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같은 목숨, 독립영화 '똥파리'를 논하다

by 양하늘

더럽다, 냄새난다, 시끄럽다. 윙윙-산만하게 화장실을 날아다니는 똥파리를 죽여도 되는 합당한 이유들이다. 우리는 종종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아찔한 순간을 마주했을 때,‘파리 같은 목숨’이라는 표현을 쓴다. 거대한 존재 앞에서 느끼는 나약함이 쉽게 죽임을 당하는 파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파리가 인간에게 얼마나 쉽게 죽임을 당하는지 생각해보면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 글은 똥파리를 연민하자고 쓴 글이 아니다. 다만 몇몇 사람도 파리 같은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 있고 그들을 더럽다고 욕하기 전에 똥파리로 살아가는‘말 못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펜을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가는 친구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알맞은 온도와 넘치는 관심속에서 평화롭게 자라나 똥파리는 구경해본 적이 없다. 고로 그들이 똥파리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똥파리의 인생에 대해 모를 것이고 그게 당연하다. 독립영화 <똥파리>는 우리들을 위한 영화다. 화초처럼 곱게 자란 사람들에게 똥파리의 삶 그리고 똥파리의 비명을 들려준다. 너무 작아서 들리지도 않았던 그들의 외침, 아픔, 비명을 확대해서 보여준다. 덕분에 우리는 성가시고 하찮은 똥파리를 쉽게 죽이는 방법보다 그들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그게 사람다운 삶이기에, 똥파리로 살지는 못하더라도 ‘똥'을 먹고 튼튼하게 자라는 화초가 되어보려고 한다.


#1. 추잡하게 살아가는 인간 똥파리, 상훈



똥파리 같은 인간은 추하고 더럽고, 피하고 싶다. 독립영화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은 인간 똥파리로 비유된다. 그는 용역깡패로 일하며 노인, 여성, 사회적 약자를 가리지 않고 때린다. 늘 상스런 욕을 달고 다니며 주먹 세계의 강자로 군림한다. 벌레에 대한 혐오. 사람들이 상훈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상훈을 보면 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리게 되고 근처에 가고 싶지가 않다. 친아버지를 패고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그에게 애정을 느낄 사람은 없다. 자연스럽게 인간으로 대우하고 싶지도 않은‘인간 똥파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 똥파리 상훈은 인간일까, 벌레일까. 정답은 없다. 사람답지 않은 인간을 벌레라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사람답지 않은 인간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똥파리는 화장실에서 태어난다. 상훈은 폭력적인 아버지의 우발적인 행동으로 누나를 잃고 어머니도 사고로 돌아가셨다. 유년시절의 아픔이 자연스럽게 그를 화장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똥파리로 만든 것이다.



#2. 똥파리의 감성에 대하여



지금부터는 똥파리의 감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지나친 공감을 바라지 않는다. 아니다 하려해도 할 수가 없다. 공감을 살 정도로 상훈의 캐릭터가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와 너무나도 다른 그에게 빠져드는 이유는 그에게 남아있는‘감성'때문이다. 똥파리 주제에 꽤 예민한 감정을 소유한 상훈에게 다가가 보자.


-똥파리는 아프다.



일단 똥파리 상훈은 아프다. 사람들을 패면서 돈을 버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일인자인 그는 의외로 약하다. 특히,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주는 정에 쉽게 무너진다. 우발적인 사고로 누나를 죽인 아버지는 13년간 감옥에 있었고 원망으로 얼룩진 그의 삶은 회복이 불가하다. 출소한 아버지를 패는 일만이 상훈의 정당한 복수방식이다. 나이가 들어 나약해진 아버지는 그에게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닌, 복수의 대상일 뿐인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사실은 상훈의 불안한 심리적 기반을 만들었다. 상훈의 성장은 누나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에 멈춰있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항해 자신을 지킬 수 없었기에 강해져야만 했고 평생 치유하지 못할 유년의 상처를 갖고 사는 것이다. 어린 시절 만들어진 애정유형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막대하다. 유년기에 보호자 혹은 친밀한 사람과 형성한 애착의 끈은 아이의 고유한 성격을 만든다. 철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빨리 어른스러운 성향이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이 부모가 된 것처럼 부모를 챙기고 통제하려고 한다. 연인에게 유난히 집착하는 사람들은 어릴 적 불안한 애착유형을 형성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처럼 유년시절 트라우마가 될 만한 상처를 갖고 있다면 이는 분명 성인이 된 후에도 드러나게 된다.

