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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 Jan 07. 2020

25평에서 8평으로

갑자기 미니멀라이프

우리는 결혼 후 4년째 25평 크기의 집에 살고 있었다.

서울 중심가는 아니었지만, 남편과 나의 출퇴근 편의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선택한 아파트였다. 저녁이면 걸어서 근처 쇼핑몰에서 데이트를 즐길 수도 있고, 아파트 뒷담을 나서면 한강으로 연결되는 개천을 따라 산책을 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한강 본류에 닿으려면 하루 3만보는 우습게 걷는다는 하정우씨만큼 걸어야 하겠지만)

길다면 긴 신혼을 3년으로 마무리 짓고 아이를 낳아 첫 6개월 삐약이 시절을 보낸 참 고마운 집이다.

'아이도 있으니, 이제 더 큰 집으로 가야지' 하는 생각도 잠시, 우리는 영하 5도의 겨울날, 8평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응? 갑작스러운 전개다)

손이 꽁꽁 얼어붙는 추위 속 이삿날 아침, 이제 막 기어다니기 시작한 아기를 친정에 맡기고 돌아오니, 이미 이삿짐 업체의 전문가분들이 숙련된 손길로 짐을 착착 싸고 있었다. (정말 그 많은 짐을 착착! 소리가 들릴듯 로봇처럼) 그렇게 한시간 반 남짓 지나자, 아침까지 있었던 '우리집'의 흔적은 싹 지워졌다.


생활의 온기가 멀끔하게 비워진 공간은 벌써 남의 집 같았다. 언젠가 들여다보고 싶을것 같아 괜히 핸드폰을 꺼내 마지막으로 집안을 돌아보며 찰칵찰칵 찍어댔다.

우리가 작은 집으로 가기 위해 비운 것들은 아래와 같다 -

- 3인용 소파

 (할머니가 아프시면서부터 가져다 썼던 커다란 가죽소파.

   쓸만큼 쓴데다 이사갈 집엔 도저히 안 들어간다)


- 세탁기

 (10년 된 통돌이. 결혼 남편이 쓰던 것을 가져다 썼었다)


- 4인용 테이블, 의자2

 (역시 결혼  남편이 쓰던 가격 착한 식탁. 어린 조카들의

   미술놀이 책상으로 재탄생)


- 서재에서 쓰던 커다란 거대한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   

  (의자는 부서져 비우고, 테이블은 친정으로)


- 장식장

  (역시 할머니댁 출신, 재활용업체 무료수거 의뢰)


- 5단 책꽂

  (안에 있던 남편의 애장품 CD/테이프/책은 중고 판매)


- 서재 전면 책장을 가득 채운 책 3분의 1

  (중고서점으로 몇 캐리어를 날랐는데 책은 정말 비우기    

    힘든 품목이다. 지금까지도 야금야금 손댈 수밖에 없는

    어려운 대상)


- 발마사지 기계, 스팀다리미, 청소기 등 소형가전과  새

    액자 등 잡동사니

  (멀쩡한 것들이기에 아름다운 가게 나눔)


- 베란다 창고 안의 수많은 제품 박스들

   (유모차 박스, 마사지기 박스 등 덩치 큰 박스들을

     언젠가를 위해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었다)

이사를 결정하고부터 조금씩 판매하거나 기증하고, 나머지는 이삿날 스티커를 붙여 내놓았다.
그간 그렇게 좁게 살지도 않았는데 무슨 짐이 이렇게나 많은지. 잘도 정리하며 살았구나-싶었다.

이로써 남긴 가구는


- 퀸사이즈 침대와 화장대
- 서재 전면책장
- 붙박이장 스타일의 옷장, 원목5단서랍, 2단 행거
- 2인용 식탁, 낮은TV장
- 가전은 TV와 냉장고, 밥솥, 전자렌지

   (세탁기는 9kg 미니사이즈 빌트인 되어있는 집)

리스트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제좀 보통의 집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많이 비웠지만, 여전히 있을 것 다 있는.

오후가 되어 이사가는 집에 짐 내리기를 시작했다.
여태 순조롭다고 생각했건만 짐을 내리는 것부터 문제였다.

앙증맞은 사이즈 덕에 손수 물걸레 이사청소를 마친 이 집에는 아파트 같은 베란다가 없다.

큰 방, 작은 방, 거실 겸 주방, 화장실, 끝.


때문에 안방 창문을 통해 짐을 내렸는데, 집 크기에 비해 가구들이 전부 크다보니 어디 한 켠에 쌓아둘 수도 없고,

배치도대로 이동하는것도 낮은 천장덕에 그야말로 '각이 안나오는' 상황.

형광등을 떼고, 움직일 수 있는 대로 눕히고 치우며 옷장과 책장을 겨우 넣고, 세우고, 조립했다. 서재 한쪽 벽을 채웠던 전면 책장은 짊어지고 왔으나 이 집엔 그만한 벽이 없다. 분리해서 거실과 방에 넣는 것으로.

이사가기 전에 들떠서 며칠을 고심해 그렸던
우리의 배치도대로 정리하시던 팀장님은

 '이대로는 도저히 아기 잘 곳이 마땅치 않다'며
덩치 큰 가구들을 이리저리 세번이나 재배치하며 새로운 레이아웃을 제안해주셨고,
정리의 달인인 부엌 담당 이모님은 주방 살림살이를 옮겨넣으며 '집이 좁아져 머리에 이고지고 살아야겠다'며,
'애기엄마, 그래도 다 살아진다'는 마음이 담긴 위로를 건넸다.


입김이 뿜어져나오는 추운 날

번듯한 아파트에서 골목길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이의 심정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새로운 집에서의 삶에 설렘이 더 컸던 나는 '오, 작은 집으로 옮기는데는 이런 어려움이 있군' 하며 커피와 간식을 사나르며 남일처럼 여유가 넘쳤다.

모두가 돌아가고 난 뒤,
빌려온 아기 쏘서며 걸음마 장난감, 국민 기저귀 트롤러, 젖병소독기 등 갈 곳 잃은 물건들로  발디딜 틈 없는 집안을 보자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건가... 하는 생각이 그제사 밀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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