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게 말 걸다]

입 다물기 좋은 시간, <<맡겨진 소녀>>(클레어 키건, 2010)

by 디비딥

내 유년의 기억을 잠시 끄집어내어 본다.

열살. 초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 비가 오락가락하던 장마철이었다.

그날 오후, 우리 집은 불이 났다. 주택의 다락방에서 붙은 불은 빠르게 번졌다. 최초의 발견자는 나였고 엄마는 집에 없었다. 나는 번져 오르는 불을 수습하지 못하고 황급히 다락방을 내려와서 동생들과 집을 나와 버렸다.

공포에 휩싸여 초기대응에 실패했던 화재는 단 몇 시간 만에 우리 집을 삼키고 있었다. 골목을 가득 채운 소방차, 구경 나온 동네 사람들, 엄마의 오열, 짧은 시간에 스쳐 지나간 온갖 무서운 상상들.

그때의 풍경은 선명하진 않지만 어수선한 상황들 곳곳에 새겨두었던 공포와 슬픔은 내 기억 속에 여전히 매달려 있다.


폐허가 된 집안에 들어갔던 다음날 아침.

불에 녹은 피아노 건반은 양치질 한번 안 한 부랑자의 치아처럼 누렇게 늘어져 있었고 고개를 올렸을 때 지붕이 무너져 내린 집안에서 보이는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잿더미를 디디고 있는 내 발밑의 사정과 달리 쾌청하고 맑은 하늘과 햇살에 괜히 심술이 났던 것도 같다.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등교를 했다. 평범하고 소심했던 나의 존재는 하루아침에 불난 집 아이가 되어 전교생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얄팍한 호기심에 눈을 빛내고 나를 쳐다보던 아이들의 시선 하나하나는 벌침에 쏘이듯 따갑게 느껴졌다. 괴로운 하루였다.

그리고 맞이한 여름 방학. 화재가 난 집을 하루라도 빨리 재건해야 했으므로 엄마는 작은 아빠와 숙모에게 우리 자매를 맡겼다. 열 살의 나는 여름방학 동안 ‘맡겨진’ 존재가 되었다.

여름의 한복판을 그렇게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조금 달라졌던 것도 같다. 이를테면 불필요한 부끄러움에 대해 조금은 무감한 소녀로 말이다.


열살 무렵의 작은 존재들.

생각해 보면 그 나이의 소녀 혹은 소년들은 부모가 제공한 품을 조금씩 벗어나 세상과 타인에 대한 시선과 그 속에 존재하는 ‘나’라는 존재의 낯섦을 모호하지만 어렴풋이 느끼는 시기인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도 그랬다. 그리고 그 기억과 감각은 놀랍도록 생생하다. 여전히.

열살 즈음은 그런 나이다.



얼마 동안 맡아달라고 하지?
원하는 만큼 데리고 있으면 안 되나?
그렇게 말하면 돼? 아빠가 말했다. (p.15)


소설 속 소녀는 아빠의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중이다. 빠듯한 살림과 다자녀, 그리고 또 다른 아이를 임신 중인 소녀의 부모는 살림과 육아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선택이라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소녀는 사촌 격인 킨셀라 아주머니 댁에 당분간 ‘맡겨져’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내려면 ‘꿔다 놓은 보리자루’ 같은 신세를 묵묵히 감내해야만 한다.


엄마는 할 일이 산더미다. 우리들, 버터 만들기, 저녁 식사, 씻기고 깨워서 성당이나 학교에 갈 채비시키기, 송아지 이유식 먹이기, 맡을 갈고 일굴 일꾼 부르기, 돈 아껴 쓰기, 알람 맞추기. 하지만 이 집은 다르다. 여기에는 여유가, 생각할 시간이 있다. 어쩌면 여윳돈도 있을지 모른다.(p.19)

자신이 지낸 곳과 사뭇 다른 분위기, 그리고 킨셀라 아줌마, 아저씨는 다정하기도 하지만 낯설기도 하다. 집안의 분위기는 내가 살던 집보다 조금은 더 풍족하고 고요하며 아이의 흔적이 없다.

