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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애슐리 엘스턴

by Dianosaur
1장

시작은 소소했다. 세면대 옆 양치컵에 꽂힌 여분의 칫솔, 제일 작은 서랍 속 옷가지 몇 벌, 침대 양옆의 휴대폰 충전기. 그렇게 소소했던 것들이 슬그머니 불어났다. 욕실 수납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악다구니하는 면도기와 구강청정제와 피임약, "올래요?"에서 "저녁은 뭘 해 먹지?"로 바뀌는 물음.


여자들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은밀히 눈빛을 교환하며 말없이 의견을 주고받는다. 내가 하는 모든 대답이 차후 토론을 위해 평가되고 분류된다.


저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부럽다.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나 기대치와 예상치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저 사람들, 즉 라이언의 친구들은 그런 기본적인 것 때문에 나를 안 좋게 생각할 것이다. 그럴 의도는 없더라도 말이다. 자신들이 안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겠지.


라이언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은 신경 쓰고 있다. 결국 항복하고 자기 친구들을 다 집으로 초대해 이번 주 내내 내가 메뉴를 올바르게 짜도록 도왔다는 사실이, 어릴 적 같이 자란 여자애들과 내가 정말 다르고 이질적이라서 나를 좋아한다고 어둠 속에서 속삭이던 밀어보다 내게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3장

향수병을 보면 할머니가 생각나서 모으고 있다고 얘기하려는데 거짓말이 혀끝에서 부서진다.


거짓말을 할 때는 가급적 진실에 가깝게 유지하며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지만 이건 또 그것과 느낌이 다르다. 나는 라이언에게 불필요한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다.


슬쩍 짓는 미소에 그의 보조개가 끌려 나온다. "그냥 여기 있는 모든 걸 알아두려는 거야. 당신에 대해 알고 싶어서."

여자라면 누구나 듣고 싶어 하는 말이겠지만 은근 말속에 뼈가 있다. 오묘하다. 라이언도 나처럼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는 게 아닐까.


5장

라이언이 친구라 여기는 여자들에게 심문받는 일은 하려는 할 수야 있다. 그러나 그 외 다른 누구에게도 나를 드러낼 생각은 없다. 아직은. 상대가 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내가 상대에 대해 더 많이 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진.


4인방은 자기네 수다에 나를 끼워 친밀도를 높여보려 하지만 나는 저들이 얘기하는 사람, 장소, 사건을 하나도 모르므로 대화에 참여하는 대신 가만히 관찰한다. 저 여자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 무의식적인 버릇, 선택하는 단어. 저들은 오늘 점심 자리에서 나에 대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식사를 마칠 때쯤이면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어갈 것이다.


이런 옛말이 있다.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생각 없이 던지는 사소하고 무해한 거짓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중차대한 거짓말을 가리키는 것이다. 판을 뒤엎고 세를 결정짓는 거짓말. 의도적인 거짓말. 이후에 벌어질 모든 일의 무대를 마련하는 거짓말. 그리고 일단 발화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거짓말. 첫 번째 거짓말은 가장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선수를 쳐야 한다.


그래, 확실히 마지막 한 올까지 긁는군. 다른 여자들은 이 막나가는 기관차의 탈선을 좀 막아보라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옆에 있는 사람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다.


음식이 나오고 모두가 먹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잠깐의 유예에 감사한다. 레이철은 여전히 탐색의 시선을 내 쪽으로 던진다. 잘해봐.


예의 바른 연극은 이만하면 됐다.

"레이철-" 앨리슨이 소곤거린다.

나는 손을 들어 앨리슨에게 괜찮다고 알린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똑똑히 알겠군요. 여러분은 라이언과 평생을 알고 지냈는데 난데없이 내가 나타난 거죠." 한줄기 미소가 내 얼굴에 번진다. "여러분 같은 친구가 있어서 라이언은 정말 운이 좋네요. 이렇게나 걱정과 관심을 쏟는 친구들이 있어서." 나는 레이철을 똑바로 보며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정말로 알고 싶은 걸 물어봐요. 내가 라이언의 돈을 노리고 있나? 그게 진짜 관심사, 맞죠? 내가 라이언을 이용해 먹고 있나?"

