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예
작가의 말
사람은 왜 꿈을 꿀까? 왜 인생의 3분의 1씩이나 잠을 자며 보내도록 만들어졌을까? 도무지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신비롭고 이상한 장면들, 자꾸만 꿈에 나오는 그 사람, 분명히 가본 적 없는 장소들. 어젯밤 꿈속에서 그토록 생생했던 일들이 정말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할까?
인류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한 덕분에 놀랍도록 많은 것을 알아냈으나, 그것이 우리의 가려운 부분을 속 시원히 긁어낼 만큼 충분한 양일 리 없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호기심은 집요해지고 물음은 복잡해지며 대답은 간결하게 삶을 관통하길 바라게 될 뿐이다.
세 번째 제자의 유서 깊은 가게
페니는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쓰디쓴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감과 동시에 어수선하던 주변 소음이 잦아들고 주위 공기가 차분하게 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정작 그들은 무성하게 자란 털들 덕분에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페니는 벌거벗은 손님들도 잘 차려입은 사람보다는 똑같이 벌거벗고 다니는 털북숭이 동물들에게서 가운을 건네받는 편이 덜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사랑한 시간은 모두가 잠든 시간입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과거에 대한 미련도 없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이 굳이 잠들었던 시간까지 포함하여 떠올리지 않고, 거창한 미래를 기약하는 사람이 잠들 시간을 고대하지 않으며, 하물며 잠들어 있는 사람이 자신의 현재가 깊이 잠들어 있음을 채 깨닫지 못하는데, 부족한 제가 어찌 이 딱한 시간을 다스려보겠다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첫째가 미래만 생각하느라 몽땅 잊어버린 과거의 기억들은, 그 양이 어찌나 많았던지 그들이 사는 땅에 안개처럼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빽빽한 안갯속에서 친구와 가족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이 사라지자 그들은 무엇을 위해 미래를 꿈꿔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먼 미래는커녕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 제자 쪽 상황도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좋았던 기억에만 갇혀 세월의 흐름과 예정된 이별, 그리고 서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림자가 밤새 대신 경험한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은 둘째처럼 연약한 이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첫째처럼 경솔한 이들이 잊지 말았어야 할 것들은 이튿날 아침이면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허름한 창고 같은 사무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러구트의 외관에서는 기품이 흘러넘쳤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흑갈색 눈동자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소년처럼 반짝였다.
쿠키를 한 입 배어 물자, 어깨의 긴장이 풀리고 주변 공기가 적당히 서늘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낯선 사무실이 아주 익숙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단골 카페에서 '진정 시럽'을 추가한 커피를 마셨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지만, 훨씬 효과가 좋았다. 달러구트가 건넨 쿠키에는 분명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페니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면접 대비 책자에 쓰여 있던 모범답안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꿈이란 현실에서 체험하지 못한 것들을 체험하고... 꿈은 불가능한 일의 대체재로서..."
대답을 이어가던 페니는 달러구트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한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앞선 지원자들이 그녀와 똑같은 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페니는 방금 그 대답으로 탈락의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워졌음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야만 했다.
페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남들과 다르게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달러구트가 그것을 원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약 서류를 통과한 것이 달러구트가 말한 '꿈은 꿈일 뿐이다'라는 당돌한 한 구절 때문이라면, 일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특별한 뜻은 없어요. 손님들은 꿈을 꾸고 나면 대부분을 잊어버린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말 그대로 꿈은 꿈일 뿐이고 깨어나면 그뿐이라고 말씀드린 거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방해가 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과하지 않은 점이 좋아요."
페니는 마른침을 삼켰다. 적막이 길어지는 것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하긴 했지만, 이 대답으로 면접의 맥이 뚝 끊겼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 (중략)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과거로부터의 배움. 이 두 가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데 너무도 중요한 것들이에요."
페니는 질문하는 척하면서 잠깐 뜸을 들이고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저는 꿈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이 질문을 떠올려요. '사람은 왜 잠을 자고 꿈을 꾸는가?' 그건 바로,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리석기 때문이에요. 첫 번째 제자처럼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든, 두 번째 제자처럼 과거에만 연연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죠.
