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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군 Jun 19. 2024

정욕 1부

묵진한 여운을 느끼다.

 요즘따라 다름과 틀림이 혼재되어 구분되지 못하는 경우들을 목격하는 것이 빈번하다. 다양한 정보를 입맛에 따라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이러한 점은 자칫 분란을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근간에 이와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하나 있다. 맨스티어라는 존재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시작은 뷰티블 너드라는 채널에서 하나의 페이크 다큐로 시작된 힙합 파트의 이야기에서였다.


  힙합인들의 책임가 없는 나쁜 단면들을 풍자하면서 자신들만의 노래를 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와 오락요소로 웃고 넘어갔는데 의외의 반전은 결과물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사람들이 찾아 듣게 되고 각종 행사에 섭외가 되고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그러더니 급작스럽게 힙합인들의 디스가 시작되었다. 기믹 뒤에 숨은  가짜며 이들은 씬에 들어와서 안 되는 존재라고 무시한다.



 사실 나는 그리 힙합에 대해서 지식이 전문적이지 않다. 따지고 보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매 시절마다 힙합을 들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거리의 시인들과 드렁큰타이거, 업타운, 엠시스나이퍼와 같은 가수들의 음악을 들었었다. 이후에 쇼미 더머니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즌마다 이슈가 되는 아티스트들의 창작물들을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담기도 하였다.


  트렌드에 따라 취사 선택하여 힙합을 즐겼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맨스티어의 노래를 듣게 되었고 꽤나 재미있고 흥미로움을 느꼈다. 귓가에서 맴도는 중독성도 있고 하다 보니 관심을 더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뭔가 현재의 사태에서 일어나는 대립적인 디스전이 조금 의아했다. 올바르지 못한 존재로 그들의 욕망을 바라보는 게 맞나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이들은 어느 시점부터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물론 이러한 전반적인 관점은 지극히 사적인 사견이다. 나의 생각의 기반이 논리적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빈약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에 부각되는 이슈의 쟁점은 혼재에서 중심을 못 잡는 이들의 디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것은 틀림없다. 이질적이다는 것 나와 다르다는 것은 쉽사리 수용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낙인찍어버리고 회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버리는 경향이 생겨난다. 나 또한 이 혼재에서 오판을 하는 경우기 있다. 그러기에. 적어도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다. 모두가 수정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시도가 후회를 막아놓는 경우를 만드는 것 같다.


   오늘도 내일도  삶에 의미가 없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타인들이 무언가를 바라고 쟁취하려는 모습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공허함 마음을 채워주는 것들이 있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부고소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가 있다. 그에게는 끝없이 삶에서 무언가를 찾고 목적을 가지려는 타인의 모습이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로 인해 회사 생활도 적응하기 어렵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남자는 일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다. 이 무미건조한 사사키 요시미치라는 남자에게 즐거움은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쇼핑몰 침 규 판매사원으로 고객에게 제품을 안내하는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기류 나쓰키이다. 옆 매장에서 일하는 임산부 직원이 시시때때로 찾아와 말을 건다. 그것이 거슬리나 티를 내지 않고 적당히 받아 주며 무시하다 지레  혼자 떠들다 지쳐서 떠나기를 바란다. 그녀는 나스키에게 연애와 결혼이 중요하고 그 일련의 과정을 무사히 가고 있는 자신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나스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라 훈수를 둔다.



  하지만 나스키는 연애도 결혼도 관심이 없다. 그녀를 안정시켜 주고 흥분시키는 것은 따로 있다. 퇴근 후 침대에 누워 냇물소리를 들으며 물가에 몸이 서서히 잠겨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마음이 수면에 잠식되면 절정의 안도감을 선사한다. 그로 인해 찾아오는 평온한 고요함을 나스키는 좋아하고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공감해 주고 이해해 줄 이는 없다고 생각하며 감추며 살아간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등교거부 선고를 받은 이가 있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출근 준비를 하던 데라이 히로키는 갑작스럽게 학교를 그만두고 유튜버를 하겠다는 다이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래 등교거부를 하면서 영상을 촬영하는 소녀 미와를 통해 용기를 내어 자신도 도전을 해보겠다는 의지 표시가 곱게 들리지 않는다. 결국 아들에게 사기꾼이라는 표현으로 등교거부소녀를 정상적이지 않는 존재라 이야기하며 다이키의 의지를 꺾는다.