세라가 말을 더듬는다. "아녜요, 무슨, 전혀 그런 게..."

그러나 레이철이 말한다. "난 걔가 머리가 아니라 아랫도리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솔직히 말해서 레이철이 성가시게 굴긴 하지만 네 여자 중 제일 감탄스럽다.

나는 내 앞의 접시를 치워 공간을 만들고 상체를 내밀어 테이블 위에 양 팔꿈치를 올린다. 네 여자도 자동적으로 테이블 앞으로 바싹 다가와 윗몸을 기울인다.

"여러분이 나를 믿을 이유는 없죠. 내 의도가 선하다고 믿을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여러분의 친구를 믿으세요. 여러분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걸 나로선 말하기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라이언에게는 전부 다 말했어요. 이게 내가 오늘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이네요."


6장

나는 그 손에 몸을 내어 맡기고, 라이언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려고 빈 복도를 힐긋 내다본다. 하지만 직장에서 일을 벌이려는 그의 시도가 구체화되기 전에 내가 말한다. "내가 어떤지 보려고 여기까지 달려오기엔 당신 너무 바쁜 사람이잖아." 나는 그의 손에 손깍지를 걸어 탐색을 중지시킨다. "넷 중 누가 전화했어?"


"괜찮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내 쪽으로 돌아오는 라이언에게 묻는다. 그는 바로 기분을 정리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심지어 보조개가 드러나는 그 함박웃음을 보여준다. "응, 그냥 회사에 사소한 문제가 좀." 라이언은 다시 내 옆자리 의자에 털썩 앉는다.


우린 둘 다 입 밖에 낼 수 없는 이야기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있다.

라이언에게 기우는 내 마음 때문에 나는 갈 수 없는 길로 걸음을 내딛게 되고, 그래서 그가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으며 내가 그에게 숨기는 것이 있음을 일깨우는 이런 소소한 경계경보가 가깝다.


"일이 그렇게 된 건 내 탓도 있어요. 예전 일에 대해 얘기하는 게 정말 힘들어서." 내가 말한다.

"아뇨, 내가 그렇게 무리하게 다그치지 말았어야 했어요. 참 무신경했죠." 레이철은 점심때 대화와 관련해 자신을 향해 제기된 비난의 화살이 주로 '무신경함'에 대한 것이었다는 듯 말한다.


레이철은 내 이야기를 낱낱이 분해해 행간의 진실을 찾고 있다. 그리고 내 조사에 의하면 레이철은 유능한 법조인이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라이언과의 우정을 잃는 한이 있어도 내 뒤를 캘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레이철은 좀 더 면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겠군.


7장

함께 살게 되면서 라이언의 연애 기술이 꽤 늘었다. 가벼운 어루만짐, 애정을 표현하는 말과 몸짓,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안 하던 짓을 한다. 라이언은 근무시간을 제외하면 늘 나와 함께 있는다. 라이언이 친구들과 하는 통화로 보건대 그의 친구들은 내가 라이언의 시간을 독점하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다. 착한 여자친구라면 남자에게 친구들을 만나라고, 가장 친한 이들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해야 마땅하겠지- 하지만 나는 착한 여자친구가 아니다.


우리는 베스와 폴의 집에서 열린 칵테일파티에 불참했는데, 레이철과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을 내가 아니라 라이언이 못 견뎌했기 때문이다. 라이언은 아직도 그 점심 자리에서 레이철이 보인 행동거지에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쯤 되니 실제보다 더 심각한 일로 부풀려진 감이 없지 않다. 레이철이 내 면상에 주먹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정보를 캐내려고 압박한 것뿐이지만 이런 소도시의 작은 친구 집단에서는 전자나 후자나 큰 차이가 없다. 라이언이 원한을 품을 만도 한 것이다.


