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게 말 걸다] 그의 속내를 더 알고 싶어서...

영화 <<하얼빈>>과 소설<<하얼빈>>

by 디비딥

한참 잘못 가고 있는 조국의 미래를 붙들고 제동을 걸기 위해 자신의 '젊음'을 내던진 청년들의 이야기.


이런 시국에 안중근과 독립투사들을 다룬 영화가 개봉하는 것 자체가 나에겐 위안이었다.

우리에게 누구보다 뜨거웠던 애국자들의 몸짓이 있었다는 것,

그런 대의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삶과 젊은 혈기를 과감히 포기하는 숭고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

그렇게 우리의 역사는 그런 이들의 몸부림이 쌓이고 쌓여 고단하지만 질기게 이어졌다는 것을 영화를 보며 확인하고 위안받고 싶었던가 보다.


화려한 전작을 지닌 감독과 훌륭한 배우들, 그리고 높은 제작비는 그런 기대감을 더욱 높였다.


영화의 비주얼은 정말 훌륭했다.

예전 프렌치 누아르를 연상케 하는 화면 구성에 양복과 중절모를 착장한 배우들의 본새는 일품이었다. 엄혹한 시절을 살았던 시대의 어둠과 그럼에도 빛을 갈망하는 인물들의 절절한 마음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을 통해 멋지고 폼나게 드러났다.


그런데, 기대가 컸던 탓일까? 허전한 마음이 일었다.

문제는 시각이 아닌 청각. 눈은 충분히 즐겁고 놀라웠는데, 어쩐지 귀는 내내 심심했던 것 같다.

동일인물을 다룬 다른 작품의 이름처럼 '영웅'이 갖는 존재의 무게감 때문인 걸까?

영화의 대사들은 마치 우리가 배운 역사교과서의 어느 한 구절을 오려 붙인 듯한 상투적 대사들이 즐비했다. 그것이 영웅이기 이전에 청년이었고 뜨거운 인간이었던 안중근과 동지들의 살아 숨 쉬는 고통과 갈등을 섬세하게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토록 아픈 '우리' 역사임에도 디테일 부족한 영웅서사는 몰입보다는 관망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영화 <<하얼빈>>이 보여준 눈부신 비주얼에 김훈의 소설 <<하얼빈>>에 등장하는 인간 안중근의 뜨거운 '속내'를 얹어보고 싶어졌다. 물론 영화의 원작이 동명의 소설 <<하얼빈>>은 아니다. 그럼에도 앙상하고 심심했던 대사의 기억을 셀프 해장하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여비 백 루블과 실탄 일곱 발을 들고 '이토'의 세상과 '이토'의 작동을 멈추기 위해 스스로 몸을 움직인 청년, 안중근.

그는 시국의 변화와 나라의 운명을 근심하는 나라 안 사람들이나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미명하에 차별화된 제국의 논리와 번영을 말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달콤한 말, 모두에 공허를 느낀다.


- 이제 일본을 누가 막겠는가? 급한 일이다.
- 백성들이 몸으로 부딪쳐서 될 일이 아닙니다.
- 그렇게 되어가는구나. 그러니 급한 일이다.

사내들의 말은 가깝고 다급했지만, 말 끝난 자리의 허허로움을 다들 알고 있었다. 안중근은 몸속에서 들끓는 말을 느꼈다. 말은 취기가 뒤섞여 아우성쳤다. 안중근은 말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p. 59 )


집안 어른들의 나라 걱정에 그가 선뜻 동참할 수 없는 이유. 시절의 다급함도 백성들에 대한 염려도 모두 방안에 떠도는 말들의 잔치였을 뿐, 구체적 상황 속에 정작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청년 안중근이 품은 실존적 상황인식은 노회한 제국주의자 이토 히로부미가 꿈꾸는 세계와 추상의 언어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거듭 말하지만,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제국은 동양천지에서 고래의 거악과 싸워가며 이 구조물을 제작하고 있다. 이것이 동양 평화의 틀이고 조선 독립의 토대이다. 조선은 스스로 이 틀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 황제와 백성이 함께 신생을 도모할 수 있다. 헛된 힘을 쓰지 마라. 쉬운 길을 두고 험로로 들어가지 마라. 제국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조선은 닦여진 길로 들어오라. 조선의 사직은 제국의 품 안에서 안온할 것이니 한 때의 식민을 버리고 장대한 미래를 맞으라. (pp. 81~82)


그(이토)는 유학을 통해 서양의 제국주의를 배우고 배운 것을 자국에 성공적으로 이식했다. 동시에 그는 서양으로부터 동아시아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공생 공영해야 한다는 참으로 회괴한 논리를 창안했다. 그런 그에게 조선의 통치권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왔다. 제국이 갖춘 공식 문서와 도장은 근대적 국제 양식에 취약했던 왕조를 먹어 삼키기 충분한 도구였다. 자신의 말과 논리에 도취된 인간에게 세상은 몹시 만만하고 쉬워 보였으리라.


러시아를 도모할 때까지도 이토는 그것이 도장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나, 그 후 조선 사대부들과 자주 상종할수록 이토의 뜻은 도장 쪽으로 기울었다. 왕권의 지근거리에서 세습되는 복락을 누린 자들일수록 왕조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갈 때는 새롭게 다가오는 권력에 빌붙으려 한다는 사실을 이토는 점차 알게 되었다. (p. 17)


그러니 우습게 여긴 쇠락한 왕조 어느 곳에서 자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청년이 펄떡펄떡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의심조차 할 리가 있을까.


이토의 목숨을 제거하지 않고서, 그것이 세상을 헝클어뜨리는 작동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 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 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 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p. 89)


세상에 대고 '말'하기 위해 행위를 먼저 하는 선택. 그의 선택은 이토가 말하는 동양평화나 제국의 품과 같은 추상과 관념적 언어의 위선을 정면으로 가격한다. 이토가 말하는 세상은 존재할 수도 존재한 적도 없는 허위란 사실을 청년 안중근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토록 명확한 신념에도, 불안한 인간이자 아직은 청년일 뿐인 안중근을 노작가 김훈은 끊임없이 포착한다. 민족의 운명과 대의에 몸을 던지는 그도 사실은 아프고 흔들리는 청춘이란 사실을.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표적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 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 (p. 159)


뜨거운 에너지로 살아 행동하는 청년과 현란한 말들과 기술로 지배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이토의 세계를 구체적 실존과 추상적 허위의 대비로 보여준 작품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무력한 현실임에도 온몸으로 살았던 한 청년이 추상과 허위로 점철된 기성세대와 질서에 뜨거운 에너지로 맞섰노라고 오늘의 힘든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음대로 짐작해 본다.


안중근은 체포된 후 일본인 검찰관이 진행한 첫 신문에서 자신의 직업이 '포수'라고 말했다. 기소된 후 재판정에서는 '무직'이라고 말했다. 안중근의 동지이며 공범인 우덕순은 직업이 '담배팔이'라고 일관되게 말했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중략)......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청춘의 언어였다.......(중략)...... 깨어난 말들은 관념과 추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날것의 힘으로 일어서서 말들끼리 끌고 당기며 흘러가는 장관을 보여주었는데, 저 남루한 세 단어가 그 선두를 이루고 있었다.......(중략)......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를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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