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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지우기

<4>

by 디딤돌

(처음부터 상처를 남기면 안 되는 경우다. 네이버)


흔적을 남기면 생사가 걸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은밀히 적진에 침투하는 군인들이 그렇고 도둑도 꼬리를 밟혔다간 이른 시간 내에 자신의 집이 아닌 큰집으로 가게 된다. 한편 부끄러운 과거를 흔적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우리의 공통된 희망사항이다. 야외활동을 하고 난 후에도 흔적 남기지 않기를 적극 이행해야 한다. 떠날 땐 반드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증거가 그대로 남는 세상이다. 세상을 멀리 내다본다면 말과 행동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특히 신용을 생명으로 하는 금융거래는 철저하게 이행해야 한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블랙박스에 영원히 저장되어 부정적인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사업이나 부동산 취득을 위한 레버리지를 예정하고 있다면 신용관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좋은 기회를 포착하고도 금융 제약 때문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들었을 때, 사람마다 자신이 살아온 행적을 지울지 보존할지에 대해 생각이 다를 것이다. 나는 철저하게 지우는 걸 원한다. 실제 일상에서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남은 인생을 감안해 보니 새로운 것을 들일 필요는 거의 없어졌고 기왕 있는 것은 알뜰히 사용 후 보내고 있다. 나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후일에 그 누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을 것이라 판단되면 과감히 처분한다.


물론 의식이 있을 때까지는 추억을 소환할 수 있도록 사진으로 남긴다. 적당히 덜어내지 않으면 책상, 사물함에 지속적으로 뭔가가 쌓인다. 각기 사연과 느낌이 있는 것이지만 언제까지나 같이 할 수 없다. 생일 선물을 준비하려는 가족에게도 부탁한다. 불필요한 노고를 줄이고 내가 희망하는 것을 갖기 위하여 품목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대부분은 책을 사달라고 부탁한다.


물려줄게 많은 사람은 유언장도 필요할 것이다. 나는 가족에 대한 희망사항을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있다. ‘건전한 상식에 기초해 모든 걸 처리하기 바란다.’라는 정도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요즘은 재활용함에 종종 가게 된다. 재사용 가능한 물건은 타인이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놓고 온다. 사용하지 않는 자동안마기는 누군지 모르지만 꼭 필요한 사람에게 보냈다.


은퇴 후엔 옷마저도 많이 필요 없다는 걸 알았다. 유행은 지났지만 상태 양호한 것은 수시로 자기 갈 길을 찾아가도록 하고 있다. 흔적의 크기가 조금씩 작아지는 대신 마음만큼은 빈 것 이상으로 채워지고 있다. 20세 이전 개인 물건은 화재로 전부 잃었다. 수고를 덜어준 셈이다. 그 이후 나와 개인사를 함께했던 소품들을 촬영하고 있는 중이다. 신입사원증, 뱉지, 수료증, 상장, 기념패, 선물, 앨범 등등... 이제는 조금씩 보낼 계획이다.


유품정리사의 글을 몇 차례 읽어보았는데 이것저것 흔적을 많이 남긴 망자의 경우를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텅 빈 남김을 꿈꾼다.’ 살다 간 흔적을 남기고자 열 일하는 분들은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 살다가는 인생이라 해서 자기 본위로 하라는 뜻은 아닐 게다.’ 어떤 선택이 후세들에게 도움이 될까라는 고민을 평소에 해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짐을 많이 남기면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된다는 게 평소 지론이다. 얼마 뒤의 일이 될지 모르지만 사후 나의 육신은 흔적이 남지 않고, 대지로 최단시간 내 돌아갈 수 있도록 처리해 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했다. 이 행위는 세상을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자연의 섭리에 충실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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