루카 마리노 - 10년 전

엄마가 시나몬롤을 야금야금 먹는 동안 나는 침대 옆 테이블 위의 색종이 무더기에서 한 장을 집어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접기 시작한다. 엄마는 빵을 먹으면서 나를 지켜보고, 내가 잘못 접어도 잔소리하지 않고 나 스스로 실수를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려준다.


"일이 너무 많네. 졸업반인데 친구들하고 놀러도 가고 재밌게 보내야지."

나는 고개를 흔들고 목이 꽉 메어오는 것을 꿀꺽 삼킨다. "둘 다 잘할 수 있어." 나는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엄마도 나도 그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엄마가 모르는 일은 엄마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없다고 나는 이미 오래전에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8장 - 현재

하지만 그건 너무 나답지 않다. 내가 창조한 지금의 나는 캐묻지 않는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의 친구나 동행에 대해 정보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제임스와 그의 여자친구를 만난 순간을 당일의 흐릿함 속에 묻어야 한다. 별도의 시간대로 구분되어 독립된 기억으로 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소한 행위만으로 충분하니까. 어떤 순간이 머릿속에 또렷이 새겨져 뇌리에 남게 하는 데에는 평소 루틴에 작은 변화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들 한다. 가령 휴가를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현관문을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기억이 애매해 종종 난처해지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을 다른 모든 기계적으로 수행되는 현관문 잠그기와 분리시켜야 한다. 열쇠를 꽂기 전에 제자리에서 빙그르 돈다던가 하는 단순한 동작으로도 충분하다. 단순한 동작 한 번으로 그 기억은 영구히 머릿속에 각인된다. 여러 번 거듭 재생될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해진다. 문을 나와서 열쇠를 돌리고 문고리를 잡고 흔들어 잠긴 것을 확인하는 장면이 보이고, 그 일련의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 머릿속을 뒤질 필요가 없다. 했다는 걸 아니까.

나중에 라이언이 이 순간을 분석하면서 자신의 어릴 적 친구와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여자한테 내가 왜 유난스레 관심을 보였는지 궁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왜 유독 그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서 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지. 그런 의문들이 현관문을 잠그기 전 빙그르 도는 동작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레이철은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레이철은 모두의 궁금증에 답을 줄 수 있는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든다.


나는 이대로가 현실인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을 나 자신에게 30초 준다. 나의 연인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에 대한 애정을 보란 듯 선언하고 그 무엇도 우리의 연애가 영구히 지속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세상. 나의 정체에든 나의 동기에든 일절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상.


9장 - 루카 마리노 8년 전

나는 잘 모르는 불확실한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면 좋겠는데. 전화 속 목소리는 내게 아무런 실마리를 주지 않았다.


꽃집에서 그 첫 일자리를 얻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꽃집에 오는 여자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은행 잔고의 차이보다 나의 남부 억양에서 더 크게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어느 것보다 걸음걸이, 말투, 몸짓이 나에 대한 정보를 소리 높여 방출한다.


엄마는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뭐든지 배울 것,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될 것.


12장 - 현재

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한 다음 고개를 끄덕이는데 나보고 알아서 결정하라는 뜻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집은 나의 집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이상적인 가정의 전형 같다. 빠진 건 스타벅스 커피 두 잔과 손잡고 다니기뿐.


작업명: 이지 윌리엄스 - 8년 전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이 작업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내가 이곳에 파견된 이유인 목표물을 입수하면 그 즉시 나는 사라진다. 그럼 마일스는 누가 돌보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 담벼락에 날마다 벽돌을 한 장씩 쌓으며 이 금발 머리 파란 눈의 조숙한 꼬마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막아주길 바란다.


기계음으로 욕설을 하니 더 상스러운 것 같다. 기대했던 격려의 말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내게 필요한 방식의 격려였다.


