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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16. 한옥은 밤을 기다린다 (전주 3편)

2021년 6월 파리 시간으로 9일 수요일 21시 28분




  나는 전동킥보드를, 희수는 자전거를 탔다. 영화의 거리에서 한옥마을까지는 10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목적지였던 한옥카페에 다 와갈 무렵, 내내 흐리던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좋은 여행지는 날이 맑으면 맑은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어느 쪽도 아쉬울 것이 없는 법이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한옥은 그것만의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마당의 한 테이블에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파라솔에 의지해 둘러앉아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은 자주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카페 내부의 가장 구석진 쪽에서 무언가 바쁜 몸짓이 느껴진다 싶어 보았더니 그곳에 앉은 손님이 옆사람에게 수어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잠시 후 맞은편에 앉은 한 사람은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우리가 앉은 출입구 쪽 자리에서 바로 보이는 창가 자리에는 한 젊은 커플이 마주앉아 있었다. 여자는 그루프로 앞머리를 만 채였고, 둘은 아무런 대화 없이 한참 각자의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카운터 너머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직원들을 포함해 모두가 끊임없이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데도 카페는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차분한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나무 창틀 너머로는 자갈이 깔린 바닥과 바닥에 누운 장독대, 기와지붕의 곡선들과 젖은 나뭇잎들이 보였다.


  검은 기와지붕은 그 자체로 침묵이다. 그 묵직한 침묵과 하늘, 또는 초록이 만나는 경계에 늘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깃든다. 한옥은 사람을 절로 조용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왜인지 속도를 줄이게 되고, 음성을 죽이게 된다. 매끈하고 깔끔한 현대의 건축물들에 비해 옛날 건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디테일이 화려하다는 게 특징인 것 같다. 파리 시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오래된 건물들의 외관을 바라보면, 온갖 기둥과 난간과 처마 등의 화려한 무늬들이 빈틈없이 분주하다. 이 백색의 건물들과 먹빛 한옥의 대비가 머릿속에 뚜렷하다. 실제와는 무관하게 한옥의 검은 빛을 떠올리면 고요한 가운데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고, 파리의 백색 건물들을 떠올리면 분주하게 그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소리가 함께 떠오른다. 내 생각에 한옥은 자연에 바쳐진 것으로서 그 일부만이 인간에게도 허용된 건축물인 반면, 파리의 건물들은 온전히 사람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서울 한복판, 오가는 사람들로 빼곡한 동네에 자리하고 있는 한옥마저도 그 자체는 깊은 침묵을 입에 물고 있다. 한옥은 밤을 기다린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고요히 달빛이 찾아들고 풀벌레 소리만 스미듯 퍼지는 그 시간을. 비가 오면 한옥의 나무와 기와 들은 빗소리를 듣는다. 시원하게 내려앉은 공기를 호흡하고 어두워진 하늘을 머리에 인다. 북적북적한 파리 한복판 어딘가에 홀로 적요한 한옥 한 채가 뜬금없이 지어져있는 상상을 해 본다. 홀로 검어 아름답다.


  그렇게 앉아 커피를 마시며 잠시 여유를 갖는 사이 비는 그치고, 카페 마당의 처마 아래서 한참 사진을 찍은 다음 다시 영화의 거리로 돌아간다. 영화 제목은 <로비>, 건축영화 외길을 걸어온 독일 감독 헤인즈 에미그홀즈의 새로운 작품이다. 건축영화로 주제를 자연스럽게 이어가기 위해 오늘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거냐고? 전혀. 카페에 도착할 즈음 비가 내리고 다시 카페를 나설 즈음 비가 그친 것과 같은, 그저 완벽한 우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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