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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이름은 유괴

히가시노 게이고

by Dianosaur
1 오토모빌 파크

결혼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그녀에게 관심이 없어졌다. 풍만한 가슴과 미끈한 다리, 매끄러운 피부도 마네킹의 한 부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김샜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본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결혼 같은 거 생각해 본 적 없다면서."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한 거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야."

"그러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속내를 드러내니 짜증이 치밀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팔굽혀펴기를 몇 번 했는지 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이제 조금 힘이 들기 시작한다.


무슨 뜻인지 몰라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아니, 무슨 말인지는 안다. 다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믿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 놓고 기획이 마무리되어 이제 실행 사인만 나면 되는 단계인데 꽁무니를 빼겠다는 겁니까? 천하의 닛세이가?"

"아, 너무 화내지 말게. 지금까지 수주한 일 가운데서도 첫째 둘째를 다툴 만큼 큰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자네가 열심히 했던 건 알고 있네. 그렇지만 클라이언트가 못하겠다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이런 일이 자주 있으면 견디지 못하죠."


고쓰카는 오른쪽 손바닥을 내밀어 제지했다.

"자네가 가면 그쪽과 다투기밖에 더하겠나. 지금 그냥 물러나주면 그쪽은 우리에게 빚을 진 셈이 되네."

장사꾼인 고쓰카다운 생각이었다. 그는 크리에이터가 아니라 경영자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했다.


"빙빙 돌려 이야기해 봐야 납득할 수 없을 테니 확실하게 말하지. 오토모빌 파크에 딴죽을 건 사람은 새로 부사장에 취임한 가쓰라기 씨야."


부사장에게 어지간히 압도당했는지 고쓰카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스태프를 새롭게 짤 것. 특히 리더인 사쿠마 순스케는 교체할 것."

내 이름이 나왔는데 그 내용이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내 이름이 나왔기 때문에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쿠마 씨는 아이디어가 기발해서 단기적으로는 주목을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인 안목이 결여되어 있다. 단순해서 이해하기 쉽기는 하지만 사람 마음을 읽지 못한다. 신차 캠페인을 위해 유원지를 만든다는 발상도 참신하다고 할 수 없고, 사고가 얕다는 느낌이 든다. 닛세이는 차만 파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프라이드도 팔고 있다. 프라이드를 얻기 위해 유원지에 가는 손님은 없다. 이번에는 좀 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싶다. 이상이 가쓰라기 씨의 말일세."

나는 잔을 쥔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분노와 굴욕감이 온몸을 가득 채워가는 듯했다. 입을 열면 고함을 지를 것 같았고, 몸을 움직이면 잔을 내동댕이칠 것 같았다.


브랜디를 들이켰다. 자극이 식도에서 위로 내려갔다.


"조금 더 마시고 가지 그러나? 홧술은 누군가와 함께 마셔야 하는 법이야."

"무리한 말씀하지 마세요."

고쓰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리일지도 모르지,라고 중얼거리면서 잔을 기울였다.

사비네를 나온 뒤에도 바로 집으로 돌아갈 기분은 아니어서 몇 번 간 적이 있는 바에 들렀다. 카운터 끄트머리에 앉아 버번을 온더록스 잔으로 들이켰지만 납덩이를 삼킨 듯한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사람 마음을 읽지 못한다, 사고가 얕다, 이번에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다. 아까 들었던 말들 하나하나가 내 안에 있는 뭔가의 밸런스를 무너뜨려갔다.

웃기지도 않는다. 규모가 큰 광고기획사에서 스카우트된 지 4년, 그동안 내 손을 거쳐 히트하지 않은 상품은 아무것도 없다. 물건이건 사람이건 보석이건 쓰레기건 히트시켜 왔다고 자부한다. 사람 마음을 읽지 못하는 놈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2 미행, 그리고 탐색

하기야 술김에 온 것은 사실이었다. 택시 운전기사에게 행선지를 댔을 때는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뻗쳐 있었다.