... (중략) 꿈을 꾸지 않고 푹 자든, 여기 이 백화점에서 파는 좋은 꿈을 꾸든, 저마다 잠은 시간을 이용해서 어제를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잠든 시간도 더는 쓸모없는 시간이 아니게 되죠."
자신감을 얻은 페니는, 이쯤에서 그럴싸한 말을 덧붙여 인상적인 지원자가 되고 싶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잠, 그리고 꿈은... 숨 가쁘게 이어지는 직선 같은 삶에, 신께서 공들여 그려 넣은 쉼표인 것 같아요!"
페니는 조금 전의 멘트가 너무 작위적이었던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가 좋을 때 적당히 했어야 했다.
페니는 높은 급여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려다가, 그건 초면에 지나친 솔직함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페니는 머릿속으로 말을 골라가며 천천히 대답했다.
"... (중략) 몇몇 꿈 상점들은 충분히 잔 사람도 더 자게 만들고, 쾌락만을 좇아 꿈을 사러 오게 만든다고요. 하지만 달러구트 님의 꿈 백화점은 그렇지 않다고 들었어요. 필요한 만큼만 꿈꾸게 하고, 늘 중요한 건 현실이라 강조하시죠. 시간의 신이 세 번째 제자에게 바란 것도 딱 그 정도일 거예요. 현실을 침범하지 않는 수준의 적당한 다스림. 그래서 여기에 지원했어요."
1. 가게 대성황의 날
오늘따라 거리는 마을 주민들이며 잠든 손님들로 북새통이었다.
솥 안에는 살짝 노르스름한 양파 우유가 펄펄 끓고 있었다. 따듯할 때 마시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의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인기 메뉴였다.
그녀는 인상이 밝은 데다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다만 지금은 많이 지쳐 보였다.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고, 목소리에도 칼칼한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지금 잡생각이 많으신 것 같은데 꿈은 다음에 구입하시는 게 어떨까요? 꿈의 선명도가 떨어진답니다. 이럴 때는 그냥 숙면하시는 게 좋죠.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 경험상 손님의 경우에는 99% 꿈을 꾸는 도중에도 잡생각이 끼어들거든요. 전혀 다른 내용이 되어버려요. 옆 골목에서 파는 양파 우유가 굉장히 고소하답니다. 숙면에도 도움이 되지요. 드시고 푹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이 층에 있는 모든 꿈은 내가 하나하나 직접 검수해서 들어온 최상의 작품들이야. 난 이렇게 좋은 꿈들을 손님들이 멋대로 사가서는, '에이 개꿈이네' 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어. 반드시 기억해 둬. 아무나한테나 팔면 꿈값을 못 받아."
페니는 모그베리의 투덜거림이 점점 길고 지루해지자, 슬슬 4층으로 피신하기 위해 빠져나갈 틈을 살폈다.
2. 한밤의 연애지침서
"핵심은 손님들이 스스로를 '망각의 동물'이라고 인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자신들을 파악하고 있어요. 심지어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는 모든 정보가, 있는 그대로의 실제 사실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재입력된 정보라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결국은 모든 경험이 잊힐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건, 지금 이 순간이 한 번 뿐이라는 것을 더 절절하게 느끼게 하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여자는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애써 지워냈다. 잠들기 전 진지한 생각은 금물이다. 숙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그녀였다.
여자의 콩닥거리는 마음은 10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제 여자는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실체 없는 고민이 많아지는 나이였다.
이런, 생각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자야 한다.
여자는 곯아떨어지며 속으로 빌었다.
'짝사랑이라도 좋으니 이 감정이 오래 가게 해주세요.'
"음, 좋아하는 사람의 꿈을 꾸는 건 처음 몇 번만 좋을 것 같아요. 계속해서 좋아하는 사람의 꿈을 꾸다 보면 마음만 커지고, 결국은 속앓이를 하게 되니까요. (후략)"
페니는 대화의 흐름이 단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아둔한 직원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보다 궁금함이 훨씬 컸다.
"좋아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되는 거란다. 그 끝이 짝사랑이든, 두 사람의 사랑이든, 우리의 역할은 그걸로 충분하단다."
