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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Jun 07. 2020

003 상실에 대해서


공감이야. 나도 오래전부터 생각했었어. '뭐하고 지내냐'는 질문보다 '무슨 생각하며 지내냐'는 질문이 익숙한 세상이면 좋겠다는 생각. 자매품으로 '뭘 느끼며 사냐'도 좋은 것 같고. 난 사실 내 주위 사람들을 이 질문을 기준으로 둘로 나누는 것 같아. 이런 질문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어느 쪽이 반드시 더 좋고 나쁘다기보다는, 대체로 전자를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살아가면서 후자의 사람들도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고 느껴. 예를 들면 내 어제가 그랬어. 대충 알지, 나 이번 주에 좀 힘들었던 거.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 자주 내 진심을 나누고 진지하게 의지하고 나를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들하고는 만나지도 않고 연락도 잘 안 했는데, 별로 안 친한 사람하고 어제 만나서 저녁을 먹었거든. 나는 요즘 내가 겪는 감정들에 대해서 구구절절 늘어놓거나 또는 반대로 괜찮은 척 가장할 어떤 필요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고, 그냥 그저 그런 화제들에 대해 그것들이 대단히 흥미롭고 중요한 일인 양 신나게 떠들고 열심히 웃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씁쓸한 뒷맛이 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몸이 가벼워지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무슨 생각하며 지내냐'는 질문을 예쁘고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숱하고 평범한 '뭐 하고 지내'들 역시 너무 미워하지는 않아야겠지.


너같이 멋진 애한테 내가 좋은 영향을 줬다는 얘긴 언제 들어도 신기하고 기분이 좋은 것 같아. 처음엔 약간 수상소감 같은 거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어. '먼저 언제나 부모님처럼 돌봐주신 대표님께 감사드리구요, 나 때문에 고생 많은 스타일리스트 언니, 우리 실장님, 사랑하는 엄마 아빠...' 그런 거 있잖아 왜. 진짜 고마운 거 맞긴 한데 어쩐지 '고맙다. 내가 다음에 꼭 밥 한번 살게!'류의 인사 같은 그런. 근데 또 잘 생각해보면 말이야. 내가 만약에 그런 자리에서 수상소감을 말할 일이 생긴다거나, 내가 쓴 책이 나오게 돼서 작가의 말에다 감사의 메시지를 쓰게 된다거나 하면, 사실 진짜 어지간히 고맙지 않은 사람들이면 언급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해.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나한테 간접적으로 도움 준 사람들을 다 합치면 얼마나 많겠어. 그중에 정말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도움을 준 사람들은 이름 석 자가 머리에 떠오르게 되겠지. 뭐 그러니, 너의 진심은 고맙게 받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영향들을 많이 줄 수 있으면 좋겠네. 나 그런 거 좋아하거든.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본 직업적성검사 결과에 단 한 번도 교사가 빠진 적 없는 그런 사람. 내 인생은 말하자면 오로지 스스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싸움의 나날들이라고.