13장 - 현재

대화는 편안하고 두 남자가 거의 대부분 도맡는다. 그 여자는 이런 종류의 상황에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듯하다. 경청하며 정보 얻기.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내가 묻는다.

제임스는 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그 여자라는 듯 여자를 쳐다본다. 그런 제임스를 마주 쳐다보는 여자의 간절한 표정은 제임스가 좀 그럴듯한 대답을 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오늘 저녁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둘 다 쾌활함을 억지로 꾸며내느라 전에 없이 긴장된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경고 하나만 하죠. 작업을 하다가 되레 작업 표적이 되는 건 순식간이에요." 하고 싶은 얘기는 더 있지만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고, 내가 이 여자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은 걸 알면 스미스 씨가 좋아하지 않을 거다.


14장 - 현재

일요일 아침치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엊저녁 일이 수면의 질을 확실히 저하시키며 끝없는 질문의 행렬을 토해냈다.


나는 커피 머신을 작동시키고 조그만 주방 TV를 켠다. 웅웅거리는 옛날 흑백영화를 배경 삼아 방울방울 꾸준히 떨어지는 짙은 빛깔의 액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라이언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조그만 TV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눈과 귀가 보고 들은 것을 뇌가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것처럼 표정이 멍하다.


나는 우리 엄마가 '허당'이라고 부르는 유의 사람이다. 실제로 하는 일은 없지만 무척 바빠 보이는 용한 재주가 있다. 제인은 목록의 달인이다. 연락해야 할 사람 목록, 사야 할 물품 목록, 사람들이 갖다 준 음식 목록, 방문객 목록. 그리고 음식을 갖다 주거나 조문을 와준 데 대한 답례로 감사 편지를 써야 할 사람 목록.

죽음은 상당한 조직력과 체계를 요구한다.


작업명: 미아 비앙키 - 6년 전

나의 머리, 메이크업, 의상은 흠 한 점 없어야 했다. 나는 그 풀에서 가장 명석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 자신을 필수 불가결한 인력으로 만들어야 했다.


책장을 확대하니 선반에 앉아 있는 종이학이 보였다. 그날 내가 마일스에게 접어준 그 학인지 아니면 마일스가 저 혼자 접는 법을 익혀 만든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소중한 의미가 있는 듯 책장에 전시된 종이학은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일지라도 내가 거기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앤드루의 아내 마리는 나를 지긋지긋해한다. 내가 자기 남편을 원한다고 생각할 만한 여자는 요만큼도 준 적이 없는데 여자들이란 참 웃긴다. 여지를 주든 말든 마리는 계속 내가 자기 남편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뚜껑을 열어보니 당근 케이크 한 조각과 사서함에서 보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봉투가 있다.

내가 당근 케이크를 제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니 기분 나쁘고 불안하다.


맷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앤드루는 떠먹여 준대도 바람을 피우지 않는 남자라는 사실이다. 아름답고 헐벗은 여인 수십 명이 앤드루를 향해 육탄공격을 감행한들 아무 소용없다. 앤드루 혼자 방을 쓴다 한들 아무 소용없다. 그에게 술을 몇 잔을 먹이든 아무 소용없다. 그는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


죄책감이 수면 위로 보글보글 솟아오르는데 킹스턴 작업이 떠오른다. 이건 내 세계가 아니다. 나는 아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유령에 불과하다. 이 문장으로 족하다. 나는 죄책감을 도로 눌러 깊숙이 가라앉히고 추진력을 얻는다.


15장 - 현재

나는 가만히 내 허리를 감싼 라이언의 손을 풀고 그의 머리 밑에서 다리를 빼낸 다음 베개를 받쳐준다. 아침 숙취에 시달리며 오늘의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견뎌냈으니 완전히 곯아떨어질 만하다.


데번의 편집증은 한계를 모른다.

