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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Journal de deuil

롤랑 바르트

by Dianosaur
1977. 10. 26.

결혼의 첫날밤.

그러나 애도의 첫날밤인가?


10. 27.

- SS: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아줄게요. 당신에게 휴식을 주겠어요.


- RH: 지난 반년 동안 당신은 완전히 지쳐 있었어요. 슬픔, 우울, 일 등등으로. 당신도 그걸 알고 있죠. 하지만 당신은 말을 안 하죠, 늘 그랬듯이.


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위안들.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나를 무엇으로부터 낫게 하려는 걸까? 어떤 상태로, 어떤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아마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다(어쩐지 그런 것 같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하지만 한 사람이 직접 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이 우습고도 말도 안 되는 시도).


10. 30.

... 그녀는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은 채로 살아 있다. 이 사실은 무얼 말하는 걸까. 그건 내가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 미친 것처럼, 정신이 다 나가버릴 정도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건, 그 불안으로부터 한 발짝도 비켜날 수 없는 건 바로 그 때문이리라.


10. 31.

월요일 오후 3시 - 처음으로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나는 이 집에서 완전히 혼자 살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러자 동시에 분명해진 사실: 이곳을 대신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


나의 어떤 부분은 절망으로 잠들 줄 모른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나의 또 다른 부분은 생각을 하면서 끊임없이 하잘것없는 일들을 정리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건 병이라는 느낌.


때로, 아주 잠깐 동안, 넋이 나간다 - 마치 순간적인 무감각 상태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망각의 상태는 또 아니다. 이런 일이 나를 경악케 한다.


11. 1.

기분이 즐거워진 '방심' 상태들이 있다. 물론 정신은 여전히 말짱하지만. 그럴 때 나는 얘기를 하고, 어느 때는 농담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감정 상태에 빠진다. 눈물 흘리고 말 정도로.


그 의미를 결정할 수 없는 어떤 상태에 대하여: 한편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여성적인('표피적인') 감수성, 그러니까 '거짓 없는' 고통의 적나라한 이미지에 빠져드는 그런 감수성을 멀리하고 있다고. 그렇다고 느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다른 한편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밑바닥까지 절망에 빠져서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울적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자주 더는 그렇게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 '허물어지고' 만다.


11. 4.

오늘 오후 다섯 시경. 모든 것이 서서히 질서를 회복한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건조한 외로움. 그 끝에 나 자신의 죽음.


목 안에 덩어리.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며 서둘러 차를 끓이고, 편지를 마지막까지 쓰고, 물건을 치운다. 마치 집 안을 새로 정리해서 이제는 '나' 혼자 살기에 편안한 집으로 만들려는 것처럼(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건 결국 나의 절망감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내가 이제 글쓰기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11. 6.

(어제) 내가 분명히 깨달은 것: 그사이 내가 했던 일들은 다 쓸데없는 짓들이다(집 정리하기, 그 안에서 편안해하기, 친구들과 잡담하기, 그 와중에 때로 함께 웃기, 이런저런 계획 만들기 등).

내 슬픔은 삶을 새로 꾸미지 못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내 슬픔은 사랑의 끈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사랑의 단어들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아주 자명해진 내 슬픔의 이유...


11. 10.

이 당혹스러운 부재의 추상성, 그런데도 그 추상성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비로소 추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추상은 부재이면서 고통이다. 그러니까 부재의 고통. 그런데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닐까?


슬픔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 그러자 뒤따르는 일말의 죄의식. 때로 스스로 생각한다, 나의 지나친 슬픔은 결국 너무 예민한 나의 감수성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평생 그렇지 않았던가: 항상 너무 지나치리만큼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던가?


11. 11.

외로움=대화를 나눌 사람이 집에 없다는 것. 몇 시쯤에 돌아오겠노라고, 또는 (전화로) 지금 집에 와 있어요,라고 말할 사람이 더는 없다는 것.


11. 19.

파리에서 튀니지까지 여행. 계속되는 비행기들의 정체. 라마단의 마지막 축제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튀니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항들에서 한없이 기다리기. 그런데 왜 그런 교통 정체의 날들은 슬픔에 잘 어울리는 걸까?


11. 21.

한편으로는 별 어려움 없이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이런저런 일에 관여를 하고, 그런 내 모습을 관찰하면서 전처럼 살아가는 나. 다른 한편으로는 갑자기 아프게 찌르고 들어오는 슬픔. 이 둘 사이의 고통스러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아서 더 고통스러운) 파열 속에 나는 늘 머물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괴로움이 있다. 나는 아직도 '더 많이 망가져 있지 못하다'라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괴로움. 나의 괴로움은 그러니까 이 편견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11. 24.

