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또각 타닥타닥. 안방까지 들려오는 칼과 도마 부딪히는 소리가 자못 경쾌했다. 내 귀에는 여느 오케스트라의 멋진 협연이나 감미로운 선율 못지않다. 소리만으로도 흐뭇해 입꼬리가 절로 귀에 가 닿았다. 주방에서 연신 바쁘게 칼질하는 주인공은 명절을 함께 보내려고 온 아들이다.
삼 일 전, 피곤에 찌든 나는 음식 하기에 꾀가 나 모처럼 아들이 해주는 음식이 먹고 싶다고 툭 던졌다. 그는 내 말을 듣고 내 생일과 다가올 남편의 생일까지 겸해 추석 저녁 식사를 혼자 준비하겠다고 했다. 주방에서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은 영혼까지 갈아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구슬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다.
아들은 요리에 진심이다. 자주는 못 하지만 마음먹고 하면 그럴싸하게 한 상을 차려 냈다. 몇 년 전 사회복무요원으로 2년간 집에서 함께 지낼 때는 종종 별식을 만들어 주곤 했다. 내 생일엔 스테이크와 파스타, 감바스로 근사한 레스토랑 못지않게, 국물요리를 좋아하는 아빠 생일에는 삼척 물 닭갈비나 감자탕을 만들어 주었다. 따로 사는 요즘은 통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아마 몇 년 만인 듯하다.
22살 아들이 차려 준 생일 상
문득 아들이 처음 제 손으로 음식을 한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학교에서 계란요리를 배웠다며 일요일 아침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뭘 하려는지 궁금하고 살짝 불안하기도 했지만 모르는 척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됐다는 부름에 나가보니 계란말이, 계란찜, 계란국, 계란 프라이로 한 상 가득. 식탁에서 삐약삐약, 꼬꼬댁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간이나 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국은 간이 맞춤했고, 계란찜은 잘 익었으며, 서툴지만 계란말이도 제법 모양이 잡혀 있었다. 어린 아들이 만들어 준 첫 음식이니 무엇인들 맛있지 않겠냐만 실제로 대견함을 넘어선 맛이었다.
셰프가 되려나 했던 생각도 잠시. 그 후 아들은 음식 만들기는커녕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줄곧 ‘오늘 저녁 반찬 뭐예요?’, ‘이번 주말에 뭐 먹을 거예요?’라는 말을 중. 고등학교 내내 달고 살았다. 그러다 고 2 겨울이었던가.아들이 느닷없이 저녁 식사로 파채 라면을 끓여 주겠다고 했다. 양파와 당근을 채 썰어 볶고 대파를 길게 채 썰어 찬물에 담가 매운맛을 뺀 다음 고명으로 올리는 라면이었다.
라면이 어떤 음식인가. 빠르고 간편하게 먹는 음식의 대명사가 아닌가. 칼질에 서툰 아들은 재료를 써는 데만 무한대의 시간을 보냈다. 파의 매운맛을 경험하지 못했던 그는 요리의 세계에 입문하는 대가로 눈물의 참 교육을 받아야 했다. ‘오늘 안으로 먹을 수 있기는 하냐’는 놀림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완성한 파채라면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비록 파채 고명은 엉성했지만 면발은 쫄깃 탱탱했고 야채를 많이 넣어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맛도 제법이었다.
왼쪽부터 감자탕, 칠리새위 물닭갈비, 파채라면
아들의 나이 스물여덟. 아직 공부 중이라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다. 먹성도 좋은 데다 은근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녀석이 집에 올 때면 먹는 음식은 거의 정해져 있다. 빠듯한 생활비로 혼자 있으면서 먹기 힘든 소고기와 회를 찾는다. 길어야 삼일 머무는 아들을 위해 하루는 고기를 구워주고, 하루는 단골 횟집에서 회를 주문해 집에서 먹는다. 한 끼라도 엄마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이고 싶어 아들이 오기 며칠 전부터 김치도 담그고 밑반찬도 준비했다. 물론 명절엔 특별식까지, 이번엔 사정이 좀 달랐다.
다음 날. 퇴근 시간에 맞춰 학교로 데리러 온 남편, 아들과 함께 간단하게 장을 보러 갔다. 이번 추석은 명절 전날 시동생, 시누이네 가족과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들도 다이어트 중이라 음식을 가져가지 않는다고 해서 명절 음식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마트 안을 둘러보다 아들에게 슬쩍 물었다.
“아들, 엄마 생일 선물 대신 추석에 맛있는 음식 하나 해주면 안 될까?”
흔쾌히 대답한 아들은 머릿속으로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집에 맛있는 연태고량주 한 병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아들은 양식으로 준비하려던 계획을 바꿔 ‘그럼 중식으로 해야겠네요.’ 하더니 새우, 오징어, 소고기, 돼지고기, 파프리카 같은 재료를 이것저것 알아서 샀다.
추석 당일 네 시, 아들이 주방으로 나왔다. 필요한 식재료와 양념을 준비해 주고 푹 쉬고 있어라는 바람에 방으로 들어왔다. 칼질하는 소리, 그릇 부딪는 소리, 재료 씻는 소리를 들으면서 방에만 있자니 마음이 쓰였다. 주방으로 나가니 아들은 이미 재료 손질을 거의 마친 상태였다. 각종 야채를 채 썰고, 오징어를 손질해서 칼집 넣어 데쳐내고. 새우도 손질하고 전복은 깨끗이 씻어 두었다. 온갖 재료가 놓인 싱크대 위는 전쟁통을 방불케 했다. 어차피 설거지는 내 몫이니 사용한 그릇이며 조리도구를 씻어 두고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여름 못지않게 더운 날씨였다. 덩치 큰 아들은 연신 땀을 훔치면서도 정확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고기와 야채를 볶아 겨자소스를 곁들인 아들표 양장피 사촌(피가 없음.ㅎㅎ)이 완성됐다. 매콤한 고추잡채도 뚝딱, 전분가루 입혀 두 번 튀겨낸 새우에 새콤달콤한 소스 버무린 칠리 새우는 명품이었다. 고소한 전복 버터구이, 게다가 아빠가 좋아하는 오징어와 새우에 야채 듬뿍 넣어 매콤 칼칼하고 시원한 짬뽕까지 끓여 냈다. 중국식 코스 요리 못지않았다. 그전까지의 아들 음식은 맛은 있지만 젊은이들 입맛이라 다소 간이 센 편이었다. 이번엔 우리를 위해 자극적이지 않고 부담 없는 맛이었다.
결혼 후.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게 된 후에도 식구들이 먹을 전과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왔다. 처음으로 음식 장만을 하지 않은 추석이지만 아들 덕분에 최고의 추석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장난처럼 건네본 말이었는데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한꺼번에 여러 가지 요리를 준비한 아들을 보니 미안하고 대견했다. 맛있게 드시니 되려 고맙다는 아들. 취직해서 돈 벌면 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이보다 더 값진 음식이 있을까. 돈으로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마음을 담은 음식 선물을 받고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