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울타리 밖에 두고 온 양심

by 디비딥


크리스마스를 앞둔 아일랜드의 어느 마을.

빌 펄롱은 석탄 야적장을 운영하며 아내와 다섯 딸과 함께 사는 평범한 남자다. 그는 아주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큰 어려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애들 잘 키운 것 같아.”
“당신이 잘 키운 거지.” 펄롱이 시인했다.......(중략).......
“당신도 잘하고 있어, 빌. 빚 한 푼도 없이 사는 건 당신 덕이야.” 아일린이 말했다. (p. 39)


“아무튼 우리는 괜찮지?”
“재정적으로 말이야? 올해는 괜찮지 않았어? 지금도 매주 신용조합에 적금 넣고 있어.” (p. 43)

그들이 누리는 삶은 사실 그냥 만들어진 건 아니다. 펄롱은 추위에 늘어난 석탄의 주문과 배달을 맞춰야 하고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위한 각종 이벤트(트리장식, 케이크 제작, 산타에게 써야 할 아이들 편지, 편지의 내용에 맞게 준비해야 할 선물 등)도 살뜰하게 챙겨야 한다. 특별하고 거창할 것 없지만 소박하고 평범하게 누리는 자족이 삶이란 그들의 쉼 없는 성실함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p. 29)


작고 소소한 일들의 반복을 살아가다가 잠깐씩 스치는 생각.

펄롱은 가끔 멈추고 자신의 과거를 그리고 현재의 성실한 굴레에 대해 혼자 의미를 헤아려보기도 하지만 명쾌한 결론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삶의 어떤 ‘파문’은 우연한 순간에 찾아왔다.

주문한 석탄 배달을 위해 수녀원을 찾아간 어느 날, 그는 수녀원 경당에서 고개를 처박고 죽어라 바닥을 문지르며 광을 내고 있는 어린 소녀들을 본다. 이들 중 누구도 신발을 신지 않았고 어떤 아이는 흉측한 다래끼가 나 있었으며 또 다른 아이는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깎여 있었다.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때부터였다. 펄롱의 삶에 섬세한 균열이 일기 시작한 것은.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p. 55)


“그렇지만 우리가 가진 것 잘 지키고 사람들하고 척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우리 딸들이 그 애들이 겪는 일들을 겪을 일은 없어. 거기 잇는 애들은 세상에 돌봐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 거야. 그 애들 부모는 애들을 멋대로 풀어놨다가, 문제가 생기니까 모른 척 등을 돌려버렸겠지. 자식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무심해서는 안 되는 건데.”(p. 57)

소녀의 부탁을 뿌리치고 돌아온 그의 꺼림칙한 마음에 대해 그의 아내는 알지 못한다. 아니, 애써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소박하게 일군 삶의 기반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선 자신들의 성실한 굴레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여백 따위가 없다는 듯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곁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잘 알겠지만.”(p. 105)

각자의 삶에 성실하고 마주치는 이들에게는 친절과 예의를 갖춘 세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는 사랑의 인사를 건네는 따뜻하고 보들보들한 세계.

이 세계 안에 사는 이들은 펄롱을 아끼는 마음으로 울타리 밖의 어떤 도발을 하지 말 것을 권한다. 아내도, 이웃도.

펄롱은 그럴수록 자신이 누리는 평화로운 일상과 이웃사람들의 적당한 선의와 친절로 둘러싼 세계가 이질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 그 아이가 부탁한 한 가지 일인데-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p. 99)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이면, 그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부조리. 이 모든 것을 감지한 순간, 성실하고 조용히 살고 있는 소시민의 마음에 일렁이는 이 양심의 소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작품은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펄롱이 목도한 수녀원 안의 소녀들의 모습은 18세기부터 20세기말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고 아일랜드 정부에서 지원한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곳에서 일어난 실상이었다. '타락한 여성'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했고 성매매 여성, 혼외 임신을 한 여성, 고아, 학대 피해자, 정신 이상자, 성적으로 방종하다고 평판이 있는 여성, 심지어 외모가 아름다워서 남자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는 젊은 여성들이 그 대상들이었다.

그들은 사회가 암묵적으로 약속하고 합의한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안전망을 벗어난 존재들이었고 교회가 보기엔 하느님의 이름으로 교화와 구원이 절실한 대상들이었다. 하지만 보호의 이름으로 포용된 이들이 정작 당한 것은 학대와 착취였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p. 102~103)


도덕률과 신앙심, 그리고 성실한 노동이 만든 상식적이고 사회적으로 올바르며 예의 바른 세계의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은 애써서 외면한다. 알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모르고 싶고 몰라야 한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무탈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집합이며 마을의 수녀원은 크고 견고하여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세상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주인공 빌 펄롱은 자신의 삶에는 아무 실익을 가져올 수 없는 생각과 마음의 떨림을 유독 외면할 수 없어서 스스로 괴로움을 짓고 있는 셈이다.


'수월한 침묵'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멸이 될지 모를 '용기'를 내어볼 것인가.

간략하고 짧은 작품은 무감하고 안전한 선택과 사소하지만 섬세한 울림에 대한 용기의 총합이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작고 사소하고 나약한 소시민의 마음속에 일렁이는 혼란을 통해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을 만들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고민을 끌어내는 작가, 클레어 키건의 내공이 놀랍다.






동명의 영화가 소설이 던진 화두를 잘 담았기를 바란다.

빌 펄롱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연기가 이번에도 멋지기를 기대한다.

손쉬운 안락과 불편한 거리낌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소시민의 나약하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눈빛과 분위기, 섬세한 생활연기로 보여줄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