니가 써준 글들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한 줄 한 줄 소중하게 대꾸하는 일이 즐거워서 옆에 나란히 창을 켜 두고 글을 쓰고 있는데, 이 매거진 제목을 아무리 '해피버스데이'로 잡았다지만 이렇게 내 생일인가 싶게 좋은 말들을 많이 해줘도 되는 거니. 난 내가 워낙 말도 많고 목소리도 큰 사람인 걸 잘 알고 있어서, 사람들하고 말할 때 대체로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는 것 같다 싶으면 그전에 잘 컨트롤하려고 해. 다만 볼륨은 어쩔 수 없더라. 밖에서 누구랑 얘기할 때, 항상 그냥 정신 차려보면 그 공간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떠들고 있더라고. 그런 사람들 진짜 제일 싫어. 참나 배려가 없어, 배려가. 안 그러냐. 아무튼 내가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걸 글쓰기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볼 때도 많은데 말이야. 나는 글쓰기가 결국은 변명의 연속을 한 다발로 묶어놓은 거라고 생각하거든. 최초의 한 문장을 적고, 그 문장에 대한 변명을 다음 문장에 적고, 그 변명에 대한 변명을 이어서 적고, 그 변명의 변명에 대한 예상 반론과 그에 대한 반박을 마저 적고, 그런 식으로 하다가 지쳐서 대충 마무리 지으면 한 편 분량의 글이 완성되어 있더라, 하는 게 내가 항상 글을 쓰는 방식이거든. 그러니까 좀 눈치 되게 많이 보고, 자존감 좀 낮고, 그런 사람들이 글쓰기에 최적화된 타입 아닐까 싶어. 남들이 나를 오해하든 말든 아무 신경 안 쓰면, 도무지 구구절절 글을 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런 측면에서 내가 만약 정말 글쓰기로 먹고살기라도 하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가능케 한 나의 모든 찌질함을 포용하고 사랑해주리라, 그런 생각을 해. 뭐 지금까지도 약소한 재주로 덕 본 것들이 없지는 않으니, 그 분량만큼은 나름 인정해주는 바이고. 노래 짓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사실 노래를 만드는 니가 항상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음정과 리듬과 목소리, 때로는 이미지까지 실어서 보관할 수 있다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 중 하나인 게 틀림없어. 그러니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인류는 노래를 불러온 거겠지. 다른 건 몰라도 노래 짓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는 아마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 같아. 하지만 여기서 '부러움'과 '질투'라는 단어를 평소에 사용하는 그대로 이해하기엔, 저 두 감정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저 그대로 만족스러운 측면도 있기 때문에, 난 계속 뒤뚱거리며 너 같은 이들의 주위를 맴돌 테지. 자식을 낳으면 가수를 시키고 싶다고 학창시절부터 생각했었는데, 아직까진 변함이 없어. 나도 아직 뭐가 돼보지를 못했는데, 생각 한번 참 쓸데없이 앞서 나간다 그치.


진지한 얘기. 그냥 요새 뉴스 보면 속상한 일 많잖아. 뉴스 밖에도 많지만 말이야. 그런 것들이 다 너무 속상했어. 치가 떨리고 눈물이 나는데, 그러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무력해서 더 치가 떨리고 눈물이 나더라. 사람들은 왜 그리 다른 사람들을 미워할까. 사실 진짜 미워하는 건 자기 자신이면서 말이야. 그게 너무 속이 상해.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가엾고, 말도 안 되는 폭력을 다른 이에게 가하고 뉴스에 나와 온 세상 사람들의 질타를 받는 사람들도 (분노가 앞서긴 하지만 결국은) 가엾고, 그렇게 만인을 가엾어하면서 결국 기도 한 자락 하기를 무슨 돈 쓰듯 아껴하는 나 자신이 언제나 가장 최악이고, 그런 시간들의 반복. 지원아. 어떻게 하면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불의가 사라지고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게 정답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란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닌데, 그럼 나 같은 인간이 엄청 많이 모여서 이뤄진 이 세상이 이 모양인 건 참 당연할 뿐 아니라 이 정도인 게 다행이기까지 하다 싶기도 해. 그러니 결국 구원이 어떻게 인간에게 있겠니. 하지만 손 놓고 있을 바엔 돌멩이로 태어나지,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뭔가를 해야만 하고, 나름 열심히 뭔가를 하다가도 결국 그 무의미함에 소스라쳐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되는 이 불쌍한 존재. 인간은, 천국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상실에 대해서 생각해.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그 어느 것보다 내 것이었던 나의 글들에 대해서. 잃어버렸기에 이제 정말 더없이 소중한 것들이 됐어. 잃어버렸으니까, 아무도 확인할 수 없으니까, 사실 내가 아주 끝내주는 기록물들을 수천 개나 가지고 있었노라고, 그걸 책으로 냈으면 그냥 베스트셀러였을 건데, 아쉽게도 전부 날아가버렸지 뭐냐고, 그렇게 사람들한테 허풍을 떨 수도 있게 됐고 말이야. 상실이라는 건 있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쩌면 그건 상실의 진짜 의미가 아닐 수도 있어. 내게 소중했던 무언가를 덧없이 잃어버림으로써, 내가 가진 그 무엇도 언제든 그렇게 쉽게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 잃어버린 뒤에도 사실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내가 가졌다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 회의감,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의 어떤 소유물이 아닌 나라는 한 명의 사람이 어느 날 사라져버린대도, 결국 어떤 중요한 물건 하나가 없어졌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련의 혼란이 지나간 뒤, 배를 삼킨 바다처럼 그렇게 금세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겠구나 하는 허망함을 모두 한꺼번에 끌어안게 된다는 것, 그게 내가 겪은 상실이야.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한다는 건, 다른 어떤 곳에도 특별히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남는 어떤 변화를 꼭 남기더라. 사람이 조각상이라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잃어버릴 때마다 한 번씩 파이고 파여서 결국 마지막의 모습을 갖게 되는 존재인 것 같아. 근데 있지, 살아보니까, 조각칼로 이리저리 깎이고 찔린 곳 없이 매끄럽고 둥글둥글한 사람은 그래, 그다지 사람 같지는 않더라. 좀 패인 홈이 있어야 서로 끼우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는 것 아니겠어. 마음과 정신은 점점 더 울퉁불퉁하게, 외모는 점점 더 동글동글 푹신하게, 나 이러다 너무 좋은 인간이 돼버리는 거 아닌가 무섭다 야.


