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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chterin 여자시인 Jul 09. 2022

확실한 불행

드라마 [안나] - 남의 행복을 넘보듯 불행에도 경쟁심이 생길까?


행복은 애매하다.

행복인가 싶은데 지나고 보면 그게 행복이었음을 뒤늦게 알려주는 것들도 많다. 오죽하면 ‘소확행’이라고 해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 누리는 것이 언제 올지 모를 더 큰 추상적인 행복을 위해 힘들게 일만 하는 것보다 낫다는 풍조가 생겨났을까?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저마다의 행복에 대한 정의는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행복하다는 느낌은 보편적인 특성이 있다. 행복하다는데 거기에 더 이런저런 설명을 달 필요도 없고 행복에 겨워 지내느라 다른 것들에 대한 관심에도 약간은 둔감해질 지도 모른다. 행복하면 그래서 ‘게임 오버’인 것 같다. 더 이상 수식어도 필요 없는 상태. 도대체 행복하다는데 뭐, 어쩌라고—


반면 불행은 조금 더 개별적으로 맞춤형이고 비교도 가능하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나는 당신보다 덜 행복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점에서 당신보다 더 불행하거나 덜 불행하다고 말하는 경우는 많다. 행복이 보편적인 편이라면 불행은 개별적이고 상대적이다. 그 불행에 대한 경중은 오로지 불행의 당사자만이 확실히 따질 수 있다. 나한테 중한 불행이면 누가 제아무리 옆에서 고작 그런 것을 갖고 불행하다고 하느냐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도 그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도입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드라마 속 여자들도 저마다가 처한 불행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응답한다.

한쪽에게는 행복은 원래 잘 없는 것인데 불행은 형형색색 다양하게 찾아오고, 한쪽에게 행복은 좀 애매모호한데 불행은 확실해서 차라리 속 편한 무엇이 될 수 있다. 남의 행복을 탐하고 질투하지만 사실은 불행만큼 더 남과의 차별화를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 또 있을까?






그게 뭐라고 질질 끌고 사람을 오라 가라 하기만 하는 결혼 준비에 한창인 현주는 힘들게 일하고 있는 유미에게 하소연을 한다.

정말이지 배부른 하소연이 아닐  없다. 누구든 자기 행복이 제일 인정받았으면 좋겠고, 자기 불행도 세상에서 제일 가엾다.



행복은 뭐랄까… 좀 애매한데
불행은 확실해



그러고 보니 배려는 더 많이 가진 쪽이 덜 가진 쪽을 위해서 시혜적으로 베풀어주는 무엇이라기보다 어떤 상상력 혹은 감수성이 아닐까 싶다.

내가 지금 할 이 말이 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불러일으킬까? 이것을 생각하는 능력. 이것까지 헤아리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요구한다. 따라서 내 형편이 좋지 않거나 여유가 없는 상태라면 여기에까지 끌어 쓸 에너지가 부족해지고 날 선 반응들이 나가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형편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그 에너지를 쓰지 싫다면 우선, 그 에너지가 없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 번도 살면서 그런 정신적 노동을 해야 무엇인가 귀중한 것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경험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삶이 술술술 손쉬웠을지도 모른다는 반증이 될 테니.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존을 위해서 위험을 감지했다면 확실하게 어디로 피해야, 무슨 조치를 취해야 안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머리를 굴리다가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인간세상이다. 빨리 뭐라도 액션을 취해야 하는데 불확실성을 견뎌보라고 하는 것은 버겁다. 성공하려면 필요한 덕목이 인내심이고 불확실성을 잘 다루는 것이라는데 그러기에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통제 욕구를 거둬들이고 나면 그들의 취약한 영혼은 불안이라는 진균에 의해 삽시간에 곰팡이로 뒤덮여 푹푹 상해 갈 일이다. 그러니 어딘지 시큰둥 오는지 마는지 미적지근한 희극보다는 확실하게 쨍하고 눈물 쏙 뽑던가 아슬아슬 신경을 건드리며 스트레스 주는 비극이 이런 점에서 차라리 속 편할지 모른다.




어쭈, 오냐오냐 해줬더니만  밑에서 수발이나 드는 MD 아이 하나가 오늘은 대꾸가  시원찮다. 골려줘야지 —’


만료 앞둔 여권 갱신하는 것도 일일이 알려줘야 하냐며 테이블 아래로 슬쩍 밀어 떨어뜨린다. 쭈그리고 앉아서 그걸 주울 사람은 바로  아이이다.  아버지에  딸일까? 사람 모멸감 주는 방법은 너무 자연스럽고 야멸차다. 우울한 일들 투성이인 무료한 나날에 자기는 불쌍하고 불행한데 그것도 누울 자리를 살펴가면서 앓는 소리를 냈어야 했는데 그런 배려 따위는 없었다. 내가 불행할 때에는 타인의 입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내가 지금 불행하다는데 감히 거기에 맞장구를 치지는 않고서 토를 달다니. 불행 앞에 인간은 그동안의 사회화 과정 속에서 체득하게  사회적 덕목들을 깡그리 망각하게 된다. 그동안 학습된 매너 등으로  감춰두었던 날것 그대로의 원시적이고 동물적이며 유아기적인 활활 한 본능만이 하울링 한다. 야성을 일깨우는 휘영청 보름달   밤에 고개를 젖히고 울어대는  동물들합창처럼. 


이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불행마저 이기려 드는 배려 없는 것들에게 시달리던 유미는 꼭지가 돌아서 싹 챙겨 튄다.

있는 것들 앞에서 그나마 내세울만했던 나의 처량한 불행마저 평가절하 당했다. 있는 것들의 고작 권태에 겨운 사소한 짜증이 나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불쌍함을 이겨먹으려고 한다. 꼴사납다. 유미의 분노에 불을 댕긴 것은 자신의 특출한 능력을 한층 더욱 특별하게 돋보이게 만들어주던 거의 유일한 장치인 그 지리멸렬한 불행이 무신경하게 툭 내뱉은 다 가진 여자의 불행에 비해 덜 특별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많은 것을 가진 여자는 마냥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 여자가 애매한 행복보다는 확실한 불행을 거들먹거릴 때, 벌써 그게 자아내는 독특한 콘트라스트 앞에서 자신의 처지는 ‘없기 때문에 당연히  불행하다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면서 평범으로 강등당한 심리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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