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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9. 2018

환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하여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고

샘 멘데스는 비뚤어진 감독이다. 그는 평범한 삶을 진부와 환멸로 이끈다. 단조로운 일상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평범한 것만큼 슬픈 건 없다며 나지막하게 뇌까리는 <아메리칸 뷰티> 속 한 장면처럼 말이다. 이토록 지루한 삶을 파헤치고자 하는 충동은 잔잔한 정적 속에서 파도를 일으킨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반복되는 부부의 일상과 가족의 의미를 조명한다. 영화는 도입부부터 시선을 집중시킨다. 영화는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호기심 어린 사랑에서 권태로 점철된 갈등으로 지체 않고 옮겨간다. 한순간의 이끌림은 그저 오만한 낭만에 불과했다는 듯이 두 사람은 지난날을 따지기에 급급하다. 본질은 차치한 채 힐난이 난무한다. 무망한 단어들은 그저 분노 속을 헤맬 따름이다. 이렇게 영화는 소통하지 못하는 부부의 단상으로 포문을 연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속에서 평범함은 무색무취로 나타난다. 프랭크는 중절모와 정장에 가려졌다. 천편일률적인 당대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다. 기차에서 내려 직장으로 향하는 수많은 중절모들 사이에서 프랭크를 단번에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본 그는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하다. 그에게 일상은 목을 가득 채운 넥타이처럼 단단하고도 명료하다. 오직 가장이라는 무게만이 그를 지루하고도 치열한 일상에 눌러앉게 만든다. 에이프릴도 마찬가지다. 무대에서 연기를 하며 꿈을 꾸던 모습은 이제 없다. 그녀는 그저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평범한 주부다. 무의미한 반복이 그녀를 지배할 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1950년대 미국을 보여준다. 


가족에 대한 의무에 골몰하는 평범한 어른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삶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인생을 흔히 롤러코스터에 비유하곤 한다. 희로애락의 거대한 파고를 그리며 희망과 절망이 형성하는 간극 때문일 테다. 두 사람에게도 기나긴 하향곡선에 잠시나마 마침표를 찍을 기회가 찾아온다. 부부는 파리로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보자고 말한다. 일상 속에 묻어뒀던 이상향을 꺼낸 것이다.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과감한 일탈을 선언한다. 그리고 피로에 젖은 일상으로부터 해방될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프랭크에게 우연찮은 승진의 기회가 찾아오면서 고조된 감정은 다시 사그라든다. 고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누구보다 꿈꿨던 에이프릴은 절망을 마주한다. 이윽고 부부의 갈등은 그 깊이를 더해간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갈등은 비단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도 놓치지 않는다. 부부의 단면만을 마주하는 지인들은 동경 어린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부러운 눈길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지인 헬렌의 아들 존이다. 그는 정신병 치료를 받고 있다. 자신이 바라보고 느낀 바를 그대로 털어놓을 정도로 직선적이기도 하다. 존은 프랭크에게 현실을 핑계로 공허한 삶을 지속하는 것은 비겁할 따름이라고 일갈한다. 온전치 못한 인물이 가장 직관적으로 핵심에 접근하는 대목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인들이 보여주는 이해와 공감이 표면에 그치고 있다는 걸 방증한다. 혼란 속에서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각자가 지닌 이상을 대치시킨다. 이윽고 스스로 감내해야만 하는 외로운 싸움만이 남는다. 이렇게 영화는 누구도 자신의 문제를 대신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결국 영화는 다음 질문을 묻고 있다. 이성적인 현실과 감성적인 이상 중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접점을 형성할 수 없는 평행선에 존재하는 가치들은 사뭇 무의미하게 비춰진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이 결국 삶의 본질임을 역설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모두 다르다. 따라서 완벽한 합의란 있을 수 없다. 불완전한 타협을 통해 감정을 조율할 따름이다. 하지만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대척점을 벗어나지 않는다. 격앙된 감정만이 불협화음을 선보인다. 이미 두 사람은 상식과 통념에서 벗어났다. 


왜 서로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만 되새길 뿐이다.



초라한 상념은 하찮고도 미약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모진 갈등은 반복을 거듭한다. 설상가상으로 감정의 방향마저 불확실하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이런 상황을 수긍할 수 없다.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가치를 찾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열하고도 절박한 싸움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낙태나 불륜처럼 비윤리적인 행위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 기인한다. 각자가 규정한 정체성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흔적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이제 오직 두 사람만이 중요해졌다. 다른 문제의식은 부차적일 뿐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일상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 이외에 여지를 두지 않는다. 실로 치밀한 구성력이다. 이는 애증이 맞물린 관계가 파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더불어 부부 사이에서 요동치는 강렬한 감정은 수그러들지 않으며 극적인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이토록 신랄하고도 첨예한 갈등은 무덤덤한 우리네 일상에 자그마한 경각심을 세운다. 그리고 극중 일상과 실재하는 일상이 공통의 일체감의 형성하는 순간 영화는 곧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이 영화의 흡입력은 그렇게 완성된다.

     

일상을 뒤집을만한 혁명은 그저 버겁게 제자리를 답보한다. 그렇게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카메라의 앵글은 다시 주변인들을 향한다. 그들은 조용히 프랭크와 에이프릴을 꺼낸다. 짤막한 대화가 이어지고 이내 적막이 찾아온다. 세상의 소음을 잠식하며 영화는 고요해졌다. 그리고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누구도 걷지 못한 혁명의 길이 삶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 과연 나는 그 길을 걸을 것인가? 


이내 영화의 끝은 곧 우리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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