 그의 직업은 요코하마 지방청의 검사로 포장된 꿈을 통해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부류들을 많이 목격한 적이 있다. 자신의 가족이 휩쓸리지 않게 미연에 차단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다르다. 마치 아들에게 심문하듯 대하는 모습과 그가 말하는 정상이라는 범주가 맞는 것인지 반문한다. 하지만 직장에서 마주하는 범죄자들을 보며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생각한다.


 극도로 남자와의 접촉이 두려운 간베 아예 코라는 여성이 있다. 불안과 초조하고 더 나아가서는 공황장애를 유발한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하게 접촉하여도 거리낌이 없는 존재가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모로하시 다이야이다. 같은 학교의 댄스동아리 멤버이고 왠지 무리에서 겉도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의 춤은 열정적이고 이끌리는 감정을 유발하게 만든다. 아예 코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지만 다이야는 이성관계에 대해 얽히고 싶지 않다면서 거부반응을 보인다.


  영화는 다른 장소,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이 예상치 못한 이유로 서로 얽히는 이야기를 교차로 보여준다. 각자가 삶에서 바라는 욕망에 대해 정상적인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한 연결고리로 물이라는 존재가 큰 역할을 한다. 다른 시선이 다르게 변질되면서 영화는 종국에 가서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을 보여준다.



  공교롭게 최근에 다양한 소규모 자본 영화들을 보게 되었다. 극장가에 걸리는 작품들이 사실 썩 만족스러운 것들이 많지 않았다. 너무 획일화되고 뻔한 스타일에 나의 시간과 돈을 소비하기가 싫었다. 바야흐로 OTT의 시대를 사는 내게는 선택의 폭이 확장되었기에 포기에 대한 망설임은 없었다. 그래서 눈을 돌리게 된 것이 작은 영화 소히 독립영화라는 장르였다. 또 근처에 CGV 아트하우스관이 있어 관람에 용이하였다.


 이 작품 또한 전혀 사전정보가 있었거나 기다리거나 했던 영화는 아니었다. 다만 우연히 극장가에 비치된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그것이 뭔가 묘한 이끌림을 주었다. 즉흥적으로 표를 예매하고 관람을 하였는데 정말 만족스러운 감정을 내게 주었다. 원래 일본 영화 특유의 잔잔함과 여운을 주는 부분들이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정욕은 명확하게 끝맺음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관을 나오며 마음속에 울림이 맴돌며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사실 제목만으로는 뭔가 야릇한 느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각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라는 욕망은 다수가 따라가는 일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고 그리 거북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공감받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했다. 영화는 계속 바른 것에 대한 강요를 하는 부분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등교거부 유튜버인 미와를 보고 다이키의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것에 사기꾼 표현하는 히로키나 나스키에게 지속적으로 연애와 결혼의 형태가 올바른 것이라 종용하는 임산부직원들이 이에 해당된다. 사실 처음에는 영화를 보면서는 그래도 다수가 가는 길이 좋지 않을까 갸웃거렸지만 점점 캐릭터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의 전환이 들었다. 그들의 다름이 틀림은 아니다.


  정말 다양한 것들을 접하기 쉬운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원하는 것들을 취사 선택할 수 있다. 그에는 욕망이라는 것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포용성이 아닌가 싶다. 획일화되고 제한된 조건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정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틀에 맞춰져야 하고 벗어나면 안 되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하였고 나에 대해 더 알게 되었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도 자유로워졌다.



 그럼에도 아직 뿌리 깊이 남겨진 규격에 대한 잔상이 완전히 잊히기에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타인의 삶의 다름을 수용하지 못하기에 쉽사리 부정적인 것으로 재단하려 하는 모습들은 여전하다. 영화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다름에 대한 포용성을 가질 수는 없을까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한 부분에서 히로키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름에 대해 이해받기 위해 공감을 얻는 것은 여전히 너무나 어렵다. 귀 기울여하지 않을까 필사적인 그 내들의 절규를 죄가 아니란 것을 말해주어야 하지 않겠냐라는 생각을 하였다. 정욕이라는 영화가 전달해 주는 잔잔하면서 묵직함은 인상적이었다. 올 한 해 보았던 영화 중 가장 여운이 오래 지속된 작품이 아닌가 싶다. 놓치고 지나치기 아까운 영화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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