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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라이 Never Lie

프리다 맥파든

by Dianosaur
프롤로그 | 에이드리엔 헤일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때마다 드러나는 특유의 징후가 있다. 거짓말이 서툰 사람일수록 더욱 뚜렷한 징후가 나타난다. 나는 숙련된 정신과 의사이자 임상심리사고, 그런 징후들에 너무나 익숙하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렇다.

몸을 가만히 못 둔다.

목소리 톤이나 말투가 바뀐다.

불필요한 정보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아무리 성능 좋은 거짓말 탐지기도 오차율이 25퍼센트에 달하지만 내 눈은 거의 정확하다. 내 앞에 앉은 인물의 표정, 몸짓, 목소리의 높낮이를 통해 나는 진실을 포착해 낼 수 있다.

예외 없이 언제나.

적어도 나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3장. 에이드리엔 - 과거

"에이드리엔!" 페이지가 나를 보며 활짝 웃는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잘 지냈냐는 말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가장 무의미한 질문이다. "네, 잘 지냈어요."


지난 5년간 내 저작권 대리인으로서 페이지는 나름대로 자기 일을 잘해왔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존중이 심하게 부족했다. 페이지는 내 환자들을 모두 '정신병자'로 폄훼했다. 내 집과 내 생활 방식에 대한 배려도 부족했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제넘게 내 원고를 혹평하기도 했다. 일 처리는 깔끔한 편이라 어느 정도 모욕을 감수해 왔으나 이제 더는 참기 힘들다. 페이지는 이미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훌쩍 넘었다.


4장. 트리샤 - 현재

이선이 조리대에 식빵과 볼로냐소시지, 마요네즈를 꺼내놓고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선은 나를 위해 요리하길 좋아한다. 샌드위치 정도는 나도 만들 수 있지만 이선이 나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6장. 에이드리엔 - 과거

페이지가 그동안 나를 친구로 여겼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페이지는 그동안 내가 창출한 수익금의 15%를 꼬박꼬박 자기 몫으로 챙겼다.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돈을 받는 대가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라서 좋은 점이 있다면 감정 소모를 하면서 원하지 않는 사람과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책을 출간하는 데 필요한 저작권 계약은 페이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간단하게 답장을 썼다.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인류의 조상들은 무리에서 배척되는 걸 가장 두려워했다. 야생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건 사형선고와 다름없었으니까. 회사에서 해고되거나 일방적인 계약 해지를 당할 때 인간의 뇌는 신체적인 고통을 느낄 때와 비슷한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집에서 상담 치료를 시작한 이래 나는 모든 상담 내용을 녹음해오고 있다. 대부분 환자에게 미리 허락받고 녹음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수기 메모보다 좀 더 확실한 근거를 남겨두기 위해서다. 녹음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상담 치료 내용을 복기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언젠가 은퇴해서 회고록을 집필할 때도 참고할 계획이다.


첫 번째 상담에서 나는 EJ가 자기애성 인격 장애라는 진단을 내렸다. 본인의 능력과 업적을 과장하고, 타인으로부터 존경받길 갈망하고,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자기애성 인격 장애의 특징이다.


나는 EJ를 도울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도무지 자신의 단점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을뿐더러 변화하고자 하는 욕구가 전혀 없었다.


8장. 트리샤 - 현재

이선은 이제 막 발을 뗀 스타트업 회사의 CEO다. 언젠가 이선이 일을 그르친 직원과 통화하는 소리를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다. 나에게는 늘 다정한 이선이 휴대폰에 대고 불같이 화를 내며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내 남편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아직 만난 지 일 년 남짓이니 내가 모르는 면모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16장. 에이드리엔 - 과거

내가 무료 클리닉에 기부한 돈의 일부는 의료 기록을 디지털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문서를 수기로 작성하다 보면 간혹 인적 오류로 환자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사님한테 마음이 있나 봐요."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한다. 루크가 나에게 호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라면 달갑지 않다. 그가 나에게 커피를 타 주고, 컴퓨터로 작성한 처방전을 약국에 전송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이상으로 우리 관계가 진전되길 바라지 않는다.