두 번 다시 독촉 못하게 아주 징하게 길게 썼다. 어때. 이번 주엔 글은커녕 숨 쉬기조차 싫었지만, 이 글에 약속했던 일주일을 넘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저번 글엔 영화를 한 편 소개하며 마쳤으니, 오늘은 그림을 하나 소개하며 마칠까 하는데, 그림에 대해서야 아는 게 하나도 없지만 나이 먹으면서 아주아주 가끔 한 번씩 혹할 때가 생기는 것 같아. 예전에 너한테 팀 아이텔 한번 소개한 적 있었는데, 기억 나? 그때처럼 이번에도 역시 책 읽다가 그림으로 샌 케이슨데, 요즘 민음사에서 최근에 나온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라는, 여성 예술가들에 관한 책을 읽고 있거든. 제목처럼 '쓰는 행위'를 통해 차별 짙은 사회에 맞서 싸우고 살아남은 여성 작가들을 다루는데, 중간에 프리다 칼로를 다룬 장이 있었고 삽화로 칼로의 작품 몇 개가 실려 있었어. 미술에 아무리 문외한인 나지만 프리다 칼로야 워낙 유명하고 그림도 독특하니까 평소에도 모르던 바는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그 조그맣게 인쇄된 그림이 어찌나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던지. 그걸 계기로 옆 방 사는 미대 출신 승무원 책장에 뭐 좀 건질 게 있나 찾아갔더니 내 돈 주곤 절대 안 살 좋은 것들이 많더라고. 특히 마그리트랑 클림트의 화첩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는데 말이야, 클림트 하면 그 유명한 <키스>라든가 비슷한 류의 금색 번쩍이는 그림들만 알았기 때문에 클림트가 그린 풍경화들이 유독 새롭고 인상적이었어. 보면 진짜 미친 듯이 잘 그리긴 했는데, 역시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 그리고 그걸 들여다보며 어쩐지 안정되는 내 마음. 지금 인사동에서 마그리트 특별전을 하고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요즘은 오픈하는 전시가 거의 없어서 이게 아주 귀한 찬스야. 빠른 시일 내로 사람 없는 조용한 시간에 슬쩍 다녀오려고. 와, 그나저나 스크롤 올려보니까 진짜 인간적으로 너무 길다. 대충 양해 바람.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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