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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테나 Sep 20. 2017

풍성한 아름다움! 조금은 아쉬운... 뮤지컬 <벤허>

충무아트홀/ 2017. 8.24 ~ 10.29

내 기억 속에 <벤허>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 찰턴 헤스턴 주연의 고전 기독교 영화였다. 고입 시험이 끝나고 한껏 여유로워진 중3 겨울방학 언저리쯤, 학교에서 단체 관람했던 영화였던 것 같다. 지금은 복합극장으로 변신한 대한극장이 국내 유일의 70mm 대형 스크린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 거대한 스크린에 어울리는 고전 명작 영화들은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는 마술을 보여주었다. 불편하고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3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며, 난 치열한 전차 경주에 가슴 졸이고, 너무나 가혹한 벤허의 운명에 눈물 흘렸다.


특히, 노예로 팔려간 운명도 힘겨운데, 여동생과 어머니가 지하 감옥에 갇혀, 문둥병까지 걸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날 정도로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바위 감옥의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자,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서는 어머니와 여동생. 병 걸린 모습을 최대한 감추며 온 몸을 칭칭 감싼 채 간신히 나서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는 순간, 삐져나오는 울음소리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엉엉 울었던 것 같다. 기독교적 색채가 너무 강해서 조금은 낯설었지만, 운명에 갈등하는 찰턴 헤스턴의 고뇌하는 모습은 한 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였다.



그 추억의 <벤허>를 다시 뮤지컬로 만나다니... 거기다, 벤허 역의 박은태는 이미 <모차르트>라는 뮤지컬에서 그 실력을 이미 충분히 봤었기에 더욱 기대가 됐다. 벤허 역할은 트리플 캐스팅으로, 배우 유준상과 카이도 함께한다. 개인적으로는 카이 목소리를 좋아해서, 카이가 연기하는 벤허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이 뮤지컬의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한 왕용범 연출가는 "유준상은 성숙하고 힘이 있는 벤허를, 박은태는 섬세하고 인간적인 벤허를, 카이는 저돌적이고 젊은 벤허를 표현한다"며 세명의 배우가 표현하는 벤허의 다양한 모습을 설명한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내가 본, 박은태의 벤허는 무척 유약하고 착하기만 한 귀족 가문의 청년, 벤허가 운명에 휩쓸리면서, 조금씩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박은태라는 배우가 가진 고음의 목소리 톤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박은태는 여린 청년의 목소리로 벤허의 심리를 노래에 담아 가슴 깊이 정서를 전달하며 극의 타이틀롤로서 극의 구심점을 이룬다. 다만, 연기에 있어서는 초반 집중력이 약한 느낌이 들어 조금 아쉽다.

배우 박은태
배우 유준상                            배우 카이

내가 이번 뮤지컬 <벤허>에서 발견한 새로운 보석 같은 배우는 에스더 역에 안시하였다. 고음의 노래를 어찌나 깔끔하게 쭉쭉 뽑아내던지, 그 안정적인 고음 발성과 목소리에 담긴 정서가 여주인공의 매력을 매우 믿음직스럽게 보여주었다. 극 중 역할에 있어서는 벤허와의 멜로 라인이 크게 강조되지 않아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노래실력만큼은 매우 인상적으로, 충분한 정서적 울림을 전달해주었다. 거기에 벤허의 어머니 역할의 배우 서지영은 아름다운 미모만큼이나 풍성한 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듣기가 너무 좋았다. 또한, 벤허의 막강한 적수, 메셀라 역할의 민우혁 배우는 적당한 볼륨 있는 목소리로 강렬한 성격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도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연기가 매우 안정적이고, 몰입도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영화나 드라마 쪽 활동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벤허를 수양아들로 삼는 퀸터스 역할의 이희정 배우도 당당한 모습만큼이나 당당한 목소리가 의외의 실력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팬텀 2에 출연하고 있는, 빌라도 역할의 배우 이정수는 풍채에서 나오는 힘과 거침과 굵음이 적절히 조화된 노래가 극의 밸런스를 맞춰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또, 시모니테스 역할의 김성기 배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저음이 정말 매력적이라 한 곡만 제대로 듣는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에스더  안시하
메셀라  민우혁

한 마디로 뮤지컬 배우들 모두가 실력에 있어서는 한 치에 구멍도 없는 탁월한 능력자들의 조합인 데다가, 음색도 다양하고, 톤도 다양해서 뮤지컬 전체의 소리 짜임에 있어서도 매우 완성도 높은 컬래버레이션의 매력이 살아있는 뮤지컬이었다. 다만, 음악에 있어서는 그 강렬함과 정서적 색채가 조금은 약한 느낌이 었어서 아쉬웠다. 배우들의 가창력과 안정적인 정서 전달력에 비해, 음악의 정서적 색채가 조금은 농도가 흐려서, 슬픔과 고뇌, 두려움과, 의지, 또는 기쁨과 아쉬움 등을 드러내기엔 조금씩 약하게 느껴진다. 뮤지컬이 끝나고 난 뒤에 귀에 맴도는 인상적인 음악 하나 남지 않았다는 점이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뮤지컬 <벤허>의 핵심 백미는 무대 연출력이었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무대 장치들과 영상 홀로그램과 이중 삼중의 막과 무대 장치가 만들어 내는 상상의 공간에 대한 형상화가 정말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모습이, 매우 탁월했다.