일단 돌아갔다가 다시 오겠다고, 술기운이 물러간 머리로 다짐했다. 도망가는 것은 아니다. 가쓰라기 가쓰토시와는 반드시 대결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방법은 나답게 치밀해야 한다.


무얼 어떻게 해석했는지 운전기사는 자기 나름대로 이해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되면 나도 융통성 없이 굴지는 않아. 경우에 따라서는 오늘 밤 잠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있을 거야."

여자의 얼굴에 망설이는 표정이 드러났다. 아니, 계산하는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내 정체를 추측하고, 믿어도 괜찮을지 어떨지, 이용하는 게 득이 될지 어떨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난 피우지 않아."

"건강 때문에?"

"그것도 그렇지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니까. 한 개비를 피우는 데 3분쯤 걸린다고 하면 하루 한 갑을 피우는 사람은 스물네 시간 중에 한 시간을 연기를 들이마시는 데 허비한다는 계산이 나오지. 담배를 피우면서 일을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리고 또 한 가지, 담배를 피우려면 한쪽 손을 희생해야 해. 무얼 하든 두 손으로 하는 것보다 한 손으로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


약속한다고 말하는 거야 간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털어놓을 여자는 아니다.

"당신이 약속을 지킨다는 보증은 없는 거네."

"그렇지. 그렇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어. 남에게 이야기해서 내가 이득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로 태도가 결정되지. 별 이득도 없는데 입 가벼운 남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거든. 특히 거래처 따님에게는 말이야."


"어머니 기억은 전혀 나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잘 모르겠어. 기억 못 하는 건지도 모르지. 사진 같은 걸 보고는 그걸 내 기억이라고 착각하는 건지도."


주리는 유리창 너머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쓸쓸함과 공허함이 공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린 시절을 그런 얼굴을 하고 보냈는지도 모른다.


"신데렐라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날 미워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보이지 않는 심술은 실컷 맛봤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나는 남이니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섞일 수가 없었어. 그 사람들도 받아들여주지 않고, 내가 없으면 그 사람들은 완벽한 가족이지. 그런데 거기 내가 끼어드는 바람에 홈드라마 배우 꼴이 되어버렸어. 말도, 행동도 다 공허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았지."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를 계속 무시해 온 사람들이야. 그것도 웃는 얼굴로.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말솜씨가 좋구나, 하고 나는 감탄했다.


주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표현을 고르고 있는 얼굴이다. 그 표정 그대로 대답했다.

"정말 싫어."


3 유괴 게임

만 엔짜리 지폐를 텔레비전 위에 두고 누름돌 대신 리모컨을 올려놓았다.


"돈, 갖고 나왔으면 좋았을 거라고. 돈이 아니라 뭔가 값나가는 거. 다이아몬드든 뭐든. 그랬다면 한동안 쪼들리지 않아도 될 텐데."

"그만큼 충동적인 행동이었다는 거지. 내일이면 마음이 변할 거야. 일단 내가 가쓰라기 씨에게 연락하는 건 보류해 둘게."


자신이 무일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새삼 잃어버린 것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모양이다. 가출한 주제에 집의 재산을 신경 쓰는 건 가쓰라기 가쓰토시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밤길을 걸으면서 주리와 나눴던 대화를 되새겼다. 저녁때부터 꽤 술을 마셨는데도 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이야기는 자극적이었다.