20장. 에이드리엔 - 과거

답장을 입력하는 손가락이 덜덜 떨린다. 나는 짧은 한마디를 몇 번이나 고쳐 쓴다.


EJ가 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내가 그에 대해 더 잘 안다고 되뇌며 불안한 마음을 다스린다. 나는 그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안다. EJ는 약삭빠르고 영악하지만 충동적이기도 하다. 허점을 노리면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제법 미남이지만 키가 좀 작은 편이라 나폴레옹 콤플렉스가 있다.


21장. 녹음본

"일은 생계 수단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재능이나 적성을 발휘할 기회이기도 하죠. 자기 능력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도 있고요."


"내가 상상하는 판타지가 뭔지 들어보실래요?"

"그런 얘기는 그만하죠. 지금 우리는 당신의 삶을 정상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이 자리에 마주 앉아있는 거예요."

"어차피 나를 위해 주어진 시간이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죠?"

"상담 치료라는 목적에 충실하자는 뜻입니다. 나한테 도움을 받고 싶다면서요."


23장. 에이드리엔 - 과거

솔직히 루크가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도 그리 지루할 것 같지는 않다. 인정하기 싫지만 루크가 공구함을 뒤적거리는 모습이 꽤 매력적으로 보인다. 나는 남자와 데이트한 지 제법 오래되었다. 관계를 이어갈 만한 남자가 워낙 드무니까. 대다수 여자들처럼 욕구불만에는 이미 면역이 된 줄 알았는데, 지금 루크를 보고 있자니 아직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책이 출간되면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하겠지만 당장은 책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어 입이 근질근질한 참이었다.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거절하고 싶지도 않은 기색이다. 오늘 그는 나를 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성품은 좋은 사람이지만 순수한 호의만은 아니었을 테다. "좋아요. 한번 체험해 보죠."


24장. 녹음본

"농담 아니에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소중한 저녁 시간을 포기했잖아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요."

"내가 보안시스템을 설치해주지 않아서 외딴곳에 혼자 사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합니까."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지만, 나는 그냥 기회주의자일지도 몰라요."


"그 여자는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글쎄요. 지난주까지만 해도 별로 관심 없어 보였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워낙 속을 읽기 어려운 분이라서."


25장. 에이드리엔 - 과거

나는 평생 남자와 육체적 교감을 나누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믿었는데, 루크가 나에게 키스한 순간 내가 그동안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안달이 나도록 그의 몸을 원했다. 루크가 날 배려해 속도를 늦추려 하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더 적극적인 몸짓으로 이끌었다.


이제 나는 알몸으로 루크의 팔베개를 베고 누워 어떻게 하면 그를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인데 그는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섹스는 좋았지만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싶지는 않다. 나는 잠을 잘 때 누군가 옆에서 몸을 뒤척이거나 코를 골거나 몸을 껴안는 걸 싫어한다. 잠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편하게 자고 싶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는 편안하고 털털한 스타일이다. 다만 내가 그런 기질을 계속 좋아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방금 자기 입으로 꺼낸 말이 후회되는 듯 잠시 망설인다. 그도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징후가 있을 텐데 아직 찾지 못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린다. "이 집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내가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말하죠. 내가 결혼에 관심 없다고 하면 못마땅해하고요.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걸 그냥 못 두고 보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가 별안간 루크가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왜 웃어요?"

루크가 웃도록 삐져나온 눈물을 닦는다. "당장 이 집에서 날 내쫓고 싶은데 적당한 말을 찾느라 고민만 하고 있죠?"

나는 가운을 여미며 팔짱을 낀다. "그냥 혼자 자는 게 익숙해서요. 당신도 혼자 편하게 자고 싶지 않나요?"


28장. 에이드리엔 - 과거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어떤 남자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들은 적은 몇 번 있다. 통계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빨리 사랑을 고백한다. 나는 환자들에게도 진심이 아니면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나도 말한 적 없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느낀 적이 없으니까.


루크는 감정을 차단한 듯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 후 상담을 받은 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할 뿐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한편으론 그가 말을 아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랬다면 나도 돌아가신 부모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루크 앞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별로 못 받고 자랐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고 싶지 않다.