그래도 불평할 수 없는 이유는 과거에 데번의 프로토콜이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를 몇 번이나 구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테크 쪽 사람이야. 내가 MIT에 있을 때 강연하러 왔었어." 데번이 말했다. 딱히 캐내려는 건 아니었지만 데번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알고 싶었으므로 좀 더 이야기를 끌어내려는 마음에 농담을 던졌다. "복도에 세워진 화이트보드에다 그 사람이 낸 복잡한 방정식을 풀고 있었어?" 데번이 나를 빤히 쳐다봐서 내 접근법이 틀렸나 싶었는데 다음 순간 그가 폭소를 터뜨렸다. 진심으로 웃었다. 그게 우리 사이의 얼음을 깼다. 사적인 얘기는 여전히 조금씩 조각조각 들려주지만 이제 나는 그가 실제로 누군지 전모를 파악하고 있다.


내 얘기가 끝나자 데번이 말한다. "맘에 안 들어. 이 상황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맘에 안 들어. 그만 손 떼자."

그 말에 나는 멈칫한다. 그동안 우리는 긍정적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여러 번 놓였지만 데번이 손 떼자는 말을 입에 담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16장 - 현재

데번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라이언과 함께 포장 음식을 배 터지게 먹고 저녁 내내 넷플릭스를 몰아 보며 그날 하루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잊으려 애쓴다.


라이언은 1, 2초가량 나를 응시하며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내 표정을 읽으려 한다.


꼼짝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의외로 상당한 집중력을 요한다. 다리도 떨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꼼지락거리지도 않고, 바로 앞에 있는 연회색 벽 이외엔 시선을 두지 않는다.


데번과 현실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을 나는 잊지 않는다. 아주 오래 기다리게 했을 때 하는 행동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죠.


데번과 나는 매번 새로운 도시와 새로운 표적은 철저히 조사했지만 내게 할당된 이름에 대해서는 깊이 파고들지 않았는데 그게 맹점이었다.


나는 다시 정지 상태로 돌아간다. 차분히. 침착하게. 머릿속에선 수백만 가지 방향으로 미친 듯이 생각이 내달리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라이언한테 당신 진짜 정체를 밝힐 거야?" 레이철이 묻는다.

"내가 당신을 고용한 이유는 내 삶의 사적인 측면이 아니라 법적인 측면을 처리하라는 건데."

레이철은 물러서지 않는다. "라이언은 내 친구야."


17장 - 현재

"아무거나 물어봐도 돼." 침묵이 너무 길어지자 결국 내가 입을 연다.


소리를 꽥 지르고 휴대폰을 벽에 집어던져 산산조각 내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내달리지만 내가 얼마나 처참한 기분인지 그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샤워기를 틀어 물 온도를 견딜 수 있는 한 뜨겁게 올리고 옷을 벗은 다음 물줄기 아래로 들어간다. 지난 몇 시간을 깨끗이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대답이 필요한 질문이 잔뜩 있다.

정리가 필요한 감정이 잔뜩 있다.


나는 몸 구석구석 박박 문지른다. 머리를 감는다. 세수를 한다. 뭐든, 뭐라도 깨끗하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다.


나는 돌아서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물줄기가 비처럼 우리 주위로 쏟아져내린다. 나는 엉엉 운다. 봇물이 터지자 멈출 수가 없다. 꺽꺽거리는 오열이 나를 무너뜨린다.

라이언이 내 귓가에 속삭인다. 말이 안 되는 문장들. 달콤한 말들. 약속들.

그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 갑옷의 작은 균열들을 찾아낸다.

10분만 무너져 있자. 10분만 그가 주는 위로에 빠져 있자, 내가 위로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일단 제쳐두고. 딱 10분만 있다가 다시 정신을 추스를 것이다.


"당신의 그 머릿속에서 지금 뭔가 벌어지고 있지?" 라이언이 묻는다.

그가 내 마음을 너무 잘 읽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라이언에 관한 한 내 방어벽이 얼마나 낮아졌는지 보여주는 신호다.


