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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May 31. 2020

001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안 한 일에 대해



그래. 잘 해보려다, 너무 잘 해내보려다 아예 시작도 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에 자책하며 살아왔어. 그러니 이 설레는 시작도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이라 두려운 건지, 내가 스타트를 끊어야 해서 두려운 건지, 그냥 습관성 두려움인지, 잘 모르겠네. 그런 거 있잖아. 사실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은데, 걱정도 안 되고 겁나지도 않고 아무 부담 없는데 괜히 주변에서 떨리겠다, 굉장하다, 힘 내라, 뭐 그런 반응들을 보이면 왠지 그들을 머쓱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난데없이 두렵고 긴장되는 척하게 되는 그런 상황. 나는 그런 적 많았거든. 그러니 괜히 긴장되는 척하지 말고 신나게 써야겠다. 당장 뭘 써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떤 말투로, 어떤 깊이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막막하지만, 난 언제나 생각한 걸 쓰기보다는 쓰다보면 생각이 나는 사람이었으니, 그냥 나답게 의식이 흐르는 대로 가봐야지.


내 근황에 대해 얘기해보라고 했지. 그거 알아? 오늘로 딱 5개월 된 2020년에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바로 그거인 거. '프랑스 어떻게 되는 거냐'와 함께 치열한 순위다툼을 하다가 결국 비행기표를 환불받고 5월이 지나가면서 '그래서 뭐하고 지내냐'가 확실한 1위를 차지하게 됐어. 1월부터 5월까지 내 대답은 한결같다. '아무것도 안 해.' 아무것도 안 하지.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걸 또렷이 실감시켜주던 건 다달이 입금되는 실업급여였어. 그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한테 나라에서 주는 돈이기 때문이지. 작년에 받던 월급보다 실질적으로 더 높은 액수인 실업급여가 통장에 입금될 때마다, 내가 뭐라도 하고 있었으면 못 받았을 돈이라는 걸 매번 되새기며 나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 감사하고 기뻐했달까. 근데 또 재밌는 게 뭔지 알아? 요즘 들어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인간'이라는 걸 더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건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실업급여가 이젠 더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이번 달까지는 그 돈이 입금될 때마다 내가 백수임을 깨달았는데, 이달부로 끊겼으니 앞으로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걸 더더욱 알게 돼버렸지 뭐야. 굳게 닫힌 내 방문을 두들기며 자의식이란 놈은 어떻게든 찾아옵니다. 쾅쾅쾅. 문 열어. 너는 백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와중에도 뭔가를 하며 살아가지.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생각을 하고, 잠에 든대도 꿈을 꾸니까. 나는 책을 읽었어. 책을 읽는 중간중간 영화도 보고, 그보다 좀더 가끔 공연도 보고. 글도 쓰기는 하는데, 난 항상 이 말을 하기가 참 어렵다. 왜냐면 우리가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뭐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샤워할 때, 방 치울 때, 옷 갈아입을 때마다 노래를 좀 흥얼거리는 걸 가지고, '나 요새 노래해.' 이러지는 않잖아? 나한텐 글 쓰는 게 그런 거거든. 특별히 시간을 내서 쓰지도 않고, 의식적으로 쓰지도 않아. 그냥 생각나는 게 있거나 남겨두고 싶은 게 있거나 무슨 감정이 올라온다 싶으면 자연스럽게 써두는 거야. 더우면 땀 나고, 힘들면 한숨 나고, 서러우면 눈물 나고, 빡치면 욕 나오듯이. 원래는 나름 스스로 정해둔 약속 같은 것도 있기는 했었거든. 책 한 권을 다 읽거나 영화 한 편을 다 보면 아주 짧게라도 무조건 글로 감상을 적어놓기. 근데 올해 들어서는 그런 규칙도 다 없어졌어. 뭔가를 다 봤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거나 귀찮으면 그냥 넘어가. 더우면 땀 나고 힘들면 한숨 나듯이 쓰는 글이, 나오지도 않는데 쓸 리가 없는 거지.


그렇게 5개월을 꼬박 책만 읽었다고 하면 아마 사람들은 와 대체 몇 권을 읽었을까 엄청 유식해졌겠다 대단해 이렇게 생각하겠지? 최소한 나라면 그럴 것 같아. 누가 '5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읽으며 지냈어요' 이러면 막 존경도 하고 질투도 하고 그럴 거야. 근데 절대 그렇지가 않지. 개수로 따지자면 '정말 다섯 달 동안 책만 읽었는데 겨우 그거밖에 못 읽었다고? 난독증이야?' 할 정도랄까. 한창 읽고 싶은 책들 이리저리 뒤적여가며 내키는 대로 읽다가, 얼마나 읽었나 돌아보면 매번 깜짝깜짝 놀라. 유독 심해진 게, 원래도 왜 '병렬형 독서'라고 하나? 여러 권 동시에 읽는 거 있잖아. 그러는 편이기는 한데 요즘은 거의 열 몇 권을 동시에 읽고 있거든. 그러니 책 한 권이 끝나지를 않아. 그 정도면 읽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서점에서 잠깐 들춰본 정도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조금씩 조금씩 계속 다 읽고 있어.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도 자주 드는데, 시간은 많고 욕심은 커져가는 걸 어쩔 수가 없더라고. 새로 좋은 책들은 어찌나 많이 쏟아져나오는지, 예전 같지 않게 사기도 많이 사고. 참, 내가 책장 하나 산 거 말했던가? 아주 싸고 이쁜 걸로 하나 샀는데, 뭐 사자마자 꽉 차버렸어. 그래서 갑자기 궁금해져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책을 몇 권 가지고 있나 한번 세봤는데, 그래도 200권이 넘더라. 여깄는 책 중에 안 읽은 건 그래도 손에 꼽는 정도니까, 제법 신기하지. 자랑하는 거냐고? 이런 거 말곤 딱히 자랑할 것도 없어 요새.


너 나 말 많은 거 잘 알지. 쓸데없이 부연설명 많고 목소리도 크고 말이야. 나 약간 서론만 쓴 거 같은데 벌써 꽤 길게 썼어. 큰일났네. 게다가 딱히 내용이 없어. 어떡하냐. 사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긴 했는데. 꽤 진지한 얘기. 그치만 쓴 걸 지울 생각은 없고, 이 글이 하염없이 길어지는 것도 원치 않으니,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한다. 열심히 궁금해하도록 해라. 그럼 이 다음에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쯤, 나는 이미 까먹었을 것이다. 낄낄.


아무쪼록 너도 근황 얘기 좀 해줘. 잘 쓰려다 아예 못 쓸까 봐 편한 마음으로 쓴다고 한 게 진짜 너무 편하게 써버려서 미안하네. 사실 이거보단 그럴싸한 글을 주고받고 싶었는데. 그치만 뭐, 처음이니까. 어차피 단순히 '쓰고 싶어서' 시작한 프로젝트인 걸. 안 그래? 그런 의미에서 이거보단 좀더 그럴싸한 답장을 기대할게. 부담되나? 너도 한번 당해봐라. 아참, 사과의 의미로 요즘 상영중인 영화 <카페 벨에포크>를 추천할게. 나 팝콘 붙들고 아주 엉엉 울다 나왔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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