소녀는 자신을 감싼 낯선 공간과 감정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순 없다. 그저 희미하게 보일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다.


욕조 물이 차오르자 흰 욕실이 어딘가 변해서 눈앞을 가린다. 전부 다 보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p.23)


부모와 나와의 관계만으로 온전한 세계라 여기는 유아기를 지나 부모 아닌 타인과 가정 아닌 다른 사회를 경험하고 세계 속의 나를 조금씩 알아가는 나이의 소녀.

소녀의 눈에 비친 낯선 상황과 어정쩡한 자신의 존재, 그리고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섬세한 순간과 감정들.

작가는 꾸물꾸물 일렁이는 소녀의 복잡 미묘한 감정에 마치 현미경을 장착한 것처럼 미세하고도 섬세하게 정제된 문장으로 그려나간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p. 28)


낯설고도 어색한 시간이어도 그것의 누적은 소녀가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그리고 그 집에서 있었던 사정들을 조금씩 알아가고 눈치채는 시간이 된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말’로 캐묻고 대답을 기다리는 강요는 없다. 그저 조용히 느끼고 알아채지만 같이 머물러 줄 뿐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말하지 않음으로써 공감하는 관계와 달리 울타리 밖의 세상은 침묵으로 묶인 공감과 신뢰를 깨기 좋은 유혹들로 넘쳐난다.

밖으로 나가서 작별인사를 하고 나자 밀드러드 아주머니는 내가 겨우 따라잡을 만한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모퉁이를 돌자마자 질문이 시작된다. 호기심에 통째로 잡아먹힌 사람 같다. 질문 하나에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다음 질문이 날아온다. “너한테 어느 방을 내주던? 킨셀라 씨가 너한테 돈을 줬니? 얼마나? 아주머니가 밤에 술을 마시니? 아저씨는? 사람들이 카드놀이 하러 자주 오니? 누가 왔었는데? 그 남자들은 뭐 때문에 자선 복권을 팔았어? 너 묵주기도는 하니? 아주머니가 페이스트리에 버터를 넣니, 마가린을 넣니? 개는 어디서 자고? 냉동고를 꽉 찼어? 아주머니가 돈을 아끼니, 펑펑 쓰니? 옷장에 아직도 그 애 옷이 걸려 있어?”(pp. 62~63)


킨셀라 부부와 초상집에 동행한 소녀가 불편해하자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잠시 맡아주겠다고 자청한 이웃, 밀드러드는 소녀에게 그동안 킨셀라 부부에게 궁금했던 모든 것을 작정하고 쏟아붓는다. ‘호사가’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남의 일에 특별히 흥미를 가진 사람, 그리고 그것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하지만 그녀의 무수한 질문과 말들은 타인에 대한 호기심일지언정 결코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준비자세가 될 수 없음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수많은 질문들에 알 수 없는 압박감, 혹은 강요를 온몸으로 섬세하게 느끼면서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한 침묵뿐이다.


“참 조용하네요, 얘는.”
“해야 하는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하죠. 이런 애들이 많으면 좋을 텐에요.” 아저씨가 말한다. (p. 67)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p. 70)


소녀가 맡겨진 동안, 그녀는 낯선 공간과 새로운 사람들 틈에서 침묵과 고요를 배우고 ‘말’이 부재한 공간에 떠도는 섬세한 감각과 느낌을 알아간다. 그러는 사이, 소녀는 ‘조용히’ 성장한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p.73)

말이 풍성한 세상.

다양한 양육의 사례와 솔루션이 넘쳐나는 세상.

소설을 읽으며 문득 침묵의 가치와 조용히 스며드는 성장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p.s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 있다는 것을 이 글을 올리던 중에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도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십 대의 작은 존재가 세상을 감각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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