여자는 일어나려던 시간보다 5분 먼저 일어났다.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상쾌하게 눈이 떠졌다. 어렴풋이 꿈에 어떤 가게에 갔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을 떠올리려고 애쓸수록 손에 움켜쥔 모래알처럼 머릿속에서 빠르게 빠져나갔고, 여자는 다시는 이것에 대해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여자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늘도 꿈에 그 남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여자는 꿈의 여운을 그대로 간직한 채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분명 설레고 있었다. 하지만 샤워기의 차가운 물이 몸에 닿는 순간, 그녀는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았다.
'혼자서 이게 무슨 주책이야?'
출근한 여자는 잡생각을 버리고 일에 집중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매일 밤 그 남자의 꿈을 꾸는 이유에 대해 생각할수록, 받아들이기 힘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냥한 여자의 말투, 남자는 그 순간 오늘 하루에 대한 응원을 받은 것만 같았다.
3. 예지몽
비고 마이어스뿐만 아니라 각 층에서 차출된 직원 몇몇이 로비로 내려와 과일을 매달고, 잎사귀를 장식하고, 바닥을 더럽힌 낙과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전혀 의외의 일꾼들도 있었다.
페니의 상념을 깨트린 것은 달러구트의 풀 죽은 목소리였다.
"내가 연애를 안 한 지 오래돼서 그런가 봐. 다른 사람들 연애는 다 영화 같아."
나림은 접시에 담긴 식어 빠진 커리를 휘휘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예지몽을 꾸고 싶지 않으세요?"
"내용을 미리 아는 건 재미없거든요. 영화도 그렇고 사는 것도요. 스포일러는 딱 질색이에요."
"전혀요. 오히려 미리 안다면 정말 불행할 거예요. 좋은 미래를 본들 그게 진짜라는 보장도 없는데 괜히 나태해질 수도 있고요. 그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감만 커지겠죠."
"목적지요? 사람은 최종 목적지만 보고 달리는 자율 주행 자동차 따위가 아니잖아요. 직접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고 가끔 브레이크를 걸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제 맛이죠. 유명 작가가 되는 게 전부가 아닌걸요. 전 시나리오를 쓰면서 사는 게 좋아요. 그러다가 해안가에 도착하든 사막에 도착하든 그건 그때 가서 납득하겠죠."
나림은 눈앞의 모든 것을 느릿느릿 눈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재빠르게 상황에 대한 스토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우더니, 그녀는 놀랍도록 또렷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나림은 갑자기 머릿속에 산재해 있던 불규칙한 시나리오의 장면들이 빈틈없이 끼워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종석과의 짧은 통화를 끝낸 아영에게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Deja-vu! '이미 보았다'는 뜻이지. 최초의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현상을 이르는 말이란다. 재밌지 않니? 손님들은 우리가 파는 자투리 예지몽에 예쁜 이름까지 붙여주었어. 정말 독창적이야!"
"페니, 그거 아니? 대부분의 손님들은 데자뷔를 신기해하긴 하지만, 뇌의 착각 정도로만 생각하고 무시해 버린단다."
4. 트라우마 환불 요청
자기 자신에게 안심할 만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고 나서야, 여자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거꾸로 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때일지도 모르죠. 이미 지나온 이상,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랍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 이렇게 건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손님들께서 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하긴, 모든 심리 치료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말도 있으니까, 영 일리가 없지는 않은 것 같네요."
"난 지금까지 잘 해낸 내가 자랑스러워. 이전에도 잘 해냈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든 결국은 잘 해낼 거야' 자신을 무조건 믿는 마음,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마음, 여자에게는 이런 느슨한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항상 꿈의 가치는 손님에게 달려 있다고 하셨는데... 아하, 그렇군요. 손님이 직접 깨닫느냐 마느냐의 차이예요. 직접 알려주는 것보다 손님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꿈이 좋은 꿈이에요."
"그렇지. 과거의 어렵고 힘든 일 뒤에는, 그걸 이겨냈던 자신의 모습도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우린 그걸 스스로 상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단다."
