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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9. 2018

역사가 자백해야 한다

영화 <자백>을 보고


우리 정치엔 오래된 프레임이 있다. 그 프레임 속에서 우리는 이념에 핏대를 세운다. 유일무이한 주적에게 맹목적인 적개심을 쏟아낸다. 비단 총이 권력을 잡던 시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매스컴은 연일 북한과 안보를 논하고 이들의 간헐적인 도발을 예의주시한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간첩이란 익숙한 두 글자는 여전히 선명하다. 정보화 시대에 정보가 새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당연히 이들에 대한 경계심이 상당한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버젓하게 무고한 피해자를 간첩으로 만드는 국가적 해프닝은 좀 놀라운 이야기다. 영화 <자백>은 이 놀라운 이야기를 집요하고 면밀하게 추적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탈북자는 늘어간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들이 마주하고 싶은 더 나은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유가려씨도 그러했다. 그녀는 오빠 유우성씨를 애타게 찾았다. 단지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함께 살아갈 날을 꿈꿨다. 하지만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다. 그녀는 오빠가 간첩임을 억지로 인정했다. 훗날 가족의 행복을 담보하는 검사의 회유도,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주는 여수사관의 보살핌도 그녀에겐 그저 새로운 압제였다. 그녀에겐 거짓된 자백만이 유일한 출구였다. 그러나 힘겨운 자백 뒤에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매정한 추방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거짓 간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명분만이 이 땅 위에 남았다.

     

이는 유씨 남매뿐만 아니라 <자백> 속 수많은 탈북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진술은 상식적이지 못한 행태 전반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는 국가가 간첩을 굳이 조작하면서까지 만들어내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묻는다. 탐사 저널리즘이라는 요체에 걸맞게 철저히 상식에 입각한 질문들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런 침묵이 자극하는 호기심은 서서히 추악한 현실에 다가선다. 조작된 정황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권력은 비겁해졌다. 직설적인 물음 앞에 그들은 그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권력의 의도 아래 짓밟힌 개인의 아픔도, 부지불식간에 죄인이 되어버린 이들의 눈물 섞인 항명도 법이란 칼자루를 쥔 그들 앞에선 한낱 스쳐지나가는 외침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의 취재에는 더욱 힘이 실린다. 단계를 밟아나가며 밝혀지는 내막은 공권력의 농단이 얼마나 오만한지를 방증한다. 조작에 동원된 자료들과 진술은 치밀하게 그 실체를 감싸지도 못했고 변명 역시 치졸하게 일관된다. 그들은 비상식을 상식처럼 여겼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법치주의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에 안주하는 그들은 가히 폭력적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배치되는 진실과 거짓의 향연은 국가의 안전이란 미명 아래 권력이 자행하는 혹은 자행했던 폭력의 역사를 규명한다.



1970년대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을 진두지휘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의 우연한 인터뷰를 메운 것은 모른다는 말 단 하나였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부장 시절의 행적이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많은 의미를 시사한다. 모른다는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 지금보다 더욱 비민주적이었던 시절이 가했던 간첩이란 누명의 폭력은 어찌 보면 잊고 싶을 정도로 잔인했을 테다. 그리고 그 폭력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역사가 이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잘못에 대한 당사자들의 시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의를 갈구하는 누군가에 의한 확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건의 실체가 뚜렷해져 시원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름지기 건강한 사회는 자활이 가능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 주체가 권력이라면 잘못된 점을 스스로 바로잡고 시대에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성숙함을 바라기엔 아직 우리 사회는 덜 영글었다. 안타까운 점은 정직한 열매를 맺기엔 의식이란 토양이 너무나도 척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무작정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그저 그런 사회를 채찍질하며 직관적으로 느끼게끔 할 뿐이다. 



엔딩 크레딧을 장식하는 간첩 조작 사건들 역시 그러하다. 단순한 나열이 아니다.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사회에 묻는다. 정의와 상식이 이 땅에 존재하느냐고 말이다. 


답을 찾기 위해선 역사가 자백해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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