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는 항상 옳은가

리퍼블릭이 필요한 이유

by 변재욱

민주주의의 핵심 절차를 하나만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은 다수결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운영에서 핵심적인 기술이다.

이견이 존재하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에서, 모든 사람이 완전히 동의할 때까지 결정을 미룰 수는 없다.

다수결은 바로 그 지점에서 결정을 가능하게 하고, 권력의 교체를 폭력이 아니라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게 한다.


이 점에서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성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


다수결은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절차이지,

그 결정이 언제나 공적인 정당성을 가진다는 사실까지 보장하는 원리는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와 리퍼블릭의 간격이 드러난다.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에서 민주정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라는 위험을 경고했다.


다수는 정당성의 원천일 수 있다.

그러나 다수가 자신을 곧바로 공공선과 동일시하고, 진리와 도덕, 공익의 최종 기준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 순간 다수결은 단순한 결정 규칙을 넘어, 반대와 이견을 압박하는 권위로 변한다.


문제는 다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다수가 자기 자신을 곧바로 전체와 동일시하는 데 있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핵심 절차다.

그러나 그 자체로 리퍼블릭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수결은 결정을 위한 기술이다

정치는 언제나 갈등을 전제한다.


서로 다른 가치와 우선순위, 이해관계와 전망이 충돌하는 곳에서 정치는 움직인다.

그 갈등을 없애는 것이 정치가 아니라, 갈등 속에서도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정치다.


다수결은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이다.

누가 더 많은 동의를 얻었는가를 기준으로 결정을 내리고,

정치적 교착을 제도 안에서 처리하며,

정권교체를 내전이나 쿠데타가 아니라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게 한다.


이 점에서 다수결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다수결 없이 작동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수결이 필요하다는 것과, 다수결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다수결은 누가 승리했는지를 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승자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정하지는 못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핵심 절차이지만,

리퍼블릭의 완성 원리일 수는 없다.


다수결은 권력의 한계를 만들지 못한다

다수결은 통치권의 출발점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권력이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가를 자동으로 정해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핵심이다.


다수의 선택은 권력을 시작하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권력의 자기 제한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수결은 승패를 가를 수 있다.

그러나 승자의 권한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무엇을 넘어서면 안 되는지,

그 경계를 누가 어떻게 통제하는지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다수결이 정당성 전체와 동일시되는 순간

권력은 쉽게 자신을 무제한화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다수가 원했다.

국민이 선택했다.

표로 확인되었다.

이 말은 통치의 출발을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권력을 제한 없이 행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리퍼블릭은 바로 이 지점에서

다수결 위에 추가적인 구조를 요구한다.


그것이 separation of powers, 즉 권력분립이다.

권력을 하나의 기관이나 하나의 정당한 승리에 모두 맡겨두지 않고,

입법·행정·사법으로 나누어 권력 집중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것.


이것은 효율을 떨어뜨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다수의 이름으로 집중되는 권력이 반공화적으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다.


리퍼블릭은 올바른 사람을 찾는 체제가 아니라,

권력이 한 곳에 모이지 않도록 구조를 미리 설계하는 체제다.

다수결은 책임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다수결의 두 번째 한계는 책임의 문제에서 드러난다.


선거에서 승리한 권력은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당성이 곧바로 실패의 면제까지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그 반대가 자주 일어난다.

우리는 선택받았다.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따라서 우리의 정책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 논리는 정책 집행의 동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의 책임을 묻는 구조를 흐리게 만들기 쉽다.


다수결은 승자와 패자를 가를 수 있다.

그러나 실패의 비용이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그 실패가 어떻게 기록되고 교정되는가,

그 권한이 실제로 어떻게 통제되고 회수되는가까지는

자동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리퍼블릭은 checks and balances, 즉 상호견제의 원리를 요구한다.

권력분립이 구조라면,

체크 앤 밸런스는 그 구조를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역학이다.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고,

사법부가 위헌성을 심사하며,

행정부가 다시 정치적 책임 아래 놓이는 것.

이 상호견제의 장치가 있어야만

다수의 이름으로 형성된 권력이 스스로를 절대화하지 못한다.


리퍼블릭은 다수결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다수결만으로는 책임의 구조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을 안다.

그래서 리퍼블릭은

승리를 정당화하는 절차보다,

실패를 추적하고 교정하는 구조를 더 중시한다.


다수결은 헌법 위에 설 수 없다

다수결의 세 번째 한계는

입헌주의의 문제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수가 선택했다고 해서

그 선택이 언제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

다수가 원한다고 해서

그 요구가 언제나 헌법적 한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래서 constitutionalism, 즉 입헌주의가 필요하다.

입헌주의는 다수의 선택을 부정하는 원리가 아니다.

오히려 다수의 선택조차 선행하는 헌법적 경계 안에서만 정당할 수 있다고 보는 원리다.


이 말은 곧,

다수도 헌법 위에 설 수 없다는 뜻이다.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법적 절차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서

권한 배분의 원리를 무시할 수는 없다.

국민의 이름을 내세운다고 해서

통치의 모든 결과가 자동으로 공공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리퍼블릭은 다수결을 인정하지만,

다수결이 헌법적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붙들어둔다.

왜냐하면 숫자의 우세와 공적 정당성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수는 통치자를 선출할 수 있다.

그러나 통치의 모든 내용을 무제한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토크빌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수의 전제는 총칼만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다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도덕적 확신,

공익을 독점했다고 믿는 집단적 자기의식,

반대를 쉽게 비정상이나 반공공성으로 몰아가는 압박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리퍼블릭은 바로 이 위험을 경계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제 정리할 수 있다.

다수결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다수결 없이는 작동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수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결정을 가능하게 할 수는 있어도,

권력의 한계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것은 승자를 정할 수는 있어도,

실패의 책임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정치적 정당성의 출발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정당성이 어떤 조건 아래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가까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바로 이 때문에

리퍼블릭은 다수결 위에 추가적인 원리를 요구한다.


권력분립

상호견제

입헌주의


이 장치들은 다수결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수결이 자기 파괴적 권력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붙들어두는 공화적 장치들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대한민국 헌법이 국가를 단지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했는지를 다시 보게 된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기원을 설명한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리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리퍼블릭은

그 권력이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제한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헌법과 제도 속에서 제한되고 책임져야 한다.

바로 그래서 헌법은 대한민국을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한다.


이 점은 미국 건국기의 상징적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미국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새 체제를 democracy가 아니라 republic이라고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리퍼블릭은 인민의 지배를 뜻할 뿐 아니라, 그 지배가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헌법과 제도로 묶어두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리퍼블릭은 한 번 세우는 것으로 끝나는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수의 선택 위에 권력분립, 견제와 균형, 입헌주의를 함께 세워야만 유지될 수 있는 질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단계의 질문이 시작된다.


다수의 이름으로 형성된 권력이

어떻게 자신을 도덕과 공익의 대표자로 상상하게 되는가.

어떻게 절차를 압도하고 책임을 흐리며,

특정한 감정과 서사를 공적 질서 위에 올려놓게 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제 민주주의 일반이나 다수결의 절차를 넘어,

권력이 어떻게 도덕의 언어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 연재의 핵심 주제인

도덕정당성 기반 대중정치 체제(Moral Political Regime),

‘도덕정치 체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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