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 갑상선암과 함께하며 느끼는 것들
"갑상선암은 암도 아니잖아", "잘 쉬면 없어지는 거 아냐?", "과잉진료라고 수술하지 말라던데".
병명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되면 되레 눈치가 보인다. 반응들이 대체로 공통적인데 그걸 받아들일 여유가 이제 많이 남지 않아서다. '별 것도 아닌' 암이라는 존재로 수술을 세 번 받았고, 그로 인해 나의 삶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지만 그건 오로지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친구는 물론 가족도 누구도 알 수 없는 싸움을 나 자신만 하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위로들에 발끈해 봤자다. 꼭 누군가에게 불쌍한 환자로, 위로받아야 할 아픔으로 마주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실제로도 나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절박한 아픔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도 맞으니 나도 거의 공통적으로 웃으며 넘기지만, 그래도 자주 '위로'가 아프다.
갑상선암 유두암 미만성 경화성 변종.
나의 암들은 덩어리가 아닌 가루 같은 존재라고 했다. 보통 초음파를 통해 혹이나 암이 몇 센티미터인지 대강 알 수 있는데 나는 처음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라 병원에서 당장 수술을 해야만 한다고 서둘렀다. 나중에 받아 본 첫 번째 진료 소견에는 갑상선암 중 가장 나쁜 종류인 '미분화암 가능성!!!!!!!!' 이라고 적혀 있었고, 수술을 해보니 가루 같은 존재가 갑상선 전체에 흩뿌려진 것도 모자라 임파선 곳곳을 침범했다. 대략 4.5센티미터로 크기가 잡힌 암이 있던 갑상선을 모두 절제했고 임파선도 수십 개 '청소'했다. 그 뒤로 두 번의 수술을 더 하며 가루들을 털어냈다. 갑상선암 환자들에게 항암 치료와 비슷한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나의 병은 눈에 띄는 고통이 없다. 몇 년, 또는 몇 개월 안에 내 삶이 끝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피할 수도 있어 고맙다. 병원은 6개월에서 1년마다 한 번씩 가면 됐고, 딱히 예방할 방법도 치료라고 꾸준히 뭘 할 것도 없다. 스트레스 덜 받고 건강히 사는 것.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기 위한 방법을 나 또한 지키면 되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를 '암 환자'라고 부르기에도 아주 민망할 정도로 나에게는 별 고통 없이 많은 일상생활이 허락돼 있고, 주어진 시간도 많다. "그건 암도 아니잖아"라는 수많은 위로들은 대체로 사실에 가깝다. 게다가 두 번의 수술은 20대에 했으니 몸의 변화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수술하고 한 달을 쉬는 것도 엄청나게 눈치를 보며 푹 쉬었다 생각하고 출근했다.
그런데 세 번째 수술을 한 뒤, 그리고 다시 네 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 고마움들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 이 병의 무서움과 가혹함을 알게 된 이유에서다. 물리적인 고통이 아닌 온전히 나 자신과의 싸움, 끊임없는 고민과 성찰, 절제. 급기야 대체 어떻게 살아야 맞는가를 도무지 알 수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버렸다.
나는 늘 무언가를 바쁘게 하는 게 익숙한 삶을 살았다. 학교에 들어간 뒤로 숙제며 공부며 아주 잘 하는 건 아니어도 열심히는 했다. 일기를 하루라도 빼먹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고 방학이 끝나기 전 며칠은 밤을 새서 한 달치 밀린 일기를 울면서 쓰기도 했다. 알림장에 적은 숙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해야하는 것이었고 아주 뛰어난 성적은 아니었지만 몇 주간의 벼락치기로 시험 준비를 했던 긴장감은 서른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 꿈으로도 재현된다. --내가 꾸는 몇 가지 악몽 중 하나가 당장 시험이 코 앞인데 (특히 수학...) 책 한 권짜리 시험 범위를 지금 알았다거나 전혀 공부를 하지 못한 채 시험을 봐야하는 등의 긴장감과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꿈이다.
2008년 여름부터 시작한 사회생활에서도 뛰어난 업무능력을 자랑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앞에 주어진 일들은 할 수 있는 선에선 열심히 해보려 했다. 내가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이 컸다. 조금 더 제대로, 덜 창피하게 하고 싶어 시간이 조금 걸려도 붙잡고 매달렸다. 일과 인간관계, 사회생활 모든 것이 무겁고 버거울 때가 많았지만 또 힘들게 이뤄내는 데서 얻어낸 성취감이 아주 컸다. 두루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뒤돌아선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지?' 하며 이불을 찰 지언정 그런 순간들이 정말 좋았다. 나는 '일'을 통해 나의 존재를 찾아가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가장 처음 내 몸에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부위에 암이 퍼져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는 일에 대한 집착이 더 짙어졌다. 암 선고를 받으면 왠지 회사부터 그만두고 모든 것을 훌훌 던지고 세계여행을 떠나든 아니면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홀로 삶을 정리하는 등의 장면들이 떠올랐지만, 실제로는 '암'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내가 붙잡고 있던 일상들에 더욱 매달리게 됐다. 게다가 나는 시한부도 아니고 여러 차례 항암치료를 받고 병원 생활을 해야하는 암 환자가 아니었다. 느낄 수 있는 정상이라곤 체력이 너무 약해져 금방 지치고 스러지게 된다는 것 정도인데 그건 열심히 사는 모두가 느낄 만한 것이라고 생각됐다.
감사하게도 일상을 계속 지켜낼 수 있는 힘과 시간은 주어졌으니 그동안 흘려보냈던 시간들이 더욱 간절해졌고, 그래서 더욱 더 소중하게 내 일상을 꾸려가고 싶었다. 수술하고 한 달만 쉬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 열심히 일했고, 그저 열심히 살았다. 삶을 주저하거나 내던질 이유도 전혀 없었다. 결혼을 하고 감사한 선물인 아이도 얻게 되면서 그 집착은 더욱 커졌다.
그렇게 내 앞에 주어진 순간들에 최선을 다하며 달려왔다. 그런데 네 번째 수술을 하게 될 것 같다고 하니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그동안 너무 열심히 살았다는 안타까움이 쏟아진다. "그러게, 좀 적당히 하지", "일을 너무 많이 했어", "좀 쉬어".. 걱정과 조언들을 받아들일 여유는커녕 억울하기까지 했다. 큰 욕심 없이 그냥 내 앞에 놓여진 과제들을 제대로 하고싶었을 뿐인데, '적당히'는 과연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게 돼버렸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도, 대충 살아서도 안 되며 많은 것을 내려놓기엔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아있고 가진 모든 것을 쥐기엔 시간이 금방 줄어들 것만 같다. 당장 생명이 다할 것 같은 불안감은 없지만 평생 수술만 반복하다 방전된 채로, '아픈 엄마'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두렵다. 젊고 아직도 꿈이 있고 늘 열정을 갖고 싶은데 그 정도를 조절할 줄 모르고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질책을 듣는다. 이런 고민을 언제까지 붙들고 지내야할지도 모르도록 지금의 나는 막막하다.
그래서 나의 병은 크지도, 그렇다고 절대 작지도 않다. 이런 존재와 평생 함께하며 내 삶도 크지도 작지도 않아야 하는데 그 '적당함'을 아직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