내가 놀라면서 발견하는 것 - 그러니까 나의 걱정 근심(나의 불쾌함)은 결핍이 아니라 상처 때문이라는 사실. 나의 슬픔은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나는 모자라는 게 없다, 내 생활은 전처럼 아무 문제가 없다), 그 무엇이 상처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상처는 사랑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라는 것.


11. 29.

'애도'

(AC에게 설명하는 나의 슬픔)

줄어들지 않는 것, 소멸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시간에 굴복하지 않는 것. 카오스적인 것, 종잡을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순간들(슬픔의 순간/생에 대한 사랑의 순간), 그것이 일어났던 그 순간처럼 지금 여기에서도 똑같이 생생한 순간들.


주체는(이 주체는 바로 나다) 현존하는 것이지 현재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현존하는 주체는 정신분석학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19세기의 산물이다. 즉 시간의 철학,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들은 자리가 바뀌고 변형이 된다는 철학, 즉 모든 것은 치료가 된다는 철학; 유기체론


케이지 Cage를 참조할 것.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 John Cage에 대한 연구들에서 '현존'은 핵심 개념이다. 대화집 For the Birds에 수록된 케이지와 대니얼 찰스의 대화를 참조할 것. 이 대화집의 프랑스어판인 Pour les oiseaux(Belfond, 1976)가 바르트의 서가에 꽂혀 있었다.


11. 30.

우울의 '순간'에 나는 매번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슬픔을 실현하고 있다, 고.

다시 말해서: 애도의 온전한 강렬함 안에서


12. 7.

때때로, 지금처럼 갑자기, 마치 거품이 터져버리듯이, 내 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확증이 있다: 그녀는 이제 없다, 그녀는 이제 없다,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사막 같은 확증, 그 어떤 형용사도 가능하지 않은 확증 - 아무런 의미도 지나지 않는, 그래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확증(그 어떤 의미 분석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건 새로운 고통이다.


1978. 2. 16.

오늘 아침에는 더 많은 눈, 그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독일 가곡들. 너무 삭막한 마음 - 어린 시절 병이 나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날들을 생각한다. 오전 내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던 날들.


1978. 2. 21.

[기관지염. 마망을 잃은 뒤에 생긴 첫 번째 병]


아침 내내 끝없이 마망 생각. 이런 우울은 싫다.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불변의 상태에 대한 혐오감.


1978. 3. 20.

이런 말이 있다(마담 팡제라가 내게 하는 말):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1978. 4. 12일경

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이렇게}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자기를 이겨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 고통을.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없는 그런 것.


'기념비'의 필연성.

Memento illam vixisse.

*그녀가 살아있었음을 기억하라.


1978. 4. 18. 마라케시 Marakech

마망을 잃은 뒤부터 나는 여행을 할 때면 늘 맛보았던 자유롭다는 인상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잠시 그녀의 곁에서 떠나 있다는 그 자유의 느낌).


1978. 4. 27. 카사블랑카

- 마망의 사망 뒤에 내가 생각했던 것: 이 모든 일은 결국 좋은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녀는 이제 더더욱 강력한 모범(본받아야 하는 존재)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나는 모든 속 좁은 마음의 이유인 (구속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내게 아무 상관이 없는 일들이 되지 않았는가? 이 아무래도 상관없음(나 자신에 대해서도)이 그 어떤 선함의 전제가 아닌가?].


- 그러나 괴롭게도 일들은 영 거꾸로 되어버렸다. 나는 여전히 허영의 행동들, 치졸한 악덕의 행동들을 그만두지 못하고, '나 좋으라고' 줄곧 외출을 하지만 어떤 사람과 진정 에로틱한 관계를 맺지도 못한다; 이제 내게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마저도. 그러면서 나는 - 이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지만 - '말라버린 가슴' - 아케디아 I'acedie를 스스로 감지한다.


1978. 5. 18.

마망의 죽음: 어쩌면 살아오면서 내가 처음으로 노이로제 없이 받아들였던 단 하나의 사건. 나의 애도는 히스테리적이 아니었고, 그래서 다른 이들은 나의 슬픔을 거의 알 수가 없었다(나의 슬픔을 연극적으로 '마음껏 드러내 보이는 일'이 내게는 역겨웠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좀 더 히스테리를 부리는 일이, 나의 우울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 세상을 거부하면서 사교적인 관계들을 모두 끊어버리는 일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명히 조금은 덜 불행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제 나는 안다, 노이로제를 안 갖는 일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옳은 일이 아니라는 걸.


1978. 6. 13.

애도의 슬픔을 (비참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려하지 말 것(가장 어리석은 건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이다), 그것들을 바꾸고 변형시킬 것, 즉 그것들을 정지 상태(정체, 막힘, 똑같은 것의 반복적인 회귀)에서 유동적인 상태로 유도해서 옮겨갈 것.


1978. 6. 16.

