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수많은 밤들이 가고

에필로그 | 이제는 다른 시들이 쓰이는 다른 삶을 향하여-

by Dichterin 여자시인
광대여, 일어나 공중그네를 타거라.


내가 매일 밤 체험하는 밤은 매일 색다르게 신기하다.

그 밤에 밤을 가두고 그 시간에 나를 담뿍 잠수시키는데 희한하게도 숨 막히지 않고 깨어나는 기분이다. 밤이 그렇게 날 흔들어 깨우고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깨어났지만서도 내심은 밤의 깨움을 기다려왔다. 나는 그렇게 밤의 손을 타서는 밤에게 길들여졌다.


밤은 기어이 나를 저 높은 천장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은 그네에 올려 앉힌다.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실눈을 뜨고는 쫄깃해진 심장의 간질한 애무를 즐기려고 하는 차에 가차 없이 밤은 내 궁둥짝에다 퍽 소리 나게 발길질을 가한다. 그렇게 그네는 곡예하듯 날기 시작한다.


종종 생각하기는 했었다.

밤과 나는 도대체 무슨 관계이길래 대관절 나는 늘 밤에 잠을 잃고 밤의 명령대로 이끌려 검지와 중지 첫마디에 잉크 얼룩을 묻혀대었던 것일까? 그네에 올라탔던 것은 내 손가락 사이에 위태롭게 걸린 만년필이었을까?




2015년이 시작하면서 나는 이민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시차가 달라져서 이곳의 밤을 사는 동안, 나는 저곳의 낮을 잊지 못하였는지 밤에 깨어 무엇을 그렇게나 썼던 것 같다. 그런다는 것이 그만 밤의 거미줄에 걸려들어 밤마다 밤마다 갇혀 꼼짝없이 무얼 쓰고 또 썼는데 그걸 얼추 추리고 모으고 보니 제법 되더라는 것이다. 2022년을 시작하는 나는 그것들을 다시 하나씩 읽어보다가 밤에 쓰는 주제에 또 밤에 대해서 썼던 것들만을 따로 솎아내 보기로 하였다. 그러자, 내 지난밤들의 몸부림이 한 움큼 빗질 뒤에 걸려 모인 머리카락 뭉치들처럼 내 손가락 사이에 가만히 얽혀있었다.


그 수많은 지난밤들은 대단히 모순적인 시간이었다. 나는 수많은 밤들을 보내는 동안 굉장히 자주 또 많이 아주 가열차게 울었고 몇 시간이고 지속되던 발작적인 울음 뒤에 찾아오는 호흡곤란과 탈수 증세에 괴로워했었다. 그러면서도 밤마실을 다니기도 했고 밤에 누굴 그리워도 했고 누굴 미워도 했고 암만해도 고요하고 음전하게 보낸 기억이 없다.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주로 그렇게 밤마다 울었는데, 그래놓고서 여전히 그 모든 밤들이 다 지나간 지금에도 절반쯤은 모습을 숨기고 싶고 또 절반쯤은 드러내고 싶고 그러는 사이 또 어김없이 찾아오는 밤에게 투항한다.


이 머리카락 뭉치같이 모여 걸린 밤의 시들은 이런 나만큼이나 비밀이 많다. 더러는 아주 표리 부동하고 더러는 과잉된 자의식을 범벅해 놓고 있으며, 또 더러는 값싸고 저속하다. 그런데도 버리지를 못하겠다. 나는 언제나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둘 중 아무것도 못하여 늘 부끄러웠는데, 그래서 이번에 나는 내 그 가장 저속하고 비밀스러운 밤을 지나 살아남은 시들을 엮어내기로 하였다. 이번만큼은 밤이 반대를 해도 나는 밤에 대고 처음으로 개기면서 끝끝내 밤이 내게 부린 모든 짓들을, 밤과 내가 매일 만나서 했던 짓들을 죄다 고해바칠 참이다.