특히나 인상적인 장면은 벤허가 노예로 끌려간 배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과 벤허와 마셀라의 마지막 전차 경주 장면이었다. 많은 기사에도 알려진 바와 같이 왕용범 연출자는 전차 경주 무대를 위해 뮤지컬 제작비의 대부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보이는 것이 전차 격투 장면인 데다, 마셀라와의 마지막 결투이기 때문에 제대멋지게 표현해야만 하는 중요한 장면일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전차 씬이 치열하고 위험한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었다면, 뮤지컬 속 전차 경주 장면은, 아름답고, 환상적이며, 심리적인 장면으로 연출된다. 어두운 무대 위, 붉은 조명 사이로, 검은 말과 흰 말의 말발굽이 섬세하게 움직여 달려가고, 8마리 말들이 경주하는 콜로세움 세트 위로 대결하는 벤허와 마셀라의 결투가 상상력을 자극하며 펼쳐진다. 아름답고 놀라운 연출력이다.


또 벤허가 노예로 팔려간 배는, 무대 장치로 배 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홀로그램으로 중간 장막에 배 전경을 투사시켜, 복합적 이미지를 표현한다. 이로 인해 중간 장막이 흔들릴 때마다 거대한 바다 위, 출렁이는 배의 역동감이 살아나고, 함선의 위기 상황이 실감 나게 전달되는 효과가 생긴다. 고정된 무대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뛰어난 연출력이다. 그 시각적 충만함이 어찌나 좋은지, 그것만으로도 이 뮤지컬을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출적인 면에서 훌륭함과는 별개로 내러티브적 측면에선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일부 기사에는 내러티브의 완성도가 있다고 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단 주제적인 측면에서 가장 아쉽다. 연출가는 용서와 구원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했다지만, 용서에 대한 모티브는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끌고 올라가는 예수의 입을 통해 비밀스럽게 전해지고, 그 한 장면만으로 벤허가 용서에 대해 받아들인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 자막 내레이션에선 벤허가 오히려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이것은 분명 주제로 잡은 용서의 의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결론이 된다.


 또, 마지막, 어머니와 여동생이 문둥병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는 설정 후, 병이 다 나은 모습으로 돌아와 벤허와 상봉하는 장면도, 핵심 장면인 예수님이 은총을 내려 병자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장면이 빠짐으로 해서 애매한 처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차라리,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장면을 그릴 때, 핍박받는 장면이 주된 내용이 아니라,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장면을 주된 장면으로 그리고, 원형 무대 장치를 이용해, 시차를 두고 벤허를 만나,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을 배치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뮤지컬 <벤허>는, 영화 <벤허>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색채를 많이 빼면서, 보다 대중적인 포용성을 가지고자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완성도 높은 뮤지컬이 되기 위해선 기독교적 색채가 빠진 만큼,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벤허라는 인물 중심의 다른 주제를 부각시켰어야 했다. 뮤지컬의 장면 구성에서 기독교적 색채를 절제한다는 것은 용서와 구원의 주제 의식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시대적 운명과 벤허라는 인간 의지의 대결을 주제로 가져가면서 고뇌하는 벤허의 모습을 강하게 부각시켰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영화 <벤허>가 주는 명작의 가치에 못지않은 창작 뮤지컬의 명작이 되지 않았을까? 관객들은 시청각적 아름다움에 만족하는 아름다운 뮤지컬로서 <벤허>가 아니라, 인생에 질문과 답을 떠올리게 하는, 훌륭한 고전 명작으로서 뮤지컬 <벤허>를 기억하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뮤지컬 <벤허>는 아름답다. 배우들이 전해주는 열정이 아름답고, 음악에 실려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름답고, 그들이 합심해서 펼쳐낸 어울림이 아름답다.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환상적인 무대장치가 아름답고, 그것을 이뤄낸 연출과 스텝들의 고통을 뛰어넘는 노력이 아름답다. 그렇기에 주제적 측면의 아쉬움은 더 할 수밖에 없다. 좋은 뮤지컬은 오래도록 반복해서 공연되며 명작으로 길이 남는다. 만약 다음번 <벤허> 공연이 기획된다면, 그땐, 보다 완성된 주제의식과 내러티브를 갖춘 창작 뮤지컬 <벤허>가 되어, 아름다운 명작으로 남게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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