스키모토는 나하고 눈이 마주치자 난처한지 사장의 책상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좋으시겠습니다,라는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쓰라기 가쓰토시 또한 홍보부장의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야기에 내용이 없기 때문인지 뭔가 다른 이유, 즉 딸이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너희는 장기판의 말이니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는 이야기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그뿐일 것이다.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이기는 하지만 실내를 울릴 만한 박력을 갖추었다. 모든 사람의 자세가 몇 분 전보다 더 굳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굴욕감과 투지가 믹서에 넣은 듯이 소용돌이쳤다. 게임이라고? 그렇군. 당신은 게임의 고수인 척하고 있다. 그렇지만 게임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고수인지 확실히 가려야 하지 않겠는가. 승부도 겨루지 않고 멋대로 취소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가쓰라기 가쓰토시, 나하고 승부를 겨루자. 그런 생각을 그에게 계속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파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 밤은 내가 먼저 전화를 했다. 어떤 식으로든 기분을 풀지 않고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사를 한 뒤에는 어디로든 한잔하러 가서 상황을 보아 유혹할 생각이었다. 육체관계를 맺으면 좀 귀찮아질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기분 상태 그대로 밤을 지내느니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맛이 그저 그런 요리와 와인을 삼키면서 나는 마키가 관심을 보일 만한 정보를 몇 가지 제공하고, 그것과 관계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중간중간 가벼운 농담을 곁들였다. 젊은 여자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듣는 역할로 돌아갔다.


남녀 관계란 게임이다. 그렇지만 게임은 맞붙는 상대가 강해야만 재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밤 상대는 너무 재미가 없다. 나는 즐거워하는 마키의 표정을 보면서 역시 다른 여자를 불러내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어차피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것이라면 약간은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상대가 낫다.

말하자면 내가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자극적이고 수준 높은 게임인 것이다. 섹스는 그 게임의 승리에 뒤따르는 전리품에 불과하다.


문득 마음속에서 뭔가가 걸렸다. 뭔가 잊어버린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직전에 느끼는 것과 같은 감각이다. 이윽고 그것은 또렷한 모습을 갖추며 하나의 영상이 되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4 은신처

"습관이 되면 아무것도 아니야. 중요한 건 물건을 너무 많이 들여놓지 않는 거지. 쓸데없는 것은 그때그때 버려. 그렇게 하면 청소하는 것도 그리 힘들진 않아. 기껏해야 30분이면 끝나지. 일주일이 1만 80분이니까 30분 애쓰면 나머지 만 분 정도를 쾌적하게 보낼 수 있어. 거꾸로 30분의 노력을 아끼면 불쾌한 만 분을 보내야 하고."


"상파뉴 지방에서 만들어진 발포성 와인만 샴페인이라는 의미겠지. 그래도 돔 페리뇽만 샴페인인 건 아니야."

그러자 주리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 샴페인 만드는 방법은 상파뉴 지방의 오빌레 수도원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비법이었대. 그게 그 지방 전체에 퍼졌던 거고. 그리고 그 비법을 발견한 건 수도원의 술 창고 담당이었던 돔 페리뇽이란 사람. 그래서 돔 페리뇽이야말로 진짜 샴페인이라고 하시던데."


그럴듯한 작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이제부터다. 그러나 나는 오래간만에 흥분하고 있었다.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게임을 만난 느낌이 든다.


"잘 들어. 범죄자가 왜 경찰에게 잡히는 줄 알아? 모두 자신이 남긴 흔적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야. 어디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왔는지 기억해두지 않으면 경찰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다고."


그러자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사건이 끝난 뒤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당연하지. 최종적인 형태를 그려보지 않고 어떻게 거기에 이르는 계획을 세울 수 있겠어?"


"어제는 별로 아무하고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막연하게 말하지 마.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


"청춘이라."

그 단어를 서른이 넘은 남자가 입에 담으면 우중충하게 느껴지는데, 젊은 여자의 입에서 나오니 신선하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거짓 유괴가 들통나는 건 범인들이 가상이 아닌 실제 유괴 상황을 이미지화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 결과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해서 들통이 나버리는 거지. 내가 무엇 때문에 네가 집을 나오기 전에 있었던 일까지 꼬치꼬치 물었다고 생각해?"


5 지그소 퍼즐

"유괴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범인들이 대게 전화를 걸잖아."

"그러면 큰 부담을 안게 되지. 위치를 추적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범인의 목소리, 성문, 단어의 특징,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 그런 것들이 모두 경찰에게는 중요한 실마리야. 그런 서툰 짓을 하면 애당초 완전범죄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고."