매일 밤, 나는 밤의 포로를 자처하여 밤의 애인이 되었다.

나는 자주 울고 자주 아프고 자주 형편없으나 그 덕에 밤은 나를 숙주 삼아 기생하며 살림을 차려준 그 덕인지 조금은 뭘 쓸 수도 있었다. 기어이 밤과의 사이에서 그렇게 새벽은 태어나고 다시 또 밤은 찾아오고 또 새벽은 태어났다. 그렇게 내 목숨은 연장되었다. 밤과 내가 몰래 낳은 새벽들의 숫자만큼이나 아침은 밝아왔고 나날들을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제일 처음 밤에 갇혀 살며 쓰기 시작할 무렵만 해도 나는 비자가 잘못되면 어쩌나 비자를 유지하기 위해 꾸역꾸역 다녀야만 하는 직장에 나가야 하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불안정한 신분과 불확실한 미래와 내가 원하는 대로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 대인관계와 암만해도 모일 기미를 보이지않는 돈, 그런 모든 것들에서 오는 피로함이 유일하게 인정받고 위로받는 시간이 밤이었다. 나는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까지도 생각한다.


내 그 지난밤들은 모두 내 정신병리적 환상 같은 시간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흔들어 깨워 손가락에 펜을 끼워주고 나를 희롱하고 나를 포옹하고 나를 위로하고 나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밤과 그 밤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하듯이 써 내려가는 내 모든 끄적임들. 그것들이 한갓 미친년의 잠꼬대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나는 도저히 이제와 이것들을 버릴 수가 없다.


수많은 밤을 건너오면서 나는 차곡차곡 세경을 받듯이 나이를 받아먹었다.

이제 더는 어리광 부릴 시기는 남아있지 않다. 하여 나는 내 그간의 밤과의 시간 동안 철 모르던 시절 내가 감행한 이민이라는 이름의 가출과 그 후로도 뒷감당 안될까 봐 전전긍긍 거리며 살아온 지난날들의 발광에 대한 증거로 내가 그 시절 지나온 밤들에 대한 소회를 증거로 제출하는 바이다.





다가오는 가을 생일이 지나면 나는 서른셋이 된다.

딱 여기까지, 나는 내 깜깜하고 차가운 애인 밤과 마구 뒹굴던 시간들을 접어 넣겠다. 더 이상 우리 사이에 그 어떤 사생아도 태어나지 않을 줄로 믿는다. 그 뒤로 아무리 밤이 나를 흔들어 깨워도, 나는 밤에 조금 더 의연해지는 법을 배울 예정이다. 새벽이 아스라이 밝아오더라도 더는 그런 새벽에 나는 친권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밤에 갇힌 밤은 거기 그대로 두고...


나는 몸만 나와 만기 출소를 한다.

뚜벅뚜벅 아직 깜깜한 길에 밤이슬을 맞으며 곧장 앞만 내다보며 걸어 나오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도 나는 밤을 사랑할 것이고 낮이면 밤을 그리워할 것이고 밤이면 두 눈을 감고 밤의 내음을 맡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밤을 사랑하는 마음만을 안은채, 더는 밤과 비밀스러운 만남은 갖지 않을 것이다. 그때 내가 만나 사랑하던 그 밤은 내가 두고 나온 그대로 거기 갇혀있다.


그동안 그 밤들이 나를 키웠다.

그 밤들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쓸 수 없었을 이야기들이다.

아주 용트림을 해대며 요란한 산고 끝에 숨을 고르는 산모처럼. 나는 몸을 풀듯이 부끄럼을 무릅쓰고 내 고해의 증표로 그 밤들의 사주를 받아 쓴 이 모든 것들을 풀어놓겠다.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나거든, 다른 시들이 쓰이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겠다.

문득문득 고개를 돌려 지나온 밤들이 그리워지는 밤들을 맞이하더라도.



그 수많은 밤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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