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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 Jul 26. 2023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김규진


내가 다니는 회사는 굉장히 보수적이다. 미투 운동 이후부터는 다들 조심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아직도 짧은 치마를 입고 오면 눈총을 받는 곳이다. 얼마 전 점심 먹으러 나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60대 직원 분과 마주쳤는데 뜬금없이 김규진씨 얘기를 꺼내셨다. 아무리 저출산이라지만 레즈비언 커플이 임신을 하다니 말세라며... (아마도 나오기 직전에 포털 메인에 뜬 기사를 본 것 같다.) 평화로운 직장 생활을 위해서 바로 앞에서는 그러시냐며 적당히 넘겼는데 기분이 찜찜했다. 흔하지 않은 일이니 '놀랍다' 정도의 표현은 할 수 있겠지만 타인의 인생을 말세라고 평가해도 되는걸까. 어른들 세대는 그들만의 경험과 가치관이 있을테니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내 상식과는 다른건 확실하다. 


난 나 하나 케어하기도 벅차서 남의 인생을 들여다 볼 여력이 없다. 타인의 삶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치는 편이다. 김규진씨 얘기도 기사 제목정도 본게 전부였다. 그 직원분과 대화 후 오히려 궁금해져서 찾아봤다. 그러다 김규진씨가 쓴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TMI지만 사내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어서 바로 빌려서 읽었는데 보수적인 회사 분위기를 생각하면 동성애 관련 책이 있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책은 막힘없이 술술 읽혔다. 동성 결혼 과정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이었다. 가볍지 않은 주제이니 편하게 다가갈 수 있게 쉽게 쓰려는 저자의 노력도 있겠지만, 김규진씨와 또래여서 공유하는 문화가 비슷해서 잘 읽혔다. 책 중간중간 나이 언급한걸 감안하면 아마도 동갑이거나 한살정도 차이 나는 것 같았다.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을 빼면 해리포터와 함께 자란 세대, 취업과 결혼 고민 등 내 또래들이라면 공감할 이야기였다. 그래서 김규진씨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더 잘그려졌다. 밝고, 위트있고, 긍정적이고, 솔직하고, 당당하고, 구김없이 자랐을 것 같은 사람. 내가 부러워하는 '해맑음'을 가진 사람. 질투가 나도 그 해맑음때문에 미워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니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공개하고 앞장서서 부당함을 외칠 수 있겠지 싶었다.



대한민국은 다수가 아닌 소수로 살아가기 참 힘든 나라이다. 소수가 되면 피해본다는 사실을 익히 알기에 웬만하면 다수가 되고자 노력한다. 소수가 되어도 먼저 나서서 의견을 제시하지 않으려는 편이다. 오늘만 해도 출근길에 회사 건물 앞에서 노조원들이 피켓 시위를 하는데 시선을 자연스럽게 땅바닥으로 돌리고 빠르게 지나쳤다. 근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감사한 일이지만 나까지 굳이 나서서 피해보고 싶지 않았다. 도망자(?)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김규진씨같은 분들이 대단하다. 책에서 자신의 삶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작은 악들과 싸워간다는 표현했는데, 작든 크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의 선구자가 되었으니 박수 받을만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나에게 동성애는 역시 '남의 일'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들의 인생이니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 가족이나 지인 중에 누군가 커밍아웃을 하면 조금 놀라긴 하겠지만 그 또한 자기 인생이니 알아서 하겠지.. (부모 입장이 되면 생각이 좀 달라질까 싶긴 하다.) 동성 결혼도 마찬가지다. 굳이 허가안해 줄 이유가 있을까. 요새는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의 영역인데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이성이든 동성이든 상관없지 않나 싶다. 



최근 김규진씨의 소식을 찾아보니 프랑스 주재원에서 근무 중이고 정자를 기증 받아 올해 9월에 출산 예정이라고 한다. 동성 결혼을 공개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레즈비언 엄마들이 될 결심을 하다니 역시 멋진 사람이다. 앞으로 한국에서 아이를 낳아 키울거라고 하는데 소수를 위해 앞장서는 누군가 존재해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겠지만,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또래로서 편견 없는 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 동성애는 역시 가벼운 주제는 아니다... 다 쓰고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글이 되었지만 책을 읽는 시간보다 이 글을 쓰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으니 그냥 올려야겠다...




