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scecret 어린 왕자 12

같은 곳을 맴도는 것 같아도,

by 여등

K


어린 왕자가 세 번째로 들른 별에는
술주정뱅이가 살고 있었대.

그는 부끄러움을 잊으려 술을 마셨지만,
그럴수록 부끄러움은 더 깊이 몸에 스며들었어.

부끄러움을 잊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가라앉았지.


아저씨는 그냥 덤덤하게 말했어.
"그 사람은 아마 지금도 술을 마시고 있을 거야.
여전히 부끄러울 테니까."


나는 답답해서 말했어.
"그럼 이렇게 전해 줘.
다시 부끄러워지면, 술을 마시는 대신
이미 마신 술병을 세라고.
숫자를 셀 땐 부끄럽지 않으니까."


사실, 숫자 세기도 나의 코끼리 한 걸음이거든.

아저씨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물었어.
"너도 부끄러운 적이 있었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어.
그저, 밤마다 헤아렸던 숫자들이 떠올랐을 뿐이야.


아저씨는 이해했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어.

"숫자를 세면서 잠을 청하던 밤들, 그건 얼마나 길고 외로웠니?"

그 말이 너무 따뜻해서,
가슴이 살짝 아려왔어.



K,


기억나지?
세 그루의 바오바브나무.

바오바브나무 싹을 뽑지 않으면
그 뿌리가 별을 집어삼켜 버린다고 했잖아.

그래서 어린 왕자는
날마다 바오바브 싹을 뽑았어.

그건 어린 왕자의 코끼리 한 걸음이었어.


부끄럽거나,
슬프거나,
무기력할 때,

꼭 기억해 줘.

보아뱀의 속에서 빠져나왔다면,
다시 보아뱀의 입으로 들어가서는 안 돼.


만약, 혼자서 빠져나올 수 없다면,
꼭 소리 내어 말해야 해.


"도와줘!"


초원을 향해 걷는 코끼리들이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길을 잃었다고 느껴도,
같은 곳을 맴도는 것 같아도,
결국 우리는 걸어가고 있는 거야.

때로는 발이 빠지고,
때로는 모래바람이 앞을 가려도,

우리는 이미 걷고 있어.





keyword
작가의 이전글secret 어린 왕자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