"그거야 모르지. 난 낙관주의자가 아니라 절반의 확률에 도박을 거는 짓은 하지 않아."


인터넷이라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소시민들이 유치하면서도 친절한 문장들을 올려대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는 흉악하고 음험한 말들을 쏟아내기도 하니 골치다.


10분만 줄 생각이었다. 그 이상을 생각할 시간을 줘봐야 소용없다.


6 청춘의 가면

아르마니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유괴범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범죄라는 게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돈을 노린 범죄는 회사에서 하는 일과 똑같다. 법망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궁리하는 대신 경찰의 수사망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협박도 거래와 다를 게 없다. 아니, 고집스러운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상담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편한 일이다.


나는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별로 흥미 없는 듯이 게임을 바라보았지만 질문하는 내용은 날카롭고 정확했다. 어떤 의도로 게임을 만들었는가, 왜 팔릴 거라고 생각했는가, 자신의 감각에 의문을 품지는 않았는가. 그런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내가 소개하는 것은 '청춘의 가면'이라는 게임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생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한 인물의 탄생부터 관여할 수가 있다. 다만 어떤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는가는 컴퓨터가 결정한다. 플레이어가 처음에 선택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느냐 하는 것이고, 남자로 태어날지 여자로 태어날지를 결정한다. 태어난 뒤에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로 올라가는데 그때 무엇을 얼마나 공부하고 어떤 친구와 얼마나 노는가도 선택해야 한다. 장래를 위해 공부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면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 게임의 가장 큰 재미는 인생 경험에 의해 캐릭터의 얼굴이 미묘하게 바뀌어간다는 점이다.

"관상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가쓰라기 가쓰토시에게 설명했다.

얼굴이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이나 그때까지의 경험을 나타낸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컴퓨터에 입력해 평균화하면 그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얼굴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정치가의 얼굴, 은행원의 얼굴, 유흥업소 아가씨의 얼굴,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얼굴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걸어온 길에 따라 얼굴이 결정되는 거죠. 이 게임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인생 경험을 쌓아 최종적으로 어떤 얼굴을 얻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문제는 얼굴이 아니겠지."

가쓰라기 가쓰토시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얼굴은 결과에 불과하네. 사람은 얼굴을 얻기 위해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생략) 맞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에 있어서 얼굴은 중요합니다. 여러 갈림길에서 얼굴은 그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면 취직 시험의 면접 같은 경우입니다. 맞선을 보는 자리도 마찬가지고요. (중략) 이 게임에서는 그때까지의 인생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얼굴로 몇 가지 갈림길에 도전하게 됩니다. 사람들과 사귀지 않고 공부벌레로 인생을 보내온 사람의 얼굴에는 정신적인 왜곡이 나타납니다. 그런 사람은 첫인상이 나쁘고, 당연히 면접이나 맞선을 보는 자리 같은 데서 불리해집니다.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라. 이건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발상이군. 경험이 얼굴을 만들고, 그 얼굴이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일지도 모르지."


"자네, 한 가지 묻고 싶은데."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자네 얼굴에 책임을 지고 있는 건가?"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7 부재중 메시지

"괜찮을 거야. 비교적 꼼꼼한 아이는 아니어서 시간의 모순 같은 건 눈치채지 못할 거야."

그녀의 말일 끝나기도 전에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 게임을 완벽하게 풀어가고 싶어. 괜찮을 거라는 애매한 말을 믿고 계속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8 스톡홀름 증후군

도쿄에 살다 보면 차를 쓸 일이 거의 없다. 여자와 만날 때도 거의 끌고 나가지 않는다. 식사할 때 곁들이는 알코올의 유혹을 참아가면서까지 교통 정체뿐인 드라이브를 즐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차는 MR-S다. 덮개를 접어 넣고 오픈카로 몰아야 비로소 제맛이 나는 차다.


"세 명 이상 탈 필요가 없으니까. 남자와 드라이브하는 취미는 없고, 함께 탈 여자는 한 사람으로 족하거든."


