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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남편이 돌아왔다 1

제인도

by Dianosaur
효신 이야기
#1 사망 선고

내 기분이 어떤 상태인지 애써 가늠하려는 모습이 얼굴에 다 드러난다. 비위를 맞추려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2 남편이 살아있다고?

시어머니와 나는 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맨 뒤 열에 나란히 앉았다. 좀 전의 언쟁으로 시어머니에게 감정이 상한 나는 그녀를 외면하고 무심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3 그 사람이 아니야

시어머니의 안절부절못하는, 아니, 묘하게 신이 난 듯한 모습에 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대로 있다가는 남편이라고 나타난 작자를 만나기도 전에 시어머니의 수다에 치여 내가 죽을 것만 같았다. 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될 수 있는 한 정중하게 부탁한다.


내가 미쳤지. 결혼을 그렇게 쉽게 결정짓는 게 아니었다. 쉽게 한 선택은 사람의 인생을 쉽게 망친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목 놓아 울었다. 눈물겨운 모자의 해후에, 난 실소가 나올 것 같아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해후: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다시 만남


나를 바보로 만들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좋아, 상대는 해드리지. 이렇게 생각하니 전의가 타올랐다.


#4 다시 집으로

이 사람,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어도 정신만은 멀쩡한 사람이군. 남자의 솔직함에 난 하마터면 호감을 느낄 뻔했다.


낯선 남자와 다툴 기력이 없었던 난, 들고 있던 토트백을 그와 나 사이에 끼워 넣었다. 토트백이라는 든든한 방어벽이 생기자 안심이 됐다.


이젠 경찰도 믿을 수가 없다. 마지막까지 잡고 있었던 끈이 툭, 하고 끊어진 느낌이다.


경장의 부름에, 마치 남의 일처럼 오고 가는 대화를 듣고만 있던 그가 살짝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혹시 몰라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의 폭신한 감촉이 온몸을 감싸자 왠지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일단 한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5 첫날

이럴 때 뭐라고 받아쳐야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 대처할 말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은 나 자신을 힐책했다.

*힐책: 잘못된 점을 따져 나무람


집으로 가는 길. 막히길 바라던 나의 마음과 달리 도로는 시원하게 뚫렸고 평소보다 빨리 집에 도착했다.


#6 위험한 동거

"기억하는 게 아니라 짐작하는 거야?"

"아니. 기억하는 거 맞아. 하지만 기억이라는 게 그렇잖아. 습관처럼 익숙해서 딱 보면 알 것 같은데 막상 생각하면 떠오르지는 않거든. 기억이 반만 되살아났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지금 내 상태가 그래."


오해도 원인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법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의 미움과 분노는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8 출근

분양관의 상담사들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본심은 모르지만 대답 하나만큼은 우렁차게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9 불리한 게임

"상황이 좋지 않아. 상대방을 모르는 한, 우리가 불리하다고."


낮과는 달리 이성을 되찾은 그를 보니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10 그가 보고 있다

밤바람이 불어 살 것 같았다. 찬 공기를 들이켜며 심호흡을 몇 번 했다.


30여 분가량 이동하자, 그가 침묵을 견디기 힘든지 라디오를 틀었다.


#12 결혼 이야기

언니와는 당분간 지속적인 관계를 가질 터라, 속을 너무 많이 내비쳐서는 안 된다.


분양 상담사라는 우리 직업은 일자리를 거의 인맥에 의존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인연이 내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셈이다. 그래서 부지런히 연락해야 일자리도 생긴다.


#13 온화한 가면

그의 눈가가 떨리는 게 보였다.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고 있었으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씹어 삼킨 듯했다. 하지만 난 격분한 그의 모습이 우스웠다.


#14 뜨거운 하루

당황하니까 말도 많아졌다. 수습한다는 게 악화일로다.

*악화일로: 상태, 성질, 관계 따위가 자꾸 나쁘게 되어감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난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았다. 그래, 그도 사연이 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난 마음을 달래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15 그를 찾아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점점 더 다가오는 그에게 언젠가 무너질까 봐 걱정됐다.


#17 지하 방

그가 입었던 옷과 아끼던 음반, 애지중지하던 프라모델까지, 눈에 띄지 않게 버릴 수 있는 건 모두 버렸다. 뒷산으로 난 문과 창문도 두꺼운 커튼으로 막아버렸다. 그러면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에 대한 분노가 공간의 파괴로 이어졌던 것이다.


난 계단에 서서 지하 방을 계속 둘러본다. 확실히 사람이 사는 곳과 빈 곳의 온도 차이는 크다. 예전과 달리 방 전체에는 온기가 돌고 지하 방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예전에 누군가, 입는 옷이 그 사람의 성격을 대변한다고 말했는데 난 그 말이 전적으로 맞는다고 생각한다.