작업명: 웬디 윌리스 - 6년 전

내가 막 떠나려고 할 때 타이런이 묻는다. "근데 누구세요?"

나는 싱긋 웃으며 말한다. "얼른 어른이 되어야 했던 사람이지, 너처럼."


19장 - 현재

나는 쿠션을 가볍게 두들겨 매년 이맘때면 온 사방에 내려앉는 꽃가루의 얇은 층을 떨어내고, 조금 더 시간을 들여 흔들의자 위 쿠션들을 딱 내 맘에 들게 배치한다.


차가 출발하고 나는 버거를 들고 한입 크게 베어문다. 내가 먹는 동안 라이언은 말이 없고, 나는 목이 메어 삼키기가 힘들어진다. 내가 울컥한 건 이 음식 때문이다. 라이언은 내가 감자튀김보다 고구마튀김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안다. 내가 익히지 않은 양파를 싫어한다는 것도. 내가 사는 세상에선 아주 드문, 사려 깊은 마음씀씀이.


내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라이언은 나를 더욱 단단히 움켜잡고, 더욱 세게 끌어안고서 내 목과 어깨가 만나는 민감한 곳에 얼굴을 묻는다. 나직이 속삭이는 말들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뜻이 통할 리 없는 불완전한 말들이 뜻이 통한다.


작업명: 헬렌 화이트 - 4년 전

데번에게 아직 특별한 사람은 없지만 만약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잘 만들어진 보안 시스템에 대해 느끼는 것과 똑같은 감정을 그 사람에게도 느꼈으면 좋겠다.


20장 - 현재

처음으로 이 일과 이런 삶에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아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졌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그날 아침 앤드루 마셜이 말했던 것처럼 목적이 있는 삶. 그때까지의 내 삶에서 반짝이던 광택이 사라지고 흠집과 기스만 남았다.


조지가 웃음을 터뜨린다. "당신이 얼른 애틀랜타로 가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그러고는 막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나를 돌아보며 덧붙인다. "행운을 빌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씨익 웃는다. "운에 기대는 건 하수죠."

조지의 웃음소리가 커피숍을 나서는 그를 따라간다.


21장 - 현재

이 순간과 나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 방금 들은 이야기에 반응하고픈 욕구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집중해야 한다. 마음만이라도 그와 나 사이에 틈을 벌려야 한다.


나는 쏟아지는 뜨거운 물아래로 발을 내딛는다. 내게 필요한 건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충격이다.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펀치 같은 것. 덕분에 뿌연 안개는 걷히지만 내 혈관 속에 들어앉는 비참함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가 끊어진다.

나는 내게 우리의 가능성에 대해 애도할 시간을 5분 준다. 가능할 수도 있었던 미래를 슬퍼하는 5분. 나라는 여자가 완벽한 동네의 완벽한 집에서 완벽한 남자와 함께 사는 게 가능하리라 믿었던 희망을 파괴하는 5분.

그리고 이건 나의 세계가 아님을 상기한다.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은데. 무슨 생각해?" 귓가에 바투 속삭이는 질문은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우리가 진짜로 함께하는 사이인 것처럼.

"그냥 좀 피곤하네."

라이언은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내 머리를 어루어만진다. 그렇게 머릿결을 쓰다듬어주면 내가 좋아한다는 것을 그는 안다. 우리 둘 다 쉬이 잠들지 못한다.


22장 - 현재

에어컨이 털털대며 돌아가고 라이언이 자고 있는 동안 내 머리는 핑핑 돌아가다 온갖 가설과 추측과 의혹에 걸려 넘어진다.


아니.

거기까지 가진 말자. 아직은.

성급한 결론을 내기리는 쉽지만, 섣부른 단정은 치명적이다.


