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너구리 DHMO Sep 27. 2022

대만유람기 (0) : 계획하기

입사 후 처음으로 리프레시 휴가가 나왔다. 

오랜 기간 동안 휴가를 내는 것 자체는 업무 특성상 크게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전에도 몇 번이고 사나흘씩 장기 휴가를 낸 적이 있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니고 '리프레시' 휴가다. 다시 말해, 휴가비 지원이 나온다.


그렇다면 스케일 크게 잡고 어딘가로 다녀오는 게 제일이지! 


리프레시 휴가가 부여된 날, 아내와 처음 상의한 끝에 나온 계획은 대강 이랬다. 


1. 리프레시 휴가는 2년에 걸쳐 나눠 쓸 수 있으니까, 일단은 5일씩 나눠 쓰자.

2. 올해는 가까운 곳으로, 내년에는 먼 곳으로 가자.

3. 우리 둘 다 일본 여행을 좋아하고, 연애 적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죽기 전에 꼭 가자는 약속을 해 뒀으니, 일본 일주와 스페인 여행을 하는 게 어떨까!


이 계획은 최소 6월 중순까지는 모두 유효했다. 6월 초,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아내와 같이 노트북을 켜 놓고, 일본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오는 코스로 할까, 같은 얘기를 즐겁게 나눴더랬다. 


그런데 아베가 또 '아베'할 줄은 몰랐지...

이런저런 사건이 터지고 나니, 일본 쪽으로는 도저히 정나미가 떨어져서 영 가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대단히 안정성을 중시하는 부류의 인간인 까닭에, 여행도 맨날 다니던 데 위주로만 댕겨 버릇했다. 국내 여행도 맨날 부산 아니면 전주, 해외 여행은 거의 90프로 이상이 일본. 야광봉을 멤버 색상별로 전부 사들고 각종 라이브를 쫓아다니는 프로이벤터도 아닌 주제에 일본 출입국 스티커가 붙어 있는 페이지만 여권의 절반 남짓을 차지하는 판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퍽 오래, 일본 이외의 다른 곳도 좀 다녀 보는 방향으로 궤도수정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어차피 세계는 넓고, 평생 가 보지 못할 나라들도 잔뜩 있을 것이다. 이전에 출장으로 방콕을 갔을 때에도, 또 자카르타를 갔을 때에도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돌아올 때는 떠나기 싫을 만큼 무척 즐거웠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아마 처음엔 어버버하더라도 돌아올 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겠지! 


그러나 나의 작디작은 마음은 어쨌든 동아시아를 벗어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나만큼이나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는 나보다는 더욱 용기가 있어서, 마침 동아시아권에서는 중국과 대만, 홍콩을 다녀온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셋 중에서 고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목적지는 비교적 빠르게 정해졌다. 일단 중국은 제끼기로 했다. 가뜩이나 둘 다 호흡기가 좋지 않은 마당에 제 발로 먼지구덕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지는 않았거니와, 학부 시절에 답사로 장안을 다녀왔던 아내가 중국 음식에 학을 떼었기 때문이다(아내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연 먹을 것이다). 홍콩과 마카오의 경우, 무척 매력적인 곳이지만 최근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여러모로 좋지 않은 일(경찰의 진압이라든가 경찰의 몽둥이라든가 경찰의 바보짓이라거나)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어 보여 아쉽지만 제외하기로 했다. 민주 홍콩 만세! 광복홍콩 시대혁명!  


자, 그럼 남은 곳은 딱 하나다. 

결국 또 섬나라다.


아내가 5년쯤 전에 다녀왔던 대만 여행이 그렇게 좋았다고 뽐뿌를 여러 번 넣은 바가 있었다. 음식이 맛있고 온천이 훌륭하고 경관이 멋진 곳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하기를 어언 5년, 드디어 그 '아름다운 섬Ilha Formosa'으로 갈 날이 온 것이다. 망고빙수! 우육면! 뿌넝슈어더미미不能說的秘密! 


9월까지는 대만이 무척 더운데다가, 결혼하고 나서 맞는 첫 명절이라 여기저기 다닐 일이 많아 일단 여행은 10월에 떠나기로 하였다. 마침 10월 초에는 휴일이 많아, 같은 양의 휴가를 내더라도 더 오랫동안 쉴 수가 있다. 이리저리 통박을 굴린 끝에, 10월 5일에 출발해서 10월 13일에 귀국하는 일정으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가는 편이 비행기도 더 쌀 뿐더러, 개천절을 끼는 것보다 더 여유롭게 이곳저곳을 돌아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김포에서 출발하여 타이베이 쑹산공항으로 입국해, 타이베이 타오위안에서 출발하여 인천공항으로 돌아가는 루트. 조금 번잡해 보이기는 하지만, 김포-하네다와 인천-나리타를 자주 겪어 본 사람 입장에서 이 정도쯤이야. 

다음은 대만 어디를 돌아볼 것인가를 정할 차례다. 타이베이에서만 체재했던 아내의 경험에 따르자면, 타이베이 한 군데에서만 한 나흘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은 닷새는? 신혼여행 때 휴양의 맛을 알아 버린 사람으로써 타이베이에 느긋하게 1주일 정도 체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지만, 기왕 좀 작은 나라로 길게 가는 김에 좀더 많은 곳을 돌아보고 싶다는 욕심도 마음 한 구석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원래 일본 여행을 계획할 적에도 카고시마에서 오사카까지 반주를 하려는 계획이기도 했고. 게다가 듣자하니, 타이완고속철도THSR를 타고 타이베이에서 가오슝까지 단 한 시간 반만에 주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라? 얼마 안 걸리네? 그럼 한 번 시도해 봐? 

까짓거 그냥 마 저지르고 보는 거지!

여기까지 정해지자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항공권 구매와 숙소 예약까지 한큐에 저질러 버린 것이다. 볼것이 많은 타이베이와 가오슝에서 각각 4박과 3박, 중간에 이동하는 과정에서 타이중에서 1박을 하는 일정이다. 

이로써 큰 틀은 정리되었으나... 그 뒤로 몰아치는 9월의 각종 방문일정 하며, 장기 휴가를 앞두고 처리해야 할 산더미 같은 업무들과 씨름하다 보니 거의 대부분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여행 전날 밤을 맞이하고 말았다. 환전을 까먹지 않고 해 둔 것이 용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결전의 날은 밝는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