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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선생의 인간적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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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딤돌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서재필 선생의 동상 네이버)


올해 1월 초순경 우연히 서재필(1864-1951) 선생의 73주기를 추도하는 행사를 보았다. 어느 단체가 행사를 마련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선생의 직계손이 없는 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행사가 끝나고 며칠 후 둘러보니 화환등이 사라지고 주위가 정리된 관계로 추모행사를 주최한 관계자는 알 수 없었다. 한 개인의 일생을 돌아보며 후대의 추모 발길이 이어진다면 망자에겐 영광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서재필 선생께서 애증이 점철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한평생을 살았을까? 에 대해 필자만의 관점으로 이 글을 쓴다. 선생은 전남 보성 외가에서 출생하였고, 7촌 당숙의 가문으로 양자로 가게 됨에 따라 양부모가 있는 충남 논산에서 자랐으며, 선생의 총명함을 일찍이 간파한 양어머니의 도움으로 한양에 입성하였고 19세의 나이에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관료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삼일천하로 끝난 1884년 갑신정변에 약관의 나이로 동참하게 되었다. 거사실패의 후폭풍은 개인의 삶을 뿌리째 흔들었다. 우선 친가, 양가(養家), 처, 자식 등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신세로 전락하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본인은 일본으로 피했다가 예상과 달리 그들의 냉대로 미국을 향했고 망명을 거쳐 미국인(Philip Jaisohn)이 되었다.


미국에서 독지가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으로 의대과정을 마쳤고 개원을 한 의사가 되었다. 현지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유색인이란 사실로 인종차별을 겪었고, 미국 내 주류사회 진입을 위해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 최초 미국 시민권자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

선생의 독립활동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94-1896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련의 개혁운동인 갑오개혁을 계기로 갑신정변이 재평가되었고 선생도 누명을 벗게 되었다. 정변을 일으킨 동지였던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1895년)하여 국왕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역을 수락하게 된다.


러시아, 일본, 수구세력의 압력으로 다시 조선을 떠날 때(1898년)까지 3년의 기간 동안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였고 독립협회(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를 결성하여 주변 열강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 자주국으로서의 위상 회복을 위한 자강운동의 주역 역할을 했다. 이 무렵 입헌군주제 개혁을 주창하기 시작했는데 절대왕정의 폐단을 누구보다 절실히 경험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될 무렵 선생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인쇄, 문구 사업을 하고 있었다. 3.1 운동 발발을 계기로 조국 선전활동을 재개했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친우회등을 조직했다. 조국이 광복되면서 미 군정장관 존 하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미 군정청 고문으로 활약했다. 초대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 불화가 있었고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며 미국으로 돌아간 뒤 3년 후 그곳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 후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되었고 1994년 미국에서 전명운 의사의 유해와 함께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모셔져 와 안장되었다. 이상은 선생에 대한 간략한 소개였다. 나는 선생에 관한 자료를 읽으면서 몇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조국은 사랑했지만, 가문을 멸문시킨 고종과 당시 정변 반대 세력들에 대한 원한, 대중적인 지원이 없어 정변에 실패했던 서운한 감정은 여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과 미국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중에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항상 불안한 나날을 보냈고 귀국하여 고문으로 있을 때도 자신이 직접 고용한 요원들의 경호를 받았다. 민 씨 일가와 정변에서 희생된 수구세력에 의해 저질러진 김옥균의 부관참시 소식을 들었을 터이므로 자신의 신변보호에 극도로 예민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철저하게 영어를 사용했고 주위로부터 선생이 우리말을 완전히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고종 앞에서도 자신은 외국(미국)의 신하라고 하면서 확실한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하니 고종의 무능과 변심에 대한 원한이 어느 정도 깊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들이 주도했던 정변의 실패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수 엘리트(주동자) 외에는 민중이 무지하여 군중의 힘을 보이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고 이에 대한 뒤끝으로 조선인이 협잡하고 더럽고 몽매하다고 여러 번 얘기하고 글로 썼다. 충분히 조선정부와 백성에 대한 환멸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선생의 입장과는 달리 일반 민중들은 오히려 권력찬탈에 눈먼 반역으로 인식했다. 기득권의 신구세력 알력다툼 정도로 본 듯하다. 세력 간 대화를 통해 스스로 내정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한 값비싼 대가였다.


개인 성향을 가늠해 보면 냉정한 승부사의 기질이 있었다고 보인다. 당시 미국으로 함께 건너갔던 박영효, 서광범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귀국한 반면 선생은 같은 양반 출신이었지만 차별을 딛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독학, 야학을 통해 의대까지 졸업한 점을 미루어 보면 그의 의지를 알 수 있다. 실제로도 모든 계산이 정확했으며 동양권 특유의 온정주의를 경멸했다 하니 실력과 성과를 최우선하는 미국정서와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귀국 후 자신으로 인해 사달이 난 처가 집안을 거두지 않은 사실에서도 그의 성정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친가와 양가와는 달리 배우자 집안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화를 면하려고 선생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기 어려울 수 있음은 인지상정으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장인 장모를 박대했다고 하니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처가의 부모도 고초를 불사하고 자신의 거사가 정당했음을 지지했어야만 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어 그랬던 게 아니었을까?


기록으로 보면 그의 신장이 당시로서는 크다할 수 있는 178센티미터였고 문무를 겸비한 천재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신문물을 접하고서 당시 동아시아의 병자였던 조선을 개화시키고자 하는 꿈이 있었지만 정변 주도자들이 대체로 젊고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과 양반세력이면서 기득권자였다는 점에서 일반 백성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공감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결국 왕의 비호아래 소수 엘리트들이 일본이라는 외세를 업고 급진개혁을 하려 했던 점을 고려하면 필자는 개인적으로 정변 세력을 의미 있게 평가하기 어렵다.


고령이란 이유도 있었지만 초대 대통령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배경이 궁금하고 끝까지 미국의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은 점도 눈길이 간다. 조선에 대환 환멸이 너무 컸을 것이다. 본인의 삶도 극적이었지만 온 가문을 쑥대밭이 되게 한 죄책감도 끝까지 떨쳐내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애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선생의 공과는 별론으로 하고 조선에 끼친 영향은 컸다. 그는 분명 난세의 선각자였음에 틀림없다.


(동작동 현충원에 모셔진 묘와 묘비)

다음은 선생이 직접 대담 중 한 말을 옮겨온 것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앞뒤 재지 않고 반대만 내세운 일반 민중의 무지몰락 때문이었다.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없고, 잘 훈련된 후원이 없이 다만 몇몇 사람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되었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한 유대 사람이었다. 즉 그의 동포가 그를 알지 못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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