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블릭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by 변재욱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민주주의는 권력의 정당한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


선거가 있고, 대표가 선출되며, 정권이 교체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근대 정치가 이룬 중요한 성취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권력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권력이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가까지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바로 여기서

리퍼블릭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리퍼블릭은 단지 국가 형태의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통치하느냐보다

권력이 어떤 한계 안에서 행사되고,

그 실패의 비용이 어떻게 책임으로 연결되는가를 묻는

질서의 원리다.


그래서 리퍼블릭은

이상적인 통치자의 덕목보다

권력을 다루는 구조와 절차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우리는 종종 공화국이라는 말을

국가 이름의 일부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리퍼블릭은

단지 국호 뒤에 따라붙는 수사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통치의 정당한 출발을 말한다면,

리퍼블릭은

그 출발 이후의 질서를 말한다.


권력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누가 어떤 방식으로 통제하는가.

실패했을 때 그 책임은 어떻게 귀속되는가.


리퍼블릭은 바로 이 질문들을 중심에 둔다.


그러므로 리퍼블릭은

좋은 정치에 대한 막연한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믿기보다

권력이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미리 경계선을 그어두는 질서의 원리다.


1. 리퍼블릭이 요구하는 첫째 조건 — 권력의 제한


리퍼블릭이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권력의 제한이다.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권력의 정당한 출발점을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한 없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 정당성은

권력을 시작하게 할 수는 있어도

그 권력을 무한정 확장하게 만드는 면허가 될 수는 없다.


리퍼블릭은

권력의 크기보다 먼저

그 권력의 한계를 묻는다.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무엇을 넘어서면 안 되는가.

누가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권력은 정당성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를 무한 확장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권력을 선한 손에 맡기면 괜찮다는 낙관이 아니라,

권력은 본래 자신을 확대하려 한다는 경계심 위에서

질서를 설계하려는 것이다.


리퍼블릭에서 중요한 것은

권력이 누구 손에 있느냐보다

그 권력이

어디서 멈추는가

어떻게 제한이 되는가


2. 리퍼블릭이 요구하는 둘째 조건 — 책임의 귀속


권력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다음에 필요한 것은

책임의 귀속이다.


리퍼블릭은

권력을 부여하는 체제이기 이전에

권한과 결과를 연결하는 체제다.


결정권을 가진 자는

그 결정의 결과를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면

그 권한은 교정되고, 필요하다면 회수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책임은

도덕적 유감 표명이 아니다.


책임성(accountability)은

권한과 결과가 구조적으로 묶여 있는 상태를 뜻한다.


누가 결정했는가.

그 결정의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가.

실패는 어떻게 기록되고 교정되는가.


권한은 집중되는데

책임은 분산된다면,

그 체제는 민주적 외형을 가질 수는 있어도

리퍼블릭의 조건을 충족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리퍼블릭은

실패의 책임이 제도 안에서 추적될 수 있는 구조라야 한다.


3. 리퍼블릭이 요구하는 셋째 조건 — 절차의 우위


리퍼블릭이 요구하는 세 번째 조건은

절차의 우위다.


정치에는 늘 명분이 있다.

좋은 목적도 있고,

정의로운 의도도 있으며,

때로는 다수의 강한 지지도 있다.


그러나 리퍼블릭은

그 모든 것보다 먼저

절차를 묻는다.


어떤 목적이 아무리 선하더라도

절차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

이것이 리퍼블릭의 기본 감각이다.


왜냐하면 절차는

사람의 선의를 대신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믿는다고 해서

그가 절차를 건너뛸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명분도,

정치적 정당성도,

도덕적 우월감도

절차 위에 설 수는 없다.


절차가 사람보다 뒤로 밀리는 순간

국가는 개인의 확신과 집단의 감정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리퍼블릭은

선한 통치를 기대하는 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이 스스로를 선하다고 주장할수록

더 강한 절차와 더 엄격한 제한을 요구하는 체제다.


4. 리퍼블릭이 요구하는 넷째 조건 — 공적 질서의 비인칭성


리퍼블릭은

국가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감정으로 운영되지 않기를 요구한다.


공적 질서란

사람보다 규칙이 앞서고,

충성보다 제도가 앞서며,

서사보다 절차가 앞서는 상태를 뜻한다.


이것이 바로

공적 질서의 비인칭성이다.


국가는 누군가의 선의만으로 운영될 수 없다.

어떤 집단의 역사적 정당성만으로도 운영될 수 없다.

특정 진영의 도덕 감정만으로도 유지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국가는

공동의 질서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자기 정당화의 장으로 변질되기 쉽다.


리퍼블릭은

권력을 비인칭적 규칙 속에 두려 한다.


사람이 아니라 제도,

의리나 충성보다 공적 책임,

정서적 일체감보다 검증 가능한 절차를 우선시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퍼블릭은

사람을 신뢰하라는 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보다는 제도와 공적 규칙을 우선시하는 체제다.


5. 리퍼블릭은 미덕이 아니라 구조다


이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리퍼블릭은

좋은 사람을 요구하는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제한하고,

책임을 귀속시키며,

절차를 우위에 두고,

공적 질서를 비인칭적으로 유지하려는

구조적 요구의 체계다.


그래서 리퍼블릭은

도덕적 수사가 아니다.

공공선을 찬양하는 추상적 이상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경계와 책임과 절차를 제도 안에 묶어두려는

정치 질서이자 원리다.


민주주의가

권력의 정당한 출발을 설명한다면,

리퍼블릭은

그 권력이 어떤 조건 아래서만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는가를 규정한다.


즉, 리퍼블릭은

좋은 정치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권력을 제한하고

책임을 귀속시키며

절차를 우위에 두도록 요구하는 질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다.


과연 "다수의 선택"만으로

이 모든 요구가 충족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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