나랑 같이 살고 싶다는 뜻인가? 요즘 루크와 이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나는 한 번도 그와 같이 살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만약 동거하게 되면 그는 매일 여기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큰 집이 갑자기 아주 좁게 느껴진다.


30장. 트리샤 - 현재

이선은 내 가족을 모두 만나봤다. 심지어 99세의 고령인 베르타 고모할머니도 우리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나는 그의 가족을 아무도 못 만나봤다. 단 한 사람도. 내 배우자의 뿌리가 궁금한 게 그렇게 잘못된 걸까? 내 아이의 아빠가 될 사람인데. 우리 사이에 비밀이 존재한다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23장. 에이드리엔 - 과거

루크의 품에 안겨 누워있는 동안에도 EJ에게 써준 처방전 생각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루크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질 줄 알았다. 루크는 내가 기분이 착 가라앉아있을 때도 날 웃게 하는 재주가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 밤은 소용이 없다.


루크는 벽난로 위에 걸린 내 거대한 초상화를 보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그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환자의 성의를 생각해서 건 것이었다. 그 환자가 공유한 경험은 내 새 책의 근간이 되었다. 이제 많이 나아졌으니 곧 상담 치료를 종료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 크지 않던가요?" 내가 묻는다.

"당신이 워낙 큰 사람이니까."

"다행이네요."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관자놀이를 문지른다. 고민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가 결국 내 부탁을 들어주리란 걸 안다. 이제껏 한 번도 거절한 적 없는 사람이니까. 나도 루크를 좋아하지만 아직은 날 향한 그의 마음이 더 크다.


뭔가를 부탁하는 시점에야 그 말을 되돌려주다니 내가 생각해도 비열하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진심으로. 그 말을 하는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이다.

그런데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 말이 통할 줄은 몰랐다. 루크의 표정이 누그러지고 경계의 빛이 옅어진다.

그가 내 손을 꽉 쥔다. "알았어요. 해볼게요."


34장. 에이드리엔 - 과거

예일대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이 실시했던 악명 높은 실험이 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권위에 복종하는지 측정한 실험이다. 피실험자들을 교사 역할과 학생 역할로 나누고, 교사에게는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전기 충격을 가하도록 했다.

학생 역할을 맡은 피실험자들은 모두 연기자였고 전기 충격 장치도 가짜였다. 전압계 눈금이 300 볼트를 가리키자 학생들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실험을 중단해 달라고 애원했으나 감독관은 교사들에게 계속 전압을 높이라고 지시했다. 교사들은 불편해하면서도 절반 이상이 450 볼트까지 전압을 높였다. 실제 상황이었다면 치명적인 수준이었다.

권위에 대한 복종 심리를 설명하는 실험이었다. 대량 학살을 저지른 나치의 구성원들도 결국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충분한 압력을 가하면 부도덕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루크도 마찬가지다.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그를 와락 끌어안는다. 루크도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저 뻣뻣한 자세로 안겨 있다.


나는 꺼진 화면을 바라본다. 속이 울렁거린다. 루크는 확실히 기분이 상한 말투였다. 그 몹쓸 영상을 봤을 수도 있고, 자신에게 범법행위를 하게 한 나에게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다.

EJ를 내 인생에서 몰아내기 위해 한 일 때문에 루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른다. 루크를 잃고 싶지 않다. 달리 선택지가 없었으니 루크에게 이 일을 부탁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와 헤어지기는 싫다. 그가 내 침실 서랍 한 칸을 비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더 많은 서랍을 그에게 내주고 싶다.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운다. 루크가 매일 밤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내 남은 인생을 그와 함께하고 싶다.

이번 일로 그를 잃고 싶지 않다.


35장. 트리샤 - 현재

이선은 이 집에 홀딱 반했지만 나는 이 집에서 살아갈 엄두가 안 난다. 그를 사랑하지만, 여기서 살 만큼 깊이 사랑하는지 확신이 안 간다.


36장. 에이드리엔 - 과거

루크가 주먹을 불끈 쥔다. "믿기 힘드네요. 겨우 주차 자리를 빼앗겼다고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대화를 이어가는 게 고통스럽다. 나는 직업상 타인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주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경력을 통틀어 이렇게 곤란한 상황은 처음이다. 차라리 입을 다물어버리는 게 나을 텐데, 나도 모르게 불쑥 내뱉고 만다. "이제 나한테 정이 떨어졌나요?"


