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다. 비에 취해 게으른 행복을 맘껏 누려본다. 하지만 곧 찾아올 눅눅함과 퀴퀴함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공략할지 모른다. 잿빛 곰팡이 같은 우중충함이 집안을 점령하고, 이불과 옷가지는 끈적함을 못 견뎌 슬픔을 토해내리라. 햇빛이 차단된 세상은 내게도 우울 주의보를 내릴 것이다.
잦아드는가 했던 빗방울이 *작달비로 변했다. 옆에 있던 남편이 비 노래를 들으며 추억에 젖어있는 나를 현실로 데려왔다. 갑자기 출출하다는 그. 따뜻하고 칼칼한 국물에 쫄깃하고 탱탱한 면발이 먹고 싶단다. 라면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미심장한 눈빛은
‘어제 장 볼 때 칼국수면 사 오지 않았나’라고 묻고 있었다.
“칼국수?”
“응, 이왕이면 장칼국수”
평소엔 자주 엇박자를 내는 마음이 이럴 땐 잘 통했다.
비 오는 날이면 몸에서 반응이 온다. 전이나 면 종류 같은 밀가루 음식이 먹고 싶다. 마치 우울하고 피곤할 땐 초콜릿같은 단 음식이, 스트레스받을 때 매운 음식이 떠 오르는 것과 같다. 비가 오면 기압은 낮아지고 습도는 높아진다. 그럴 때, 우리 몸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열량이 높은 탄수화물을 찾게 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확인한 바 없으나 많은 사람들이 비 오는 날 뜨거운 국물 면 요리를 찾거나, 전(煎) 집에 손님이 많은 걸 보면 전혀 근거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누구나 마음에 위안이 되는 음식 한 두 가지는 있기 마련이다. 어머니의 손맛이 그립거나 누군가와 함께 했던 기억으로 가슴 한편이 아릿해지는 날. 문득 떠오르는 음식 하나로 추억을 달래거나 일상의 고단함을 잊는다. 내게는 칼국수가 그렇다. 칼국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지금은 시중에 파는 생면을 사다 쓰면 집에서도 간단히 끓일 수 있다. 어릴 적엔 밀가루 반죽을 밀어 면을 직접 만들었다.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이 밭일을 쉬는 날. 어머니는 마루에 신문지를 깔고 밀가루 반죽을 하셨다. 찰지게 반죽한 덩어리를 주먹만큼씩 떼어 큰 판 위에 놓고 하얀 밀가루를 솔솔 뿌려 홍두깨로 밀었다. 얇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한 반죽은 이내 어머니의 손끝에서 또각또각 일정한 굵기로 썰려 긴 국수가닥이 되었다.
멸치와 다시마를 진하게 우려낸 국물에 면과 텃밭에서 따온 호박, 감자를 채 썰어 익혔다. 슴슴하게 끓여낸 칼국수에 파를 잔뜩 넣은 양념장 한술 곁들이면 부러울 게 없었다. 칼국수를 먹는 날은 마루에 둥근 상을 폈다. 고양이와 강아지도 한입 거들겠다고 보챘다.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물에 작은 웅덩이가 파여 빗방울이 통통 튕기며 맑은 소리를 냈다. 칼국수 한 그릇에 그날의 풍경까지 덤으로 온다.
남편이 끓여 달라던 장칼국수는 고추장과 된장으로 간을 한, 칼칼한 국물맛을 자랑하는 강원도 영동지방의 음식이다. 언젠가 식당에서 먹고 오더니 그 맛을 못 잊어해서 가끔 만들어 먹었다. 장칼국수를 끓이는 김에 부침개에 막걸리까지 한 상 제대로 차려 냈다.
오늘 전은 텃밭에서 자란 부추와 방아잎을 넣은 부추장떡이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고수가 있다면 경상도에는 방아잎이 있다. 방아잎은 독특한 향이 강해 호불호가 갈리지만 경상도 지방의 요리에선 두루 쓰인다. 나 역시 된장찌개, 부추전, 추어탕에 방아잎을 넣어야 음식이 완성되는 것 같다. 장떡은 일반 부침개보다 두툼하게 굽거나 찌듯이 해서 밥반찬으로 먹는다. 고추장과 된장으로 간을 하기 때문에 쫀득쫀득 한 식감이다. 바삭한 전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입에 맞지 않을 수 있다. 방아잎과 청양고추를 듬뿍 썰어 넣고 홍합도 다져 넣었다. 전 부치는 일은 기미상궁노릇도 겸하는 조수에게 맡겼다. 프라이팬을 들어 뒤집는 기술이 꽤 볼만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식탁 앞에 마주 앉는 시간. 손으로 직접 반죽한 면과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그런대로 쫄깃하고 부들부들한 면발의 목 넘김이 좋았다. 칼칼하고 구수한 국물 한 모금에 요리의 수고로움이 녹아들었다. 청량초의 알싸함과 방아잎의 향긋함이 어우러진 부추장떡. 짭조름하니 감칠맛이 있어 막걸리와 잘 어울렸다. 칼국수와 장떡으로 맛있는 한 끼를 먹고 나니 장마를 잘 견뎌낼 것 같았다. 소박한 음식으로 건강하게 일상을 꾸릴 수 있는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며 오늘도 하루가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