마망의 사진들을 오래 바라보는 일, 그 사진들에서 출발하는 글쓰기 작업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두려움을 나는 CI. M. 에게 털어놓는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마 아직은 너무 이른 모양이죠.


(물론 아주 좋은 의도들을 담고 있지만) 늘 똑같은 의견이 있다: 애도의 슬픔은 점점 익어가는 것이라는 생각(말하자면, 시간이 다 차면 저절로 떨어지는 과일처럼 혹은 스스로 터지는 종기처럼).


그러나 내 경우 애도의 슬픔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진행의 과정도 거기에는 없다: 때문에 너무 이른 애도의 슬픔 같은 것도 없다(예컨대 위르트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파리의 집을 새로 정리했었다: 이 일을 두고도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으리라: 너무 이르군요).


1978. 7. 18.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1978. 7. 31. 파리

내가 거주하는 곳은 나의 무거운 마음 안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행복하다.


무거운 마음 안에서 사는 걸 방해하는 모든 일을 견딜 수가 없다.


1978. 8. 3.

혼자 있음에 대한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게 분명한) 나의 욕구를 곰곰이 생각해 볼 것: 그런데 내게는 마찬가지로 (그에 못지않은) 친구들에 대한 욕구도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친구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자면, 나의 무기력과 싸워 이기자면, 나는 억지로라도 가끔씩 친구들을 '불러야 한다' - 무엇보다 전화를 걸어서;

2) 하지만 전화를 거는 일은 나에게 맡겨 달라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그들이 전보다 드물게, 전보다 덜 주기적으로 내게 소식을 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내가 그들에게 소식을 전해야 하는 신호가 되리라.


(1978. 8. 10.) 프루스트, <생트-뵈브>, 87쪽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유형,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으로 눈앞에 떠올리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유형, 그러니까 실제가 직접 우리에게 드러내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 나의 슬픔은 지극한 고통이나 외로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건 다만 추상적인 유형, 메타언어 안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그런 거들일 뿐이다. 나의 슬픔은 전혀 새로운 유형의 어떤 것이다.]


1978. 8. 18.

일상 속에 들어 있는 말없는 가치들과 함께 지내는 일(부엌, 거실, 옷들을 청결히 하고 늘 바르게 정리하기. 물건들 안에 들어 있는 과거와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일) -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내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다 -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비록 곁에 없어도, 나는 그녀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다.


1978. 11. 4.

이 애도의 메모들을 기록하는 일이 점점 드물어진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슬픔, 이 현상은 피할 수 없는 변화일까, 망각의 과정일까? ('병'이 지나가는 걸까?) 과연 그런 걸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울의 텅 빈 바다 위에 떠 있다 - 그 바다의 버려진 해안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풍경. 나는 더 글을 쓸 수가 없다.


1979. 3. 7.

왜 나는 어떤 작품들에는 진심으로 열중하지 못하는 걸까, 또 어떤 사람과는 어울릴 수가 없는 걸까(예컨대 JMV 같은 사람)? 그건 미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내 몸 안에 깊이 스며 있는 가치들은 모두가 마망으로부터 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랑했던 것, (사랑하지 않았던 것), 그것들이 나의 가치들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1979. 3. 15.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임무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 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 집요함, 은밀함.


'자연'

시골에서 나서 자란 것도 아니면서 그녀는 얼마나 '자연'을, 더 정확히 자연스러움을 사랑했었는지...

자연보호자의 제스처 같은 건 그녀에게 없었다. 그런 건 어머니 세대에게 어차피 낯선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녀는 어쩐지 돌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정원 같은 곳에서 아주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해설 - 바르트의 슬픔

번역이 끝났어도 여전히 번역이 안 된 채로 마음 안에 남아 있는 단어 하나가 있다. '슬픔'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애도 일기'라는 어두운 텍스트의 밤하늘에 저마다 다른 광도의 별들로 흩어져 빛나는 이 단어를 정확히 무엇이라고 옮겨야 했을까. 애도, 우울, 고통, 비참, 무거운 마음... 그런 번역어들은 저마다 상황에 따르는 의미를 지시해도 그 의미들은 모두가 어쩐지 모자라고 과녁을 빗나간다. 바르트라면 이 단어를 '부유하는 시니피앙' 또는 '환유의 시니피앙'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분명한 건 이 단어의 주인이 사랑을 잃어버린 주체, 사랑의 상실 때문에 고독해진 주체라는 사실이다. 사랑은 바르트에게 관계, 즉 '맺어져 있음'이다. 사랑의 상실은 그래서 이 맺어짐과 끊어짐이다. 맺어졌던 것이 끊어지고 나면 끊어진 자리가 남는다. 바르트는 이렇게 쓴다: "나의 슬픔이 놓여 있는 곳, 그곳은 다른 곳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랑의 관계가 찢어지고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1977.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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