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워라벨이 아니라, 일을 좋아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 문장이 과거로 쓰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이 ‘회사의 일’이지 결국은 본질적으로 ‘내 일’이 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순간 내 일에서 주체성을 느끼지 못하게 됐고 그 순간부터 무력감이 느껴졌고 그때부터
이건 나에게는 아주 큰 일이었다. 물론 일을 하는 전 과정에 재미있는 일만 있었던 건 당연히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나에게 일은, 재밌어야 했다.
이런 걸 느끼고 친구들에게 털어놓자 예상과 같이 다음 같은 말이 돌아왔다.
“야 누가 일이 재밌어서 하냐?”
“돈 벌려고 하는 거지. 다 참고 사는 거지.”
나는 그 피드백에 갑자기 일이 재미없다고 찡찡대는 철없는 사람이 되었다.
부끄러움이 느껴졌지만, 본능적으로 이건 어딘가 잘못된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래, 그런 거지. 찝찝하게 끄덕이면서 회사생활을 계속해나갔다. 2014년 말부터 회사생활을 했고 지금은 2022년이다. 잠깐의 휴지기는 있었지만 대부분 회사에 다니면서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부끄러움은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워라벨이 아니라, 일을 좋아하는 거였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였다.
하지만 일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회사에서 있는 시간이 따분했다.
회사에서는 시간이 얼른 흘러가버리기를 염원했다. 결국 왜 그만둬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물었을 때 회사에 있는 내내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리길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리길. 회사에 있는 내내 나는 그 욕망을 가진다. 퇴근을 하고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길 바란다.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리길 바라는 마음은 현재에 있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불행한 마음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된다는 확신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이 계속해서 날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남들은 다 이렇게 산다고. 안정적인 것도 무시 못하는 거라고.
불안과 권태가 서로 싸우는 나날들이 길어졌지만
2022년, 나는 불안보다는 권태가 견디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발적 방황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방황기를 기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방황의 끝에는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