5. 꿈 제작자 정기총회
원래 정기총회는 꿈 산업에 중대한 사안이 생겼을 때 관계자들이 대책을 세우기 위해 만든 모임이지만, 사실 최근에는 가벼운 저녁 식사 자리 정도일 뿐이란다. 누가 누구와 오든 신경 쓰지 않아. 편안한 자리에서 더 좋은 얘기들이 오가기도 하고 말이지."
그들 역시, 녹아내린 눈이 질척하게 들러붙은 신발을 신고 바닥에 물기를 철벅거리며 들어왔다. 거대한 막심과, 조그마한 아가냅 코코의 겉모습은 이상하리만치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이 풍기는 아우라는 비슷한 질감이었다.
동물들도 감정을 느끼지만 사람이 느끼는 것만큼이나 극적이거나 섬세하지 못해서, 취급하는 가게가 드물었다.
니콜라스가 말하자 사람들이 깔깔 웃었다. 페니는 막심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고, 의외의 면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6. 이달의 베스트셀러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은 겉보기에는 마냥 행복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공존한단다. 필사적으로 약속을 잡거나 늦게 잠드는 손님들만 봐도 그건 알겠지?"
마침 바로 그때, 페니의 눈에 케이블 2가닥이 서로 반대로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달러구트가 사용 설명서를 다시 정독하느라 한눈을 파는 사이에, 그의 음료수 잔을 다시 채워주러 온 척하면서 잽싸게 케이블을 바꿔 꽂았다.
"달러구트 님. 이제 제대로 나오는 것 같아요."
"역시, 내가 해냈구나! 그것 봐, 난 기계치가 아니라니까. 이 모습을 웨더가 꼭 봤어야 하는데."
"모두가 제 꿈을 꾸고 극한의 자유를 느꼈다는 찬사를 보낼 때, 어린 저는 자유의 불완전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꿈에서는 걷고 뛰고 날 수도 있는 저는, 꿈에서 깨어나면 그러지 못합니다. 바다를 누비는 범고래는 땅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바다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정도와 형태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생명은 제한된 자유를 누립니다."
"여러분은 가둬두는 것이 공간이든, 시간이든, 저와 같은 신체적 결함이든... 부디 그것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다만 사는 동안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데만 집중하십시오. (후략)"
7. Yesterday와 벤젠고리
한 달 벌어 쓰는 돈이 벌이를 넘기도 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달에는 운 좋게 몇 만 원 남기도 하는, 전력을 다하지만 나아감은 없는 생활이 쳇바퀴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남자는 멍한 시선을 거두고 귀로만 바깥의 소리를 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발소리나 말소리가 영감이 될까 싶어 비슷한 음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프로그램의 건반을 두드렸다.
"꼭 성공해야 하나요? 지금껏 열심히 했다면 그게 이미 성공 아닐까요?"
그가 지금 듣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남자는 다시 인터넷 검색창을 열어 '영감', 'inspiration' 따위를 검색했다. 마치 그러면 영감이 자기 안에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폴 매카트니와 비틀스의 자서전에 따르면, 매카트니는 꿈속에서 '예스터데이'를 작곡했다고 한다. 깨자마자 후다닥 피아노로 가서는 잊기 전에 그 음들을 연주했다. 매카트니를 사로잡은 걱정은, 다른 누군가의 곡을 들었던 것이 잠재의식에 각인되었다가 다시 떠오른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1달 동안 음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 노래를 이전에 들은 적이 있는지 물어보러 다녔어요. 그건 마치 주운 물건을 경찰서에 돌려주는 것과 같았죠. (후략)"
"영감이라는 말은 참 편리하지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 대단한 게 툭하고 튀어나오는 것 같잖아요? 하지만 결국 고민의 시간이 차이를 만드는 거랍니다. 답이 나올 때까지 고민하는지, 하지 않는지, 결국 그 차이죠. 손님은 답이 나올 때까지 고민했을 뿐이에요."
"물론이죠. 꿈이란 거 정말 재밌네요. 꿈과 꿈이 동음이의어인 것도 신기하고요. 그러고 보니 영어로도 dream은 dream이군요. 그럼 저는 꿈에서 꿈을 찾은 셈인가요?"
