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빨래> 창작진의 유쾌한 신작
낯익은 공연장은 묘한 반가움을 준다. 올 하반기 정식 공연될 연극 <에덴 미용실>을 보기 위해 다시 찾은 동양예술극장이 그랬다. 저기 어느 쯤에 앉아 공연을 보았고 누구와 있었으며 어떤 감흥을 갖고 있었는지 되새김질 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연극 <에덴 미용실>은 뮤지컬 <빨래> 창작진의 신작 공연으로 비밀스럽고 솔직한 ‘욕망의 판도라’를 여는 공연이다. 공연장에 불이 꺼지는 순간, 이곳에서 울고 웃었던 과거와 오늘이 겹쳐졌고 욕망의 잔치는 시작되었다.
#에덴미용실,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에덴미용실은 남자지만 여자이고 싶은 15세 소년 ‘나’와 아직은 여자이고 싶은 갱년기 여성인 ‘엄마’가 미용실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성장해가는 이야기이다. '미용실'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이 '에덴동산’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인간의 원초적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장소로 등장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은 에덴의 동산에서 시작되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원죄를 짓게 된다. 이로써 인간의 두 가지 조건이 성립된다. 인간은 욕망을 지녔고 그로 인해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고 <에덴미용실>은 욕망이 뛰어노는 곳이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금기들이 깨지고 욕망으로 인해 무너지고 희망을 얻기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자, 여자 그리고 인간
남자와 여자만큼 재밌는 생물이 있을까. 성별은 신체적으로 명확하게 구분이 가능하지만 그에 따른 인식은 불분명한 사회적 규정이다. 이는 우리가 쉽게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정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규정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의 특성상, 성별에 따른 사회적 인식차이는 지속적인 논란거리이다.
연극 <에덴미용실>이 기대되는 이유는 성적 욕망에 기인한 정체성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이 연극에서 펼쳐지는 솔직한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서 연일 화두가 되는 젠더 문제에 대해 물음을 던질 것이다. 젠더 문제가 감정적으로만 과열되는 한국의 현실은 성에 대한 자유로움과 성숙한 인식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젠더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도 정식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다. 때문에 성적인 소재를 다룬 방송 프로그램이 생기고 노출의 정도가 자유로워졌더라도 성적 고찰로 이어지지는 않는 아쉬움이 있다.
<에덴미용실>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구분 이전에 욕망을 지닌 인간을 말한다. 규정은 사회가 만들어낸 잣대일 뿐이다. 나는 이 연극이 한국 사회의 성적 고정관념을 부수는 유쾌한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낯섦에서 익숙함으로 넘어가는 길, 사회의 인식 속에 갇힌 개인을 벗어나는 길, 타인의 기준에 모든 생각을 넣지 않는 일. 그래서 모두가 더 큰 세계를 만드는 일을 응원한다.
#시끄러움 그리고 사랑스러움
한국에는 여자, 남자 그리고 아줌마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미디어 속에서 억척스럽고 요란하게 등장하는 아줌마는 ‘여성스러움을 상실한 여자’로 비춰진다. <에덴미용실>을 방문하는 아줌마들 또한 그러하다. 그녀들은 욕망으로 가득 찬 시끄러운 수다를 이어간다. 그 속에는 남편에 대한 욕망에서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아직은 여자이고 싶은 그러나 단단해져야 하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있다. 이상하게도 시끄러운 그녀들이 사랑스럽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그녀들의 욕망이 자유롭게 표현되었기에 즐거웠다. 일상의 시끄러움을 경계하는 나지만
소음이 누군가의 표현 방식이라면 기꺼이 들어주고 싶다.
#죄인은 없다 그러나 죄는 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욕망을 지닌 채로 에덴의 동산에 선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하지만 욕망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활동이기에 역설적이게도 죄인은 없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위 구절처럼 간음한 여인을 비난할 자가 있는가. 하지만 지나친 욕망은 비윤리적인 행동까지도 초래하기 때문에 죄를 만든다. 욕망을 지닌 자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욕망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욕구’와 달리 절대적이지 않다. 따라서 우린 그 경계를 넘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고서 걸어야 한다.
에덴의 동산에 선 우리, 오늘도 욕망과 현실의 경계를 기울여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