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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19. 결국, 이야기뿐이기 때문이다 (전주 5편)

2021년 6월 파리 시간으로 14일 21시 38분




  영화관을 나섰을 땐 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택시를 탔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 택시 기사님께 여쭤보았더니 남부시장을 추천해주셨다. 남부시장에는 유명한 피순대집이 하나 있다. 말로만 듣던 피순대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검색해보니, 피순대란 보통 순대와는 다르게 속이 당면 대신 돼지 창자와 선지 등으로 채워져 있는 순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다른 시장들과 같이 남부시장 역시 많은 점포들이 비워져 있는 어둑신하고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지만, 조점례 남문 피순대만큼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매장 중앙에 마련돼 있는 충전기로 휴대폰의 배도 불리면서, 우리는 피순대와 순댓국을 맛있게 먹었다. 지금도 그 피순대의 고소한 맛과 순댓국의 칼칼한 맛이 입안에 맴도는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방금 정말로 침을 삼켰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사위가 어두웠다. 남부시장에는 ‘전주남부시장 청년몰’이라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말 그대로 청년들이 찾을 만한 카페, 디저트샵, 책방, 공방, 펍, 스튜디오 등이 모여 있다. 공간은 아담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다만 비바람이 아주 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문짝이나 간판이 떨어져나가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동시에 술집 바깥에 마련돼 있는 자리에서 여유롭게 음주를 즐기는 사람들과,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는 소품샵 앞에 네모낳게 엎드려 졸고 있는 고양이가 함께인 기묘한 풍경이었다. 청년몰의 청년 상인들이 다함께 그곳의 길냥이들을 모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곳곳에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고양이 집과 밥그릇들은 물론, 그곳에 거주 중인 고양이 분들의 사진과 이름까지 게시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책방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비바람을 피해 도망치듯 들어갔다.


  책방 토닥토닥은 이름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책 종류가 아주 다양하면서도 큐레이션이 굉장히 잘 되어 있는 모습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여러 작가들이 들러 흔적을 남기고 가기도 했고, 사장님을 인터뷰한 동네 학생들의 근사한 결과물이 커다랗게 벽에 붙어있기도 했다. 출국이 나흘 남은 상태였다. 나는 책을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수시로 탄성을 내지르며 책들을 구경하던 내 손에는 정신을 차려보니 금세 세 권 가량의 책이 들려있었다. 한 권을 내려놓고, 또 한 권을 내려놓은 다음, 마지막 남은 한 권을 구매해 책방을 나섰다. 그게 신유진 작가님의 <몽 카페>였다.


  신유진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4북스 출판사에서 나온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통해서였다. 신유진 작가님의 번역이었다. 프랑스에서 오래 생활하신, 번역가 겸 작가님의 신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보아 알고 있었다. ‘파리에서 마주친 우연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파리의 작은 카페들에 스민 작가님의 이야기와 사색들을 담고 있다. 표지 디자인이 너무 예뻐서 그것만으로도 꼭 소장하고 싶은 그런 책이기도 하다. 부담 없는 사이즈의 이 책을 파리까지 가져가서, 그곳의 카페에 앉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파리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에펠탑 앞에서, 버스에서, 카페에서, 페이지를 아껴가며 읽었다. 그렇게 나는 파리를 담은 채로 전주가 묻어있는 이 책을 이곳으로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밤에 우리는 골목길에서 야외상영을 하는 영화를 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늦어질수록 더욱 거세지는 빗물 섞인 바람에, 아무래도 상영이 취소되었을 것만 같았다. 행여 상영을 한다 해도, 이대로 밖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두 시간 동안 앉아있었다가는 영락없이 감기를 얻을 것만 같아 망설여졌다. 희수가 앞장섰다. 뭐가 됐든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그 말은 철저히 옳았다.


  도착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소박했다. 정말 그냥 골목의 담벼락에다 요즘 웬만한 TV 화면보다 작은 사이즈로 빔프로젝터가 영화를 쏘고 있었다. 관객과 스태프를 다 합해봐야 스무 명도 안 될 것 같았다. 조금 늦게 도착한 우리는 각자 우비와 핫팩을 하나씩 받고 의자에 앉았다. 낭만적이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비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영문을 모르는 행인들이 우리 앞을 후다닥 지나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그냥 옆 건물에서 나왔다가 우리 뒤에 자리를 잡고 앉은 한 요크셔테리어와 주인도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영화 반, 요크셔 반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웃기다기보다는 황당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전형적인 프랑스 코미디 영화였다. 그날, 그곳에 완벽히 들어맞는, 기분 좋은 영화였다. 한국어 제목은 <파리의 밤이 열리면>, 영어로는 <Open at Night>으로, 당장 다음날 올려야 하는 공연에 온갖 문제들이 생겨 그것들을 수습하기 위해 극장 주인인 주인공이 늦은 밤부터 동이 틀 때까지 파리 곳곳을 누비는 내용이다. 그 밤, 전주의 그 골목에서 우비를 입고 몸을 웅크린 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렇게까지 기분 좋게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 같긴 해도, 아무튼 깊은 밤부터 이른 새벽의 파리 모습을 잔뜩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우리는 개화기를 컨셉으로 한 멋진 숙소에 돌아가 사진을 찍으며, 샤이니 노래를 열정적으로 따라 부르며, 잘 준비를 하고 나란히 누웠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작게 음악을 틀어놓고 잠들기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그 시간은 고스란히 한 조각으로 내 기억의 선반에 꽂혔다. 언제든 꺼내서 열어볼 수 있는 형태로. 각자가 지나온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 혹은 최근의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이야기가 그 어둠 속에서 한 데 섞이면서 희수와 나의 각자의 시간에, 그리고 함께한 타임라인에 하나의 점으로 찍혔다. 아마 나는 영원히 샤이니 노래를 들을 때마다 희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는 여행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이 월등히 길었고, 명절이면 방문하는 친가와 외가도 전부 수도권이라 그밖에 추억이 담긴 국내 여행지가 별로 많지 않다. 그래서 거의 해마다 같은 시즌이 되면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나 저 남쪽의 어느 도시로 향했다는 게 내게는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전주, 하면 비빔밥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에게 전주는 영화다. 국내 영화제 하면 부산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겠지만 나에게는 전주가 먼저다. 어떤 지역과 고유한 관계를 맺는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어딘가를 방문할 때마다 들려줄 이야기가 풍부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다. 삶에서 진정으로 쌓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이야기뿐이기 때문이다.





- 전주 시리즈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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