8. 체험판 출시: 타인의 삶
일어나 눈 뜨고 출근하고 매일 같은 장소에 갔다가 항상 보는 사람들만 보다가, 점심시간엔 늘 똑같은 얘기만 하다가 야근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집에 오는 삶. 그리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주말의 반복이, 참을 만한 고민 같다고 느껴졌다.
사실 남자는 지금 생활에 대단한 불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금 더 특별할 순 없을지 못내 아쉬운 것이다.
9. 익명의 손님께서 당신에게 보낸 꿈
"예를 들자면... 딸한테 남자친구는 생겼는지 묻는다거나, 아직도 아기처럼 김밥을 먹을 때 오이는 다 빼고 먹는지, 그런 일상적이고 엄마다운 잔소리를 하는 거죠. 남편한테는 울 샴푸랑 섬유 유연제는 헷갈리지 않도록 꼭 라벨을 붙여두라고 이야기하곤 했어요. 그런 일상적인 얘기면 충분할 것 같은데, 너무 평범한가요? 아무래도 오랜만에 보는 걸 텐데 잔소리는 빼는 게 낫겠죠?"
"그럼 캐러멜 마키아토? 그게 제일 달아."
"그거는 어떻게 생긴 거지?"
"여기 있잖아요. 할머니. 여기 사진도 있네. 에이, 눈앞에 두고도 몰라."
"어디? 라멜... 마? 이거야? 할머니가 가나다라마바사아 까지는 배웠는데 그다음을 못 배워서 헷갈려서 그래."
"그러게, 할머니가 제일 세련된 어르신이네. 이런 데 와서 손자랑 커피도 마시고."
"너는 참, 말을 강아지풀만치 보드랍게 해.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안 우스워, 할머니. 그럼 내가 가르쳐줄게. 우리 할머니 엄청 똑똑하시니까 금방 배우실 거야. 내가 이번 주말까지는 일이 바쁘니까... 다음 주말에 가서 가르쳐드릴게."
그게 끝이었다. 82세. 짧지 않은 삶이었으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면 할머니의 기일이다.
남자는 음료를 주문하고 홀로 창가의 1인석에 앉았다. 할머니의 기일 즈음이 되면 평소보다 더 많이 생각났다. 그녀는 젊어서는 눈치로 살았고, 늙어서는 어린 손자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학교에서의 배움이 부족하다고 할지언정, 그녀는 얼마나 현명하고 어진 어르신이었고, 또 어릴 적 그에게 얼마나 의지가 되는 존재였는지.
남자는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생각했다.
'할머니의 인생은 뭘 위한 것이었을까.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 좋은 세상 한 번 마음껏 못 누려보고 가신 할머니의 삶은 대체 뭐였을까'
지긋지긋하게 고생만 하고 좋은 꼴도 못 본 세상. 어쩌면 할머니는 지금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여태껏 한 번도 남자의 꿈에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 보고 싶다'
남자는 아이처럼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두 사람에서 세 사람으로, 그리고 세 사람에서 다시 자연스럽게 두 사람으로 돌아온 듯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두 사람에게도 유효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부부는 그러다가도 이야깃거리만 있으면 끝도 없이 아이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은 아이 이야기를 굳이 피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애써 잊으려고, 잊어야 산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잠에서 깼는데도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뜨면 눈꺼풀 안쪽의 잔상이 사라질까 봐 아까워서 뜨기 싫었다.
에필로그 2. 스피도의 완벽한 하루
스피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오늘 하루 계획은 완벽했다. 그가 뜬금없이 아무 날도 아닌 평일에 이렇게 하루씩 휴가를 내는 이유는,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최대한 많은 일을 해냈을 때의 쾌감을 느끼기에 주말보다 평일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방백
소재가 신선했다. 간간히 실제적 사실과 창작이 어우러져 마치 실제처럼 보이는 소설 느낌이었다.
다만, 판타지 같은 동화적인 요소 때문인지 끝까지 완독 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소 현실적인 추리 스릴러 소설을 즐기는 취향 때문인지, 이 소설은 단숨에 읽기 다소 힘들었다. 후속 편은 읽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