나는 아직 이 휴대폰을 산 가게의 주차장이고, 내 차 뒤에 숨어서 차체 길이만큼만 수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운전을 오래 했더니 몸이 뻐근해서라고 혼자 되뇌지만 사실 나를 몰아붙이는 건 공포다.


23장 - 현재

라이언은 로비 의자에 털썩 앉더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우리를 쳐다본다.

가야 할 층에 도착하자 나는 라이언을 머릿속에서 내몰고 당면한 과제에 집중한다.

"그리고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건 당신 전문이지."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난 준비 빼면 시체인 사람이다.


사실 알맞은 단어와 알맞은 어조를 구사하기만 하면 진실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저들은 내가 사용한 톤 때문에 날짜를 말하기 어렵다는 말을 기억을 못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실제로는 그걸 말했다간 죄를 뒤집어쓸까 봐 날짜를 말하기 어렵다는 얘기지만.


24장 - 현재

나는 그들의 범죄사건을 해결해 주려 온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왔을 뿐이다.


"루카 마리노가 제임스와 함께 처음 더비 파티에 나타났을 때 당신은 그 여자가 누군지도 몰랐어."

레이철의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든다. "똑바로 기억해 봐요. 나는 제임스가 여자와 같이 나타났다고 했지, 내가 그 여자를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한 얘기는 안 했는데."

이래서 내가 가급적 진신을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복도를 걸어간다. 이제 호랑이 굴에 들어가려 하는데, 이 통화 채널을 열어둬야 한다고 데번이 주장했다는 사실에 울컥한다. 지금 데번은 나를 위해 자신을 취약한 상태로 노출시킨 것이다.


26장

"스미스의 행방에 대해선 아무 얘기 없어?" 에이미의 질문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서 일말의 위로를 찾으려 한다. "라이언이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 있는지 파악했어?"

데번이 노트북에서 고개를 든다. 대답을 듣고 싶은지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서 그 질문은 미루고 있었다.


에이미가 눈살을 찌푸린다. "바르게 산다는 게 아니라 라이언과 끝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잖아. 라이언은 도덕적으로 회색이고, 당신도 도덕적으로 회색이지. ... (후략)"


그러고 나서 에이미 역시 떠났다.

나는 별장에 좀 더 머문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세워야 할 계획이 있고, 고민해야 할 결정이 있지만, 일단 한 주 동안은 이 고요와 평화에 감사할 뿐이다.


작업명: 에비 포터 - 4개월 전

"당신에 대해 좀 더 듣고 싶어요." 메인 요리가 나오자마자 라이언이 말한다.

불현듯 엄마가 생각나고, 우리가 집이라고 불렀던 그 소형 트레일러(엄마는 그곳을 집답게 만들었다)가 와락 생각나면서 처음으로 나는 첫 번째 거짓말이 하기 싫어진다. 엄마한테 바느질을 배운 얘기며, 엄마와 함께 지반의 모든 봉제 인형에 옷을 만들어 입혔던 얘기가 하고 싶다. 둘이서 왕족이 된 것처럼 우아하게 티파티를 했던 얘기도. 우리 집 벽에 걸려 있던 세계지도 얘기를 하고 싶다. 우리는 다트를 던지고 그게 꽂힌 나라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아내곤 했다.

그러가 나는 대본에 충실하게 부모님이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으며 나는 내 길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라고 말한다. 나는 필요 이상의 진실을 이야기에 엮어 넣는다. 다른 누구에게 했던 것보다 더 많이 나 자신에 대해 그에게 얘기한다.


에비 포터 - 현재

"내 평판이 당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좋았던 적은 없는데. 당신만 준비되면 언제든 연극은 끝내도 돼."

나는 마음이 진정되기를 바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쉰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네. 너무 오래... 연극을 해와서."


라이언이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미소를 짓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자기가 당황했어야 맞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몸짓으로 말한다.


라이언은 내가 하는 얘기를 이해하려 애쓰며 눈을 가느다랗게 뜬다. 내가 너무 애매모호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얘기하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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