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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딤돌 Aug 28. 2024

착해 빠진 이들을 응원함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 경계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듯한  두 마리의 착한 비둘기)


  어린이들도 때가 되면 산타의 실체를 알게 된다. 같은 이치로 세상은 어느 정도 혼탁하며 아름다운 곳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자각한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음에도 대다수는 냉엄한 현실에 적응하면서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며 때로는 타락한다. 

    

  우선 착하다는 형용사의 정의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라고 설명한다. 사회 통념상, 성인이 되기 전 까지는 착한 태도의 견지가 중요한 일이라고 동의한다. 하지만 홀로서기를 위해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부터는 착하다는 말이 현실에서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너무 착하면 주도적이지 못하고 과단성이 결여된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착해빠진 사람”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세속의 표현대로 착해 빠지면 희생양이 되기 쉽다. 타락한 세상은 착한 이들을 절대로 그냥 흘려보내는 법이 없다. 피해를 주는 자들 중에는 반드시 타인만 있는 게 아니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고 이익을 취하려 하는 부류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들을 먹이로 삼는다. 소위 덤터기 씌우기의 달인들은 기회에 무척 강하다. 모기나 거머리와도 흡사하다. 빨대를 꽂고 피를 훔쳐간다.     


  “한쪽 손이 한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종교적 신념으로서 수도자들에게는 적절 한 말일 수 있으나 험난한 세상을 살아내야 할 처지라면 “주고받기”에 먼저 충실할 필요가 있다. '가는 정이 있는데 오는 정이 없다면 일단 멈추어야 한다.' 상대로부터  “win-win”하겠다는 자세가 보이지 않으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착한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게 있다. 세상은 상상이상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다. 믿고 싶지 않지만 세상 자체가 원래 그렇다. 소수만이 교육을 통하여 바람직한 방향의 인격체로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기적인 부류도 어엿한 세상의 주요 구성원이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대신 착한 이들 스스로 면역주사를 맞고 조금은 오염된 상태로 그들과 어우러져 지내면 된다. 

     

  향후, 가져가야 할 자세는 자신을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불가에서 강조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나를 먼저 보살핀 후, 나의 선한 의지를 받아들일 자격이 있는 대상에 한해 착한 행동을 하면 마음의 상처를 줄일 수 있다. 대가나 기대를 바라지 않고 행 할 수 있기 때문에 배신감등이 밀려 올 가능성이 낮고 그에 따른 괴로움은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들도 자녀에게 이런 표현은 곤란하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이다.  이 말의 깊은 의미는 부모의 관심과 투자 대비 산출물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불만의 의사표시다. 실망감에서 꺼낸 얘기겠지만 이는 당사자 어느 편에도 백해무익하다. 착한 자녀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자신감을 잃게 된다. 부모 역시 무조건 사랑을 빙자했을 뿐이고 실제는 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주위의 착해빠진 사람들이 받고 있는 고통을 보면서 이 글을 썼다. 세상에 착한 사람의 구성원이 소수인 걸 보면 자연은 이기적인 부류에게 조금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것 같다. 진화적 관점에서도 눈치 빠르고 계산적인 개체가 유리함은 물론이다. 제 아무리 선한 DNA를 가졌다 한 들 살아남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배신감으로 고통받는 착한 이들이, 앞으로는 적당히 착하고 조금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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