여정과의 만남은 불편함으로 가득하다. 여정은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지 않았던 현의 과거에 쌀쌀한 조소를 보낸다. 자신과의 사랑을 한낱 스쳐가는 것으로 치부하며 중요한 순간은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는 그녀의 응어리진 성토에 현은 멍해진다. 아름다움을 추억하고자 만났던 그녀로부터 그가 확인한 것은 본의 아니게 비굴했던 자신이었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둘 사이의 과거는 현재의 그들과 맞물려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남편의 의처증에 시달리는 여정과 중국인 아내와 다툰 채 멀어진 현은 버거운 현실에 아픈 과거 한 줌을 얹어놓았다.


여정을 떠나보내고 시내로 돌아온 현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발길을 이어가던 그는 다시 찻집을 찾게 된다. 현의 시선에서 찻집은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공간이다. 현은 북경대의 교수이며 중국인 아내를 두고 있고 찻집 주인 윤희는 공자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중국이란 공통분모를 꽤나 빠르게 형성했다. 그리고 건너편에서는 일본 여성들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현을 연예인으로 착각하며 잘생겼다는 말과 함께 사진 찍기를 요청하기까지 한다.


경주라는 공간에서 맞물린 세 나라의 문화는 경주만의 특수성을 지워버린다. 한반도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공간이 어느새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지난 역사의 아픔을 용서해달라는 일본 여성들의 참회와 동북아 정치학 권위자인 현의 존재는 단선적인 역사에 다양한 갈래를 내놓는다. 그렇게 찻집은 찻잎을 우려내는 시간만큼이나 역사라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인고의 과정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개인의 역사만큼이나 전체의 역사도 복잡하기 매한가지니 말이다.


밤이 되고 현과 윤희가 함께 찾은 모임은 영화 속 역사의 진의를 궁구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현의 학문적 지위를 알아보고 자신을 북한학 교수라 소개하는 박 교수를 통해 영화는 은연중에 시대의 역사를 질문한다. 그러나 현은 이 모든 것을 똥이라 명명하고 박 교수는 분노한다. 사실 박 교수의 분노는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정치학자라면 지극히 품어볼 법한 것이다. 북한과의 대치 관계로 미뤄본 한반도 정세와 우리 민족의 미래라는 대의가 현의 발언으로 뭉개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현 또한 엄연한 한국인이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현의 하루를 되짚어보게 만든다. 그가 경주로 내려와 확인한 과거는 그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하다. 지난 세월을 함께 했던 누군가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전부이고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도 가득하다. 정세의 흐름이란 역사를 파악하는 권위자가 자신의 역사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무기력함이 그의 학문을 똥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조차 모르는 자가 현실과 정세를 논한다는 역설에 봉착한 현은 그렇게 침묵 속의 고뇌를 이어간다.



이윽고 하룻밤을 청하기 위해 윤희의 집을 찾은 현은 그녀의 과거를 듣게 된다. 남편의 자살이라는 상실감을 이겨내고자 차를 마셨고 찻집까지 차리게 된 과정은 현으로 하여금 잠 못 드는 밤을 맞이하게 한다. 윤희는 남편과 귀가 닮은 현을 갈망했지만 이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허망해한다. 현 역시 문 틈새로 잠자리에 든 그녀를 바라보지만 끝내 문지방을 넘지는 않는다. 과거의 향유가 현실의 관계마저 경직되게 만든 상황 속에서 그는 다시 자신만의 수련에 들어선다.


유독 영화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련에 임하는 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하루 내내 자신이 찾고자 했던 추억 그 이상을 마주하고 버거움을 인내하지 못하는 자의 정제된 발악으로도 보인다. 영화는 골몰하는 자의 번뇌가 정화되는 과정을 끊임없이 비추면서 과거라는 시간의 무게감을 묵직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는 벽자의 글귀처럼 달 밝은 새벽엔 풀벌레 소리만이 그윽하다.


날이 밝고 현에게는 예기치 못한 불안정함이 찾아온다. 전날 만났던 여정의 남편이 그를 쫓고 있고 점집에서 만났던 할아버지는 사라졌고 여정과 앉아있던 슈퍼의 걸상은 텅 비어있다. 설상가상으로 어제 만났던 폭주족들은 그의 눈앞에서 사고를 당하고야 만다. 어제를 형성했던 요소들이 모두 사라지자 그는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풀숲을 헤집기 시작한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사라진 과거와 자신 앞에서 사라진 과거가 병치되면서 사멸에 대한 공포감이 생겨나기에 이른다. 이는 허둥지둥하는 현의 모습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마지막까지 죽음의 이미지로 치환되는 과거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시 시선은 찻집의 윤희에게로 돌아가고 그녀는 벽 속에 갇혀있을 춘화를 들춰보기 위해 벽지를 뜯어낸다. 이로 인해 현의 과거는 죽기도 했지만 윤희에 의해 되살아나기도 한다. 이처럼 정적인 과거를 생동하는 시간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영화의 종반부는 실로 감각적으로 느껴진다.



<경주>는 생사를 넘나드는 삶의 역동성을 정제된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차 한 잔의 여유와 함께 영화는 다시 몇 년 전의 찻집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엔 죽은 창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벽에 그려진 춘화를 보며 감탄하는 세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은 다름 아닌 윤희이다. 동일한 시점에 공존할 수 없는 과거들이 한데 모인 장면은 시간의 연속성을 파괴하면서까지 강조하고 싶었던 추억의 생생함을 짚어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음마저 사멸하지 않고 삶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불가능의 가능이란 역설을 제시한다.


실제의 경주는 천년고도의 역사와 21세기 대한민국의 일상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이 삶이고 죽음인지 단정할 수 없다. 하물며 여기에 과거를 담아놓은 이들에게는 두말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경주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누군가의 삶을 고스란히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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