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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20. 2018

유일한 진실을 위하여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을 보고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과 그것을 쉽게 믿는 성질이 하나가 되어 여론을 만들어낸다.” 진실은 섬세한 영역이다. 현상적인 사실로만 규정될 수 없는 미묘한 미지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미지에 대한 확증이 없다면 진실은 일단 거짓된 존재로 남는다. 


이제 언론을 바라보자. 많은 매체들은 무한한 경쟁심리에 사로잡혀 미완의 사실을 궁극의 진실처럼 호도하기도 한다. 이토록 투박한 정언적 판단은 언론계가 담보하는 신뢰를 안고 여론을 형성한다. 고로 폴 발레리의 전언은 마냥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신중하게 진실을 추구한다는 저널리즘의 본령에 충실한 이들도 존재한다. <굿나잇 앤 굿럭>이 다루고 있는 1950년대 미국의 CBS처럼 말이다.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싸였다. 그가 주동한 레드 퍼지(Red Purge)의 기치는 명료했다.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색출하여 단죄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표방한 반공 사상은 애국이라는 미명을 내세웠다. 반박의 여지는 없었다. 미국은 냉전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절묘하게도 시의적절한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언론으로 하여금 암묵적 중립을 지키게 만들었다. 


하지만 CBS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많은 삶들이 반공이라는 기치에 잠식됐다. 하지만 이면을 살펴보면 불분명한 사유만이 가득했다. 방송국 내에서도 합당한 비판을 통해 뒤틀린 진실을 교직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당시 CBS의 메인 앵커였던 에드워드 머로는 시류가 아닌 정론을 택하기로 한다.



영화에는 수많은 신문 영상이 등장한다. 공개 청문회에서 무고를 외치는 간절한 육성은 날카로운 애국의 단언 아래 힘을 잃는다. 머로는 어두운 영사실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한다. 이윽고 찾아오는 어둠 속의 정적은 순응과 저항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성을 조명한다. 이처럼 <굿나잇 앤 굿럭>은 밀도 높은 연출력을 통해 시대가 짊어졌던 무게감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이는 당대 저널리즘이 수반하고 있던 고뇌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인물들을 결단과 실천의 단계로 이동시킨다. 


결국 머로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통해 매카시즘이 지닌 병폐를 비판하기로 한다. 상당히 위험한 도전이었다. 회사의 존폐를 정의로운 신념과 등치시키기엔 현실에서 마주할 고난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자명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지 않는다. 이념의 폭거에 희생된 자들을 낳은 국가는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했다. 그러나 매카시즘의 폭압적인 사상 검증은 이러한 기조와 분명한 괴리가 있었다. 대다수의 미국 언론은 이러한 모순된 격랑을 묵과했다. 진실이 맹목적인 애국심으로 인해 유린되는 상황을 멍하니 관망한 셈이다. 반면 머로를 비롯한 CBS 팀은 정직한 힘을 증명하고 싶었다. 


언론의 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영화가 CBS의 저항을 담아내는 과정은 상당히 직선적이다. 매카시와 머로의 발언을 교차시키면서 매카시즘의 모순과 욕망을 직관적으로 느끼게끔 만드는 것이다. 매카시가 말하는 정의는 보편타당한 정의를 묵살했다. 국가 안보를 위한 선택은 오히려 공포감을 조성했다. 결국 매카시즘은 상대성을 중시하는 민주 정신을 철저하게 위배했다. 그리고 위스콘신 출신의 초선 의원은 시저를 언급한다. 전제적인 그의 행보와 절묘하게 맞물리는 이 단어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겨냥한다.


이렇듯 일련의 상황들을 나열하며 머로의 방송은 타당한 문제의식을 일목요연하게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머로는 비판이라는 목적과 언론의 중립성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분히 상식적인 사고에 집중한 결과였다. 단순하고도 명료한 그의 발언에서는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경도된 시대에 직언을 고할 수 있었던 담대함 때문이 아닐까.



머로의 철학은 영화 전반을 일관되게 관통한다. 바로 언론은 특정한 입장을 취할 수 없으며 오로지 확실한 증거에 따른 판단을 내리고 발언할 자유를 끝까지 수호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본에 충실했다. 영웅이 되기 위하여 교만한 선택을 하지도 않았고 스스로를 과장하지도 않았다. 오직 그에게는 상황의 본질을 놓지 않는 끈기만이 필요했다. 결국 머로가 추구한 정론은 광기가 범람하는 시대에 고요한 침묵을 선사했다. 


차분한 집중과 고된 인내가 알려온 승전보였다. 



머로는 최초의 종군 기자였다. 그는 세계대전이라는 막대한 공포를 전선에서 마주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참상을 대중들에게 전달했다. 포탄의 굉음 속에서도 그가 놓지 않았던 것은 세계 질서를 바로잡을 정의로운 선택의 여지였다. 머로는 꾸준히 지평선 너머의 시간을 관찰하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는 시시각각 급변하는 전시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보편적인 정서를 향유하고 인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가교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 것이다. 그에게 공포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저 이 불편한 감정은 그가 사회를 더 파고들며 문제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 이유로만 남았을 따름이다.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다른 공포가 미국을 잠식했다. 하지만 그에게 매카시즘은 공포가 아니었다. 시대를 휩쓴 이념의 돌풍은 그가 관찰하게 될 새로운 사회의 단상일 뿐이었다. 머로는 자신의 신념과 결단력이 폭탄이 떨어지는 곳이나 이념의 사상의 논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진실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에 저항하는 거짓에는 힘이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머로는 언제나 진실의 편에서 바르게 흘러갈 세월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어김없이 시간은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고 어두웠던 언론계에도 희망의 빛을 드리웠다.



머로의 철저한 신념은 저널리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훗날 그의 뒤를 이어 CBS를 이끈 월터 크롱카이트의 말에서도 그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진실을 추구하려면 반드시 현상의 양면을 봐야만 한다.” 알고 싶은 것이 아닌 알아야만 하는 모든 것을 찾고자 할 때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트 의식에 빠져 오만한 선택적 편집의 오류를 범하는 대신 머로는 성실하게 진실을 향한 열정을 보여줬다. 


그렇게 그는 멋지게 언론의 정수를 재현해냈다.

<굿나잇 앤 굿럭>은 언제나 그의 방송을 마무리했던 끝마디였다. 아마도 진실을 향한 노력이 내일의 세상을 더 밝혀줄 수 있길 소망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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