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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9. 2018

선혈로 물든 욕망

영화 <블랙 스완>을 보고

발레는 극단의 예술이다. 아름다운 신체가 그려내는 곡선은 언제나 발끝이 감내하는 중력의 고통을 마주한다. 무대 위 찰나의 감동을 위해선 숱한 자학이 필요하다. 수차례 자연의 힘을 거슬러 망가져버린 발은 보드라운 토슈즈 속에 감춰져있다.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아이러니이자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가 짊어져야할 숙명이다. 발레는 완벽의 예술이기도 하다. 최고를 선보이고자 하는 욕망과 열정은 서로 맞물려 티끌만한 흠결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블랙 스완>에서 극단과 완벽의 만남은 열정 대신 광기로 치환되며 극한의 심리를 조명한다.



영화의 분위기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주인공 니나가 보여줄 수 있는 괴기스러운 집착과 고통에 집중할 뿐이다. 발레를 향한 순수한 열정이 격렬한 광기에 물들어가는 과정은 낯선 것과 만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발레가 지니고 있는 정석적인 관념에 위배되지 않도록 그녀는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최선이란 틀에 스스로를 맞춘다. 뛰어난 선배의 립스틱을 훔쳐 바를 정도로 강렬한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일상에서 <백조의 호수>는 그녀가 지닌 재능이 발현될 시험대다. 순수하고 고고한 아름다움을 표현해내는데 익숙했던 니나에게 백조는 최적의 역할이다. 하지만 관능적이고도 매혹적인 흑조는 그녀의 삶과 무관한 이질적인 영역이다. 주인공을 맡기 위해선 관능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낼 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의 관성을 뒤틀어버릴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혼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흑백의 대비는 가장 선명한 혼란이다. 니나는 하얀 의상을 고수한다. 그녀는 우연히 일상에서 검은 옷의 군상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는 겁에 질린다. 하지만 타인에게 비춰진 자신은 뇌쇄적이면서도 차갑다. 생경한 자아와 마주한 것이다. 이는 곧 결핍이 발현되는 순간이자 완벽에 가해지는 위협이다. 이를 지켜내기 위해서 니나는 새로운 불안과 강박을 느끼게 된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영화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는 핸드헬드 기법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심상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결국 그녀가 마주한 새로운 결핍은 검은 집착을 향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며 극적인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킨다.


거울도 주목할 만한 소재다. 고뇌와 불안에 찰 때마다 니나는 거울을 마주한다. 여기서 영화는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활용한다. 사방에 배치된 거울 속 그녀가 달리 움직이는 것이다. 자아가 분열하며 증대되는 공포감은 정체성이 지닌 원형을 지워나간다. 더불어 사방으로 분출하는 욕망을 거울에 투사하면서 본능적인 이끌림과 방어의식을 효과적으로 재현해내기도 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거울 속 니나는 점점 격렬하게 변해간다. 현실 속 니나가 압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내 그녀는 현실에 순종적이었던 자신이 욕망으로 가득 차는 것을 목도한다.


그제야 영화는 짙은 광기를 내재하기 시작한다.

   

싹을 튼 광기에 열을 올리기라도 하듯이 영화는 끊임없이 피를 흘려보낸다. 니나의 몸에 새겨진 혈흔들은 언제나 피를 머금고 있다. 그녀는 견디지 못해 피를 닦아낸다. 육신을 뚫고 흐르는 피는 니나로 하여금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마주하게 한다. 손가락의 상처를 뜯어내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는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피는 여전히 맺혀있다. 그녀는 유약하다. 과감하게 피를 흘리는 결단을 내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니나는 끝없는 갈등에 휩싸인다. 언제나 중심에 서있는 완벽한 발레리나를 꿈꾸지만 피 흘리는 결함에 대해선 한없이 주저한다. 


이토록 선명한 이중성은 필연적인 선택을 재촉하듯이 다가온다.    


영화는 니나가 지닌 완벽주의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주변 인물들에 집중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스스로 할 수 있는 행동들마저 대신 해준다. 유아 단계의 모성애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제된 감정이 존재한다. 이런 제약은 성인인 니나에게 압제로 작용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변하는 의식을 통제하려는 행동들은 니나가 지닌 본능을 억압하는 양상으로 비춰진다. 이는 성적인 측면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이를 가지면서 발레를 그만 뒀기에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어머니의 말이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그녀는 성적인 욕망에 휩싸인다는 것은 곧 발레와 멀어짐을 뜻한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니나가 언제까지나 아이처럼 순수하길 바란다. 하지만 이런 이기적인 열망은 의도치 않게 니나를 일탈로 인도한다.


  

반대로 직선적인 관능을 종용하는 인물들도 있다. 단장인 토마스는 순수하지만 연약한 니나의 열정을 탐탁찮게 여긴다. 그는 니나가 더욱 격정적으로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길 원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집착을 놓길 원하며 키스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 맹렬한 저항은 결국 그녀를 프리마돈나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본능이 그녀에게 선사한 첫 선물이다. 그는 니나라는 온실 속의 화초를 거친 본능의 영역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성적 영역에서 행동을 권유하는 그의 일관된 태도는 니나로 하여금 원초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토마스가 니나를 변화의 시작점으로 이끌었다면 결승선까지 그녀를 견인하는 것은 릴리의 몫이다. 그녀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담배나 마약과 같은 일탈도 서슴지 않는다. 니나와 정반대인 셈이다. 이는 흑백이라는 시각적 대비를 통해 아주 훌륭하게 재현된다.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릴리는 지속적으로 니나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일종의 유혹으로까지 보이는 그녀의 접근은 천천히 변화를 이끌어낸다. 클럽에서 릴리가 건넨 검은 민소매는 니나가 처음으로 입는 검은 옷이자 자극적인 열망에 자신을 투사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그리고 곧 그녀의 심정은 릴리에 대한 동경과 질투로 점철된다. 결핍은 견딜 수 없는 것이자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극도의 불안이 유발하는 광적인 행동과 망상에 사로잡힌다. 


영화는 이 형체 없는 광기와 긴장을 머금은 채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간다.


      

<블랙 스완>의 종반부는 모든 희로애락을 뒤로 하고 흑조로 거듭나는 니나를 담아낸다. 무대 위에서 관능미를 발산하며 멋진 턴을 선보이는 모습은 완벽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온전한 자신을 내보이며 자연스러운 연기를 해낸다. 그리고 그녀의 배에 생긴 상처는 선홍빛 피를 내뿜으며 무대의상에 배어든다. 그럼에도 자신은 완벽했다고 되뇌는 그녀의 얼굴은 만족감과 행복으로 만연하다. 번잡한 일상을 괴롭혔던 자잘한 상처는 몸을 관통할 만큼 커지고 나서야 그녀를 완벽으로 인도했다. 그리곤 하얗게 물드는 영화의 마지막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완전한 흑조가 되어서야 비로소 환히 빛나는 백조가 될 수 있었던 그녀, 그리고 애초에 불가능했던 완벽함이 삼킨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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