책 속으로


(p.10)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 하루하루 조금씩 삶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작은 악들과 싸워나가다 보면, 그게 모여 언젠가는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까? 


 그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작은 싸움을 이겨내고 승리했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렇게 해보니 되더라고, 동성애자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그리고 언젠가 성미산학교의 남학생과 웃으며, 세상이 변하긴 변하더라, 살다 보니 달라지더라는 얘기를 나누고 싶다. 



(p.78) 언니를 보면 설레었다. 핸드폰 알림이 울리면 언니일까 기대가 됐고, 보고 싶어서 얼른 주말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동시에 편안했다. 이전 연애와는 달리 트러블이 없는 안온한 날들만이 지나갔다. 내가 이 말을 꺼내니 언니도 사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연애할 때 많이 싸우는 편은 아니지만, 갈등 소지를 참고 넘어가서 그랬을 뿐인데 이번에는 억지로 참을 일이 전혀 없다고 헀다. 하지만 수십 년간 다른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만났는데 갈등 요소가 없을 리 만무했다. 합의하에 서로에게 신경 쓰이는 점을 찾으면 알려주기로 했다. 늦게 알게 되는 것보다는 미리 알아 예방책을 마련하는 쪽을 둘 다 선호하기   때문이다. 치열한 탐색 끝에, 우리는 서로에게 거슬리는 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p.81) 나는 이 시점에 이미 언니와 미래를 함께하고 싶었다. 그냥 걷다가도 요즘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고, 아무리 해도 거슬리는 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잘 맞았다. 아주 오랜 시간 같이 지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p.93) +혹시 이 책을 읽고 기획서로 프러포즈 했다가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생길까봐 노파심에 한 가지 덧붙여본다. 결혼이 조인트벤처 설립은 아니고 양측은 살아 숨 쉬는 사람이니까 기획서만 제시하는 건 조금 삭막할 수 있다. 내 결혼 기획 발표는 감성에 호소하는 편지와 디올, 티파니, 시그니엘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p.95) 우리 부부가 원하는 웨딩의 테마는 '한국식 공장형 레즈비언 웨딩'이었다. (물론 해괴한 워딩은 나의 발상이다.)


 나는 취향이 꽤 보수적이고 보편적인 편이다. 한때 남들이 안 듣는 음악을 열심히 찾기도 했으나, 지금은 내가 빌보드 히트곡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패션도 아주 무난한 아이템을 입거나 그때그때 유행하는 브랜드 제품을 사보는 편이다. 결혼식 취향에 관해 얘기하자면, 흔히들 '공장형 웨딩'이라고 비판적 뉘앙스를 담아 칭하는 전형적인 한국식 결혼식을 좋아한다. 실내 예식장에 많은 지인이 모여 축의를 하고 축가를 들은 뒤 이내 밥을 먹으러 가는 그런 예식 말이다. 내가 지금까지 방문한 모든 결혼식은 이러하였고, 나는 갈 때마다 축하와 부러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는 찍어낸 듯 똑같다고 폄하하는 이런 흔한 광경이 나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p.98) "동성 결혼인데 괜찮으시냐고 실장님한테 물었더니 그분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글쎄 다 같은 돈 아니냐고 하시지 뭐예요."


 나와 언니, 그리고 플래너는 다 같이 한참을 웃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부부가 동성 커플인지 이성 커플인지가 대체 무슨 상관인가. 내는 돈은 어차피 똑같을 텐데! 실장님의 건조하고 실리주의적인 말이 더없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p.104) "사실 나는 너희 엄마랑 동성동본 결혼을 했어. 외할아버지 반대가 심해서 내 본관을 다르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동성동본 얘기를 하냐? 동성 결혼도 30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의 결혼 비밀보다는, 이 결혼을 지지해주기 위해 아빠가 자신과 동성 커플의 공통점을 찾아서 해줄 말을 열심히 골랐다는 점에 놀랐다. 정말 맞는 말이기도 했다. 동성동본 혼인 금지, 호주제와 같이 지켜야만 할 절대적 가치로 보였던 일들이 2,30년이 지난 지금은 정말 별것도 아니지 않나. 우리의 결혼도 30년 뒤에는 그렇게 될 것이라니, 결혼 승낙 발언으로 들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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