루크가 한숨을 길게 내쉰다. "실망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왜 그 영상을 지우고 싶었는지 이해는 가요. 내가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고요. 또..." 루크가 허탈하게 웃는다. "마냥 완벽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당신한테도 그런 허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그리 싫지만은 않네요."

"난 완벽하지 않아요. 오히려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죠."


"사랑해요."

루크가 나를 돌아본다. 내가 손을 내밀자 루크가 손을 포갠다. 태도가 약간 건성이지만, 오늘 하루 그가 나를 위해 해준 일을 생각하면 섭섭해할 수 없다.

"나도 사랑해요."


38장. 에이드리엔 - 과거

나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루크를 힐끔 본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루크, 이쪽은 내 환자 게일이에요. 게일, 이쪽은 루크예요. 내... 남자친구요."

루크는 빙그레 웃고 게일도 즐거워하는 눈치지만 나는 '남자친구'라는 표현이 멋쩍게 느껴진다.

내가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묻는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원하는 게 뭐야?

화면을 응시하자 곧 답장이 뜬다.

오늘 밤에 만나서 얘기하죠.

내가 앓던 이를 뽑으려다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


39장. 에이드리엔

나르시시스트가 대부분 그렇듯이 EJ도 마음만 머그면 얼마든지 매력적인 인상을 줄 수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에게 호감을 느끼다가 점점 본색을 알고 멀어지지만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EJ가 싫었다.


42장. 트리샤 - 현재

이선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루크를 향해 칼을 흔들어 보인다. "소파에 누워, 당장."

남편이 능수능란하게 상황을 주도하는 모습에 살짝 소름이 돋는다. 몹시 긴장되는 상황인데 이선은 여유가 넘쳐 보인다.


47장. 에이드리엔 - 과거

우리 트리샤는 어쩜 그렇게 불운할까요?

아마 로튼 부인은 딸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들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순진한 사람은 아니니까 딸의 본성을 어느 정도 짐작했으리라. 하지만 부정은 강력한 방어기제다. 지난 일화들을 털어놓으며 나에게 딸을 부탁하는 로튼 부인의 목소리에서 모종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차에 오른 EJ는 카지노에서 패트리샤가 권한 술을 마신 탓에 깊은 잠에 빠졌고, 이내 의식을 잃었다. 농담이 아니라 EJ는 이제 여자가 권하는 술을 한 번쯤 의심할 필요가 있다. 이미 늦었지만.


패트리샤를 돌려보내고 나는 현관문을 잠근다. 이제 패트리샤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부탁을 할 생각도 없다. 겉으로는 사근사근하게 굴지만 실상은 매우 위험한 인간이니까.


48장. 트리샤 - 과거

에이드리엔 헤일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 그 강렬한 녹색 눈동자에는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헤일 박사는 마음만 먹으면 정신 조작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 같았다.


49장. 에이드리엔 - 과거

나는 루크와 이렇게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싫다. 한때 내 집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와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구는 게 싫다.


긴장이 풀린 듯 루크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솔직히 몇 달 동안 당신을 잊으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어요. 내 잘못을 곱씹느라 밤에 잠도 잘 못 잤어요."

"수면제 좀 처방해 줄까요?"

나에게 다가온 루크가 내 손을 잡는다. 이 온기와 느낌이 너무나 그리웠다.

루크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오늘 밤에 나랑 저녁을 먹어주는 게 효과가 더 좋을 거 같은데요."


53장. 트리샤 - 현재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나서 이선에게 각별한 관심이 생겼다. 잘생긴 건 둘째 치고, 나랑 결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도 나처럼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남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54장

그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든다. "트리샤,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한 번도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줄 몰랐는데, 당신을 만나서 깨달았어. 이 사람과 평생 함께하고 싶다고."


이선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모든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순간 나와 잡고 있던 손을 떼고 팔짱을 끼지만 내 말을 중간에 끊지는 않는다. 문득 너무 많은 비밀을 털어놓았나 싶은 생각에 두려워진다. 이선은 어머니를 죽였다고 고백했지만 나는 무려 네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죄의 경중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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