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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군 Nov 15. 2019

뒷걸음

정리 그리고 마주함


1. 이별을 마주하다 


오늘도 나의 스케줄은 공란이다. 대구로 온 지 5개월째 이 열기의 도시는 나에게 생동감보다는 공허함을 주었다. 역시나 휴일 올리지 않은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 오늘은 무슨 세상의 가십거리들이 있을까 무의미하지만, 이 스크롤을 내려가는 시간 쓸쓸하지 않다.

 

각자의 정의를 열변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이야기 누구와 누구와 사귄다는 이야기  해외에 진출한 야구선수의 성적이 좋음을 국위 선양으로 포장하는 시시 껄껄한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똑같은 기사들이 즐비해 있다. 잠깐의 쓸쓸함을 위로해 줄 휴대폰의 유효시간도 금세 끝나버렸다. 밥이나 먹자. 다 먹고살자고 일하는 건데 배에 뭔가 들어가면 마음에 구멍도 채워지는 착각을 주지는 않을까.


어 근데 저 책 뭐야. 라면 받침대로 사용한다고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유독 오늘은 신경 쓰이는지 책을 들고 침대로 누웠다. '모든 순간이 너였다' 이 오글거리는 책 제목 내가 이런 책을 샀었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뱅켜쳐져있던 핸드폰을 다시 들어 앱으로 그동안의 나의 구매내역을 보았다. 역시나 없다. 내가 샀을 리가 없지. 그럼 이 책은 하늘에서 떨어진 건가. 


기억을 더듬어보자. 재깍재깍 시계 소리만 고요하게 울려갈 때 머릿속으로 한 여자가 떠올랐다. 그녀이다. 윤경이 대구로 오기 전 나의 마지막 연인. 그녀가 나에게 억지로 빌려준 그 책이 바로 저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감성이 없다고 이 책을 읽고 자신에게 낯간지러운 표현을 해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난 책장을 펼치지도 않았고 그녀는 이제 나의 곁에 없다. 모든 이별이 힘들지만 유독 나에게 그녀의 공백은 오래갔었다. 

소개팅 자리도 나가보고 여러 모임에 가서 무의미 한 말들을 내뱉으면서 윤경이의 흔적을  지워보려 하였다. 잠깐의 망각은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제길 요즘은 잠잠했는데 왜 하필 오늘 저 빌어먹을 책은 내 눈에 보인 건지 짜증이 난다. 


책 표지의 반짝 빛나던 우리의 밤을, 꿈을,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말 오글거린다. 책장을 넘겨 '모든 순간에는 얼마만큼의 감정이 있을까'라는 문장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몇 장을 뒤적뒤적 넘기다 그냥 덮어버렸다. 윤경이는 잘살고 있을까 보고 싶다. 안 되겠다. 밖으로 나가야겠다. 주섬 주섬 널브러진 옷들 중 깔끔한 옷들로 챙겨 입었다.


밖으로 나오니 갈 수 있는 곳의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한 곳 집을 제외하고 익숙한 장소의 공간이 있었다. 그곳으로 가자. 백석 우연히 골목 사이에 위치한 그곳을 간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익숙함을 우선시하는 내가 낯선 가 오픈한 가게를 기웃거리다 들어가서 지금까지 자주 오다니 살다가 의외의 행동이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델의 'someone like you'가 흘러나왔다. 좋아하는 곡이고 백석에서 자주 들을 수 있어 찾아왔는데 타이밍 기가 막히네. 잘하지 못하는 영어인데 'Never mind, I'll find someone like you' 괜찮아요, 당신 같은 누군가를 찾으면 된다라는 가사는 갑자기 이렇게 직역이 빨리 되는지. 아무래도 술이 필요한 것 같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오늘 향이 지독하게 센 싱크 몰트 하나 추천해 주세요". 


"그래. 오늘 찐한 거로 줄게요. 준서 씨 근데 오랜만에 가게 오는 거 아니야. 뭐야 연애하는 거야. 섭섭하네! 첫 고객인데." 피식 웃으며 


" 사장님 저 집 회사밖에 몰라요. 그 외에 아는 것이라고는 여기 백석 가게 너무 좋다는 것. 여자 연애 모릅니다". "에이 빈말이라도 고맙네. 편히 마시고 가"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나에게 좋은 안주가 되었다. 꽤 강한 향과 목을 타게 만드는 위스키 한잔을 머금고 있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시간이 벌써 한 시간이 지났구나. 가야 된다. 더 이상 취하면 의도치 않는 실수의 행동들이 유발될 수 있다.


 "사장님 계산요".


 "벌써. 오랜만인데 좀 더 마시다 가지".


 "아니에요. 오늘 충분히 즐기다 갑니다. 담에 또 올게요".


 지갑을 꺼내려 가방을 뒤적거렸는데 이 책 뭐야. 언제 넣었지. 이렇게 정신이 없는 거야.  그냥 버려버리자. 아니다. 책 주인에게 돌려주자. 알코올의 힘은 역시나 무섭다.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잘 지내지. 나도 뭐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 근데 우리 집에 네가 놓고 간 책 있더라. 아무래도 내 맘이 이거 돌려줘야 할 거 같아서. 더불어 회사일도 있고 해서 내일 춘천으로 갈게. 만났으면 좋겠어 ' 저질러 버렸다. 


무슨 용기인지 나는 메시지를 던지고 망설임 없이 숙소와 버스표를 예매하였다. 하지만 용기의 찰나는 지나가고 후회가 되었고 '일이 있거나. 불편하면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해도 돼. 어차피 춘천에서 업무 관련 일도 있고 하니 안되면 좋은 공기 마시고 오지' 수습 아닌 수습의 메시지를 남겼다.  1시간가량 뒤 그녀에게 문자가 날아왔다. 


' 미안. 나 아무래도 일이 있어. 보지 못할 것 같아. 재미있게 놀다가'


 돌려 말한 거지만 만나기 싫다는 답장이었다. 네가 없는데 재미있게라니라고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알코올의 패기는 사라진 뒤라 그냥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피곤하다. 내일 생각해보자. 이 사단을 어찌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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