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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의그녀 Sep 13. 2020

봄날의 혁오를 좋아하시나요?

언제나 처음은 특별하니까

언제나 처음은 특별하니까, 혁오 밴드

본인은 원체 추위를 잘탄다. 계절 중에는 봄을 좋아하고 여름은 더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겨울에는 이벤트를 많이 안잡는다. 약속도 드문 편이고, 4계절 중에 가장 오래 집에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역마살이 낀 듯이 돌아다니는 나를 생각하면 독특한 시기기도 하다. 스물 한살 겨울 바닥이 절절 끓었던 자취방에서 혁오 밴드 노래를 처음 들었다. 그때는 이렇게 유명하지도 않아서 소위 말하는 나만 아는 가수였다. 사실 노래가 좋아서 찾아 들었다기 보다는 뮤직비디오가 좋아서 노래도 좋아진 케이스였다. 물론 이 뮤비 감독도 혁오의 떡상과 함께 떡상했지만.. 비주얼스 프롬은 추후에 따로 다룰만큼 내가 아주 애정하고, 또 좋아하고 또 사랑하는 스튜디오라서 여기서는 살짝 언급만 하고 넘어가겠다. 그렇게 처음 혁오밴드를 알게 되었고, 그 감성이 좋아 과제에도 배경음악으로 몇번 써먹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혁오밴드는 유명해졌고, 나도 어느새 일년이 지나 3학년 스물 두살이 되던 해에 밴드는 공연이 진짜 좋다던데, 하는 말에 홀려 혁오 밴드 공연을 예매했다. 사실 어떤 가수를 공연에 갈만큼 좋아한 적이 없어서 예매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피시방에 가서 친구들한테 저녁도 사주며 그렇게 자리 예매에 성공했다. 수많은 포도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험이란.. 그렇게 다시 바닥이 절절 끓는 한겨울, 23살까지 몇걸음 안남은 28일에 혁오 밴드 공연을 보러 서울로 올라갔다.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지. 11시에 끝나는 공연을 보겠다고 그 깜깜한 겨울에 올라가서는, 지금 생각해보면 겁도 없었다. 

혁오 공연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앞자리 예매를 못한게 너무 너무 아쉬울 정도로 너무 너무 좋았다. 밴드는 역시 공연이구나 사람들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어. 이어폰으로만 들었던 노래를 현장감있게 들으니까 더 좋았다. 무엇보다 수록곡을 불러줘서 좋았다. 난 이무렵 혁오 밴드의 수록곡들을 좋아했다. 큰새도 좋고 mer도 좋고 프라이머리가 만든 볼링도 좋았다. 말보단 행동이잖아, 이런 가사들도 좋았다.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사랑과 야망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그 크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듣는 노래는 무조건 좋아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혁오의 수록곡을 좋아했고, 아무튼 그랬다. 지금 내가 여러 종류의 노래를 아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 노래를 추천해주면 한마디라도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이 무렵에는 누구나 사랑에 다 열심히니까. 

가끔 혁오밴드의 노래를 들을 때면 그 추운 겨울날이 생각난다. 내가 겁도 없이 서울로 올라갔던 그 버스 안이 생각나고, 이 공연이 끝난 다음에 누군가에게 전하려 했던 말들도 생각나고, 이 공연이 끝난 다음 나는 무얼했는지도 생각난다. 다 어린 날의 치기어린 마음이 만든 경험이지만 이런 자잘한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괜찮다. 위잉위잉을 듣던 스물한살은 어느새 데굴데굴 자라 완리를 들으며 대선을 준비하다가 이제는 서퍼보이를 들으며 포트폴리오를 작성하는 스물 여섯으로 컸다. 누군가랑 이야기하기 위해 혁오노래를 듣는게 아니라 이제는 혁오가 진짜 좋아져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누가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난 아직도 혁오밴드의 mer이 가장 좋다고, 바다를 노래하는 그 노래가 아직까지는 가장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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