상훈은 아파서 사람을 패고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잔인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아픔을 간직한 인간이다. 결국, 인간 똥파리는 만들어지는 것이고 상훈도 '사람'이다.



-똥파리도 사랑을 한다.



똥파리 상훈은 사람을 싫어한다. 심지어 이복누나와도 대화하기를 꺼려하는 그다. 똥파리에게 삶의 의미란 없다. 그저 죽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하지만 잔인함으로 무장한 그도 사랑을 한다. 종종 연락하고 자주 보고 싶고 힘들 때 생각나는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이로써 똥파리의 삶에서 한층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의 여자 친구는 공부엔 관심 없는 여고생으로 욕을 잘한다. 둘은 서로에게 자석처럼 끌린다. 어딘가 모자란, 가슴이 뻥하고 뚫린 서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고생은 어머니가 부재한 결손 가정에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항상 딸의 모습에서 아내를 찾는다. 여고생의 오빠는 불량 청소년으로 살다 상훈이 일하는 곳에 들어가 수금을 걷는다. 힘들게 살아가는 상훈과 여고생은 서로의 슬픔을 나눈다. 가족들의 부재에 따른 반쪽짜리 인간이 만나 하나가 되가는 것이다. 상훈에게는 없는 제대로 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빈자리를 여자 친구, 이복누나, 귀여운 조카가 사랑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3. 똥파리 죽이기



똥파리를 죽이는 방법은 쉽다. 때려죽이면 된다. 인간 똥파리도 마찬가지이다. 직접적으로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는 없어도 그들의 숨통을 조이고 괴롭히는 방법은 무척이나 쉽다. 그들은 생존의 길이 좁기 때문에 단 하나의 길목만 막아도 곧 죽게 된다.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들을 한 번 쓰러뜨리면 다시 일어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그렇다면 똥파리를 죽인 이후에는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똥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똥 속에 구더기들은 다시, 다시, 성체가 되어 화장실을 지배하려 서로 싸울 것이다. 상훈이 자신과 같은 또 다른 똥파리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빈자리를 누군가 채우는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더럽게 보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죽을 만큼 힘들게 살고 있을 것이다. 상훈도 항상 죽기를 원했고 죽기 위해 살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놀랍지도 슬프지도 않다. 또한 그들의 삶을 돌아보며 범죄나 비윤리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주고 싶지도 않다. 그저‘그들도 인간이구나.’하고 알아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역설적이게도 살인자들 또한 사람이다. 그들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고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들은 애초에 동물이나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의 잘못을 묻고 죗값을 주되 ‘왜 살인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궁금해 하자.



영화 비평 이론 중 ‘동일시(identification)’라는 말이 있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에게 더욱 몰입하게 되고 자신의 워너비 대상으로 인식하고 좋아하는 배우들의 행동에 일희일비하는 것이다. 동일시는 영화를 더욱 영화답게 만드는 요소이기는 하나 동일시가 커질수록 자신의 현실에서 동떨어져 스크린을 바라보기만 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동일시는 자신에게 적합한 캐릭터만이 아닌 다양한 극중의 인물들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데 있으며, 어느 정도의 거리두기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내가 생각하는 관객의 자격은 그렇다. 좋은 동일시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독립영화<똥파리>에 잠겨 그들의 세상을 비관적으로 볼 필요도 없고 그들을 옹호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들의 세상에 비춰 우리를 돌아보자. 세상에 태어나 파리 같은 목숨으로 살아가고 싶은 인간은 없다. 똥파리를 보았다면 죽이지 말자. 그리고 그들에 대한 연민을 갖고 인간다움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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