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해보려고 합니다만. D-97

어느 해외 이민자의 코로나 시대 퇴사 결심 100일 카운트다운의 기록

by Dichterin 여자시인

22.01.2021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9회 속 장면: 쿠도 히나는 마주한 박애신과 가배(커피)를 들며 "헛된 희망"에 대해 읊조린다.


마치, 헛된 희망 같다고 할까요?.....

헛될수록 비싸고 달콤하지요.

그 찰나의 희망에 사람들은 돈을 많이 쓴답니다.

-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中 쿠도 히나의 대사







헛된 희망.

헛됨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 덧없는 것? 현실성이 없는 것?


이 이민생활은 나에게 헛된 꿈이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지속 가능한 현실일까?


희망을 가지는 것.

그리고 걸었던 희망을 잃는 것.

실망하는 것. 모든 희망을 잃고 금세 좌절하는 나라는 사람.

나는 무엇을 위한 무슨 희망을 걸어왔던 것일까?


오늘은 어제 있었던 상사와의 콜의 연장선상으로 매월 1회 포트폴리오 현황 보고하는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상사와, 그 상사 아래 하나의 팀을 맡고 있는 팀장 한 명, 그리고 자기 관할 주요 프로젝트가 많은 부서 내 프로젝트 매니저 한 명, 그리고 나.


올해 들어 처음 하는 보고 미팅이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 한가운데 내용은 별 무리 없이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어제까지 시안 준비해오던 포트폴리오 콘셉트 관련 슬라이드는 몇몇 개선점들 피드백도 받았다. 생각보다 내가 아직 아주 완벽하게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진행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막상 스스로가 노래 노래 불렀던 콘셉트 제안하는 것도 본인이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실재에서 그에 미치지 못하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좌절감을 빨리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종류의 업무도 사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과연 잘할 수 있는 업무가 있기는 한 걸까?

이것은 순전히 나 자신 때문인 걸까? 아니면 조금 다른 세팅, 조금 다른 식의 조직이었다면 충분히 차이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내 마음 깊은 곳에다 대고 나는 사실은 이렇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이 업무를, 이 조직 내에서 이 부서 내에서 이런 세팅 속에서 열과 성을 다 바쳐서까지 스스로를 개선시켜내고 어떤 한 획을 긋고 싶기는 한 거야? 아니면 이 일이라도 한 번 어떻게 발전시켜서, 기존의 하기 싫은 다른 종류의 일을 할 때 드는 우울감을 상쇄시켜보려고 개중에 이게 제일 나아 보이니 여기에 빨대라도 한 번 꽂아보려고 하는 거야?

정말로 이쪽 계통으로, 이쪽 분야로 나가고 싶어? 네가 그동안 그렇게 집착해왔던 이민자로서 현지 직업시장에서 각광받을 수 있을 분야로 스스로의 적성을 애써 맞추면서 그렇게 억지로 단련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걸었던 희망들, 그래 콘셉트 잡는 일을 하면 내 아이디어를 사람들이 다 좋아해 줄 거야, 나는 내 아이디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어, 나는 창의적이야, 나는 똑똑하고 야무져, 나는 철두철미한 일을 해 내는 사람..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런 것들은 쿠도 히나의 말처럼, 개화기 시절 허영의 상징이었다던 가배같이 그런 허황되고 과장된,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보이지만 실속은 없을지도 모를, 그렇고 그런 헛된 희망들이었을까?


나는 이런 일들 (사람들 대하고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일들) 하기 싫어하고, 늘 그런 것들에 불안감과 부담감을 느끼니까- 그에 비해 천만다행으로 혼자서 생각해서 아이디어 짜내는 일, 기존에 없거나 정립이 미흡한 상태인 프로세스들 한데 모아서 엮는 일들을 좋아하니 그런 일을 할 기회를 얻게 되면 나는 날개를 단 것 같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그렇게 나의 못하는 부분들을 늘 요구받아야 했던 업무들만을 대체로 해오던 나의 상처 입고 억눌린 내적 자존심의 회복을 꾀하기 위해 나는 그런 희망들을 부풀려 생각해왔던 것일까?


애초부터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목적의식에 입각한 희망, 전망, 기대가 아니었기에 조그마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사정없이 희망들은 부서진다. 되려 그렇게 부서진 희망이라는 껍질이 조각조각 떨어져 내리고 나면 남는 내 빈곤한 마음, 상처 입고 불안정하고 어떻든 어떻게 해서든 내 허영기를 채워줄 좀 더 고상하고 품격 높은 일을 해 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을까 봐 벌벌 떠는 자의식만이 드러난다.





처음엔 쓴맛만 나던 것이 어느 순간 시고 고소하고 달콤해지다가 점차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밤에 잠까지 설치게 만든다는 헛된 희망 같은 것.




나는 부여잡을 것이 필요했다.

붙들 것이 필요했단 말이다. 지금 현실이 이러하니, 그래도 주어진 것들 중에서 이게 제일 나아 보이니까 이런 정도 쥐고 있으면 나쁜 패는 아닐 거 같으니까. 기왕이면 그냥 '나쁜 패는 아닐 거 같으니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파이기를 바라고 그 패로 어떻든 한몫 잘 챙기면서 이 판에서 한 번 이겨보자는.. 이를테면 그런 심보 말이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나에게 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일을 하고 싶기는 한 걸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




헛된 희망을 들이키려 하는 나를, 내가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