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과 틀림
이 작품은 지속적으로 관객들에게 바르다는 것에 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영화 속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가지는 욕망들이 보통의 범주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그들을 바라보는 관찰자 입장에서는 자연스레 낯설고 생소하다는 생각이 된다. 다름과 틀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면서 기준의 흔들림을 일으킨다. 다양한 것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을 하게 된다.
과거에는 한정적인 제약의 틀을 유지하며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을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이라 재단시키면서 수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틀을 깨어버렸다. 그렇게 새어 나온 것들에 다양성이라는 것이 기성세대들에게 골칫거리가 되었다. 자신들이 유지하며 순응하면서 살아갔던들과 다른 것들에 대한 수긍 쉽지가 않다. 그러기에 고민을 하게 된다. 어느 선을 마지노선으로 생각하여야 하는지 말이다.
극 중 데라이 히로키는 기성세대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 다이키가 등교거부 유튜버를 보고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모습을 보고 취하는 태도는 단호하다. 마치 피의자를 취조하듯 소통하는 방식에 더불어 사기꾼이라는 표현까지 하며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한다. 히로키의 직업은 사회적으로 귄위와 권력이 주어진 지배계층으로 분류된 검찰이다. 이러한 부분이 더더욱이 다름에 대한 잣대를 오류와 버그라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히로키는 영화 중반 각 캐릭터의 연결고리가 되는 후지와라 사토루라는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그가 수도꼭지를 뜯어가 훔치는 형태에서 변태성을 가진 범죄자라 확증편향을 한다. 이 과정에서 같이 등장하는 검사관은 다양한 페티시즘을 자료를 주면서 꼭 이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고 말해주려 하지만 히로키는 듣지 않는다. 이러한 자신의 틀에서 세상을 보는 모습은 나쓰키를 처음 마주했을 때도 보인다.
우연히 거리에서 부딪쳐서 만나게 되는데 단번에 그녀를 부인이라고 칭한다. 나쓰키가 왜 자신을 유부녀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는데 그것에도 통념의 잣대를 들며 설명을 한다. 종국에 충격적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다시 마주한 나쓰키를 대하는 모습은 서서히 자신의 신념인 틀을 벗어난 것은 다 틀린 것이라는 것이 무너져내리는 상황을 보여준다. 결국 현세대를 살아가기 위해는 받아들이고 고쳐나가야 한다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한편으로 소수의 살갑지 않은 시선을 받은 이들에 대한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들이 느낄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들에 대한 세상의 강요 속에서 작은 소리도 내기 힘들다. 음침하고 이상한 존재로 낙인 찍혀서 그들의 욕망을 표출하지 않았음에도 배척된다. 개인적으로 극 중 가장 거슬렸던 인물은 나쓰키가 일하는 곳에 옆 매장의 임산부 직원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자기 이야기를 한다. 일반적인 절차를 밞아 나갔다는 것에 대한 자신의 자부심이 크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나쓰키를 고쳐주려 가르치는 형태를 보인다. 그것이 불편하고 괴롭힘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 못한다. 나쓰키가 결국 그만 떠들고 가라고 감정적인 표현을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가관이었다. 자신이 쓸쓸해 보이고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를 배려해 줬다고 오히려 내가 피해자라고 괴변을 한다. 정말 눈살이 찌 부려지는 존재였고 불쾌하였다.
근데 사실 이러한 종류의 사람이 생각보다 꽤나 주변에 많다는 것이다. 요시미치와 나쓰키가 같이 고향을 떠나 잠깐의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들이 잠자리를 흉내 내보며 어렵다며 운동을 하는 것 같다라며 포기하는 모습이 재미나기도 하였다. 소수인 그들에게 그냥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의 존재만으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소박하면서 애잔하게 보인다.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의 결말에 이르러 그마저 깨지어지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소수이기에 틀에 맞는 유형이 아니기에 그들의 자기변호는 인정되지 않았다. 나쓰키가 히로키를 만나 내뱉는 대사가 꽤나 머릿속으로 맴돌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없어서 숨쉬기조차 힘든 적이 있으신가요.' 설명해야 하고 설득해야 하는 소수자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몰아세우는 것인지 느껴졌다.
스크린이 어둠에서 밝아지는 순간이 오고 나에게 반문해 본다. 나는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고 살아갔는지 말이다. 나의 편협함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스쳐 지나간 시간 속에서 부끄러운 순간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것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세상에 의지에 되는 것도 있지만 태어났기에 생겨지는 성향도 있는 법이다. 적어도 그것이 타인의 선을 넘지 않는다면 그 다름은 틀리지는 않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무작정 낯섦과 이질적인 것에 낙인을 찍고 바라보면 안 되는 것이다. 정욕의 바름은 그러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