차 안에서 주리를 기다리려 했는데 스프레이 흔적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새 차나 마찬가지인 MR-S인데 갑자기 애정이 식었다.


"세상에는 돈보다 가치 있는 것들이 존재해. 내 생각에 그건 사람의 마음과 시간이야.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고, 잃어버린 시간을 돈으로 사들일 수도 없어. 그래서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돈을 아끼지 않아."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오갔다. 그 가운데는 나 편할 대로 해석한 것도 적지 않다.


"스톡홀름 증후군."

내가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물으려는 듯이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주리가 지금까지 보여준 적이 없는 어린 소녀의 표정이었다.

"테러리스트와 인질이 오랜 시간 함께 있다 보면 그들 사이에 연대감 같은 게 싹트게 된대. 어느 쪽이든 사태가 빨리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은 같으니까. 그런 심리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 007 영화에서 그러더군."


11 플래시 카드

"글쎄. 난 왜 다들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걸까, 그게 오히려 궁금한걸. 어차피 언젠가는 질릴 상대와 평생 함께 살겠다는 약속 따위 할 수가 없어."

"그래도 그 사람만은 당신 곁에 있어줄 텐데. 예를 들어 당신이 아무리 추한 할배가 돼도 외톨이는 아니지."

"그 대신 상대가 아무리 추한 할망구가 되더라도 곁에 있어줘야 하잖아. 그리고 사람이란 언젠가는 외톨이가 되게 마련이야. 결혼하나 하지 않으나 마찬가지지."

"그래서 아이를 낳는 거 아니야? 배우자는 떠나도 가족은 남잖아."


"나한테도 부모는 있어. 그렇지만 이렇게 혼자 살지. 연락도 몇 년째 하지 ㅇ낳고, 그런 자식도 부모에게 가족일까?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같이 살지 않아도 어딘가 있다는 건 알아. 그것만으로도 부모는 기쁘지 않을까?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거울지도 몰라."

나는 커피를 입에 머금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뭐가 우습냐는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은 어디 계셔?"

"요코하마. 모토마치 근처야."

"좋은 곳이네."

"여자애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군. 그렇지만 태어나 자라는 것과 애인과 팔짱을 끼고 걷는 건 이야기가 달라."


특히 외숙모 같은 경우는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까 번거롭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애쓰는 건 느껴지더군. 그렇지만 가만히 관찰해 보니 겉으로 드러난 얼굴과 그 안의 얼굴이 따로 있는 건 우리에 대해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힘들 거야 없지. 조금 갈팡질팡했지만 그 내막을 알고 나니 간단하던걸. 말하자면 룰이 있다는 걸 눈치챈 거지. 그 룰을 지키면 어려울 게 전혀 없어."

"룰?"

"누구나 그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 그 가면을 벗기려고 해서는 안 돼. 누군가의 행위에 일희일비한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지. 어차피 가면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나도 가면을 쓰기로 했어."

"어떤 가면?"

"한마디로 말하면, 그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가면.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기대하는 가면이 되겠지.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우등생을 연기한 건 아니야. 어렸을 때는 개구쟁이 가면을 쓰고, 조금 지나서는 반항기의 가면을 썼어. 그 뒤에는 사춘기의 가면, 장래를 고민하는 청년의 가면. 어쨌든 어른들이 익숙해지기 쉬워야 한다는 게 포인트야."


"대단한 건 아니야. 게다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편할 때가 많아. 누가 무슨 소릴 해도 상대는 가면에 말을 걸고 있을 뿐이지. 나는 그 가면 아래서 혀를 날름 내밀면 돼. 그러면서 다음에는 어떤 가면을 쓰면 상대가 기뻐할까 생각하는 거지. 인간관계란 원래 번거로운 거야. 그렇지만 이 방법을 쓰면 아무것도 아니지."

"줄곧 그렇게 살아왔어?"

"줄곧 그래왔지."

주리는 포크를 놓고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왠지 슬프네."