#18 질투하는 남자, 직진하는 남자

진지하게 말하는 필주 씨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 걱정부터 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소년처럼 순정적인 모습에 끌려 나도 모르게 그를 덥석 안았다.


#20 솔깃한 제안

그와는 반대로 난 쿨하지 않았다. 씻고 침대에 누운 후에도 하루 일을 곱씹느라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치 영화처럼 그의 모습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맴돌아 괴로웠다.


하지만 그에 대한 호감은 내 안에서 점점 커가고 있었다. 이런 감정을 만류하는 나와 그에게 호의적인 나 사이에서, 동틀 때까지 괴로워하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창문으로 따스한 햇볕이 들어와 두 연인이 더 반짝거려 보였다. 부러웠다. 내게도 저런 눈부신 날들이 있었을까?

그러나 그런 감정도 잠시, 필주 씨가 테이블에 커피 쟁반을 내려놓는 순간, 난 현실로 급히 돌아온다.


#23 소문

우리는 얘기 듣는 재미에 눌러앉았다. 여자들이 입을 열 때마다 정보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마치 물 맑은 개울물에서 물고기를 낚는 기분이었다.


#25 그 여자의 사정

어이가 없었다. 막무가내인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들은 일부러 내 신경을 거스르려고 '아줌마'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며 비아냥거린다.


그 말을 듣자 난 대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보험회사는 늘 이렇다. 보험료는 매달 꼬박꼬박 받아내면서, 보험금을 지급할 때는 언제나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온갖 서류를 가져오라고 까다롭게 굴다가 종국에는 애를 먹이며 간신히 처리해 준다. 하지만 이런 건 또 일사천리다. 계약 조건이 충족되지 않거나 보험사에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변경되면 바로 해지에 들어갔다. 고객 통보는 항상 나중이다.


#27 안 어울리는 사람

필주 씨와 전화를 끊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얘기가 길어질 듯해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32 그와의 연락

'첫날이라 늦을 거야'

하지만 난 답장을 하지 않는다. 그가 늦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밀당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내 마음이 그렇게 흐른다. 속마음을 드러내기 싫었다.


#33 초라한 마지막

소문이 원래 그런 게 아니겠는가. 당사자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듣고 싶은 대로 달콤하게 가공되어 멀리 퍼지다.


난 얘기를 대충 마무리 짓고 자리로 돌아갔다. 사람은 오래 얘기하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괜히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두려워 나는 입을 다물었다.


#35 우연일까?

필주 씨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그리고 그 상처는 의심으로 물든다.


#36 낡은 노트 한 권

이런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난 다시 전쟁과 같은 일상으로 던져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분위기를 맞추고 기분을 올려주면 기대 이상의 씀씀이를 보인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37 누군가

나는 필주 씨에게 차 사고를 알릴까 말까 고민한다. 얘기를 했다가는 괜히 말 안 했다고 타박할 것만 같고, 안 하자니 또 거짓말을 해야 돼서 귀찮다. 난 거짓도, 진실도 아닌 사실만을 말하기로 했다.

"차가 고장 났어. 당분간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해."


우연이 겹치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니다.


#39 의심

역시 일이 최고였다. 노부부에게 상가의 입지와 장점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오 팀장에 대한 의구심도, 정주 언니에 대한 찜찜함도 싹 사라졌다. 그저 상가를 어떻게 팔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42 기억의 잔상

당당한 정비소 사장의 말에, 나는 할 수 없이 카드 할부로 계산한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반박할 지식이 없어 입도 뻥긋 못했다. 당분간은 허리를 졸라매고 살아야 할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난, 멈칫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꽁꽁 숨겨왔던 내 상태를 그는 알아채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따라주는 술에 난 그만 봉인 해제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하소연을 하며 엉엉 울었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그때 우는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던 필주 씨의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남아 있다.


#44 균열

필주 씨는 역시 순진하다. 힘들게 선점한 나에 대한 우위를 너무도 쉽게 내려놓는다. 그의 단순함에, 그걸 알면서도 걱정이 돼 여기까지 한달음에 온 나 자신에 대해, 실소가 나온다.


#45 닥터 오

술이 오른다. 진지한 그의 눈빛을 보자 입이 간질간질해졌다. 의학을 탐구하는 의사에게 먹잇감을 던져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걸 안다. 작은 틈이, 큰 구멍이 될 수 있다.


#46 실언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까 레스토랑에서 벌인 내 만행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젠장, 너무 취했어.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난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속내를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상했다. 정신과 의사라는 사람에게 홀려, 그만 술술 불고 말았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내 상황에 따라 자꾸 마음이 뒤집힌다. 필주 씨와는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헤어졌는데 지금은 그가 필요하다.


#48 낯선 이의 방문

오픈 초기라 고객은 많았지만, 매물을 사려는 진짜 고객은 흔치 않았다. 진짜 고객을 가려내어 상담석까지 안내하는 게 내 임무였다. 축구로 따지면 미드필더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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