나에 관한 이야기는 이상이야,라고 마무리를 지었다. 주리도 그 이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옛날이야기를 길게 해 버린 것에 대해 나는 약간 후회했다.


12 작전 개시

나는 그녀의 말을 막듯이 한 손을 들고, 내친김에 스테레오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CD 플레이어를 틀자 '오페라의 유령'이 중간 부분부터 흘러나왔다. 나는 이 뮤지컬이 좋아서 몇 번이나 보았다. 추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인간 이상의 뭔가가 되어보려고 애쓰는 슬픈 남자의 이야기다.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이 남자만이 아니다. 이것이 뮤지컬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상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동정심에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나기 이전에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내가 어느새 이런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14 소용돌이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때, 또는 화장실에 갔다 나올 때 무슨 소리를 듣지 않았느냐고 경찰이 물을 거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눈가리개를 한 사람의 청각은 보통 때보다 훨씬 예민해져.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건 오히려 의심받을 염려가 있어. 무슨 소리든 들은 걸로 하는 게 나아."


17 행방불명

아무리 생각해도 유키 건이 꾸며낸 이야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면 맨션에 대해 내게 거짓말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은 이 부근에서 맴돌았다. 목적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이쪽 촬영이 끝날 무렵, 인터뷰도 끝난 모양이다. 프로골퍼를 현관까지 배웅한 뒤 라이터와 내용에 관해 논의했다. 라이터는 머리가 긴 풋내기였다. 조금 이야기를 해보니 핀트가 어긋난 원고를 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지 꼼꼼하게 지시했다. 라이터는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자신의 글재주나 어필하려는 문장은 쓸모가 없다.


야마모토는 자기가 입에 담은 이야기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한 표정으로 운전을 계속했다. 화보 촬영 전에 듣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에 들었다면 일은커녕 그 무능한 라이터에게 문제점을 지적하는 냉정함도 잃었을 것이다.

야마모토가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주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18 진실과 거짓

술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무 데도 들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섣불리 취했다가는 쓸데없이 실언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밤은 내 마음을 제대로 컨트롤할 자신이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버번 병을 꺼내 스트레이트로 마시기 시작했다. 심장고동은 여전히 크게 흐트러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 때문일까? 그렇다면 아무리 마셔대도 가라앉지 않을지도 모른다.


버번을 아무리 마셔도 취기가 전혀 오르지 않았다. 그저 맥박만 빨라질 뿐이었다. 불안정한 마음이 더더욱 흔들릴 뿐이었다.


그녀에게 들었던 이런저런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 이야기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거짓말이었을까? 혹시 전부 거짓이었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그것을 판단할 수가 없다.


20 악몽

지금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지그소 퍼즐 조각이 내 머릿속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아직 불완전한 부분도 많지만 대략적인 윤곽은 볼 수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땀이 흘렀다. 식은땀이었다. 푹푹 찌는 날이다. 그런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퍼즐이 완성된 모습을 상상하며 말할 수 없는 초조함에 휩싸였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면 일단 퍼즐을 허물고, 어떻게든 다른 모양으로 짜 맞춰보려고 했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완성된 그림은 같았다. 내 추리에 잘못이 없다는 전제가 따라붙겠지만.


21 히든카드

"직감적으로 당신의 플랜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 아빠가 그랬어. 그런 승부 때 직감력과 결단력이 있느냐 없느냐로 성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는 거라고."


"뭐, 회사 경영에 비하면 대단한 일도 아니지. 이번에는 자네 한 명만 속이면 됐지만, 기업의 수뇌부에 있다 보면 무수히 많은 사람을 속여야만 하거든. 고용이라든가 소비자라든가."


"(생략) 자신이 세운 완벽한 계획이 도리어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는 꼴로 역이용된다면 누구나 불안해질 테지. 바로 그 때문에 자네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프로텍트를 걸어두었어. (후략)"


나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반론을 제기할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다.


"그때는 그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게 바로 뛰어난 사람이라는 얘기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보완할 재료를 손에 넣는 것. 그런 감각은 누가 가르쳐준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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