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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ffer Oct 11. 2022

꿈은 깨지고, 붙을 수 있다

Collectors

* 더 많은 아티클은 <differ>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뜻하지 않게 찾아온 병으로 인해 임희선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우울감에 빠져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던 시절,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운동장을 관찰하는 일이 유일한 일과였다. 그곳을 매일 바라보면서 넘어진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배웠다.





Collect
운동장에서 수집한
모래알 같은 감정들


임희선의 직업은 영화 마케터였다.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SI그림책학교에서 교육받은 게 그림 인생의 출발이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독일 베를린으로 떠난 지 1년이 되던 해, 병이 찾아왔다. “이제 무엇이든 꿈꾸면 안 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어요.” 꿈이 깨졌고, 우울감과 절망감이 같이 찾아왔다.
흔한 단어가 돼버린 건강이 사실은 얼마나 가까스로 얻을 수 있는 보물인지 절실해질수록 집에서 운동장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임희선은 그때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네모난 운동장은 모래로 만들어진 섬 같았다. (중략) 작은 섬 안의 사람들은 멀리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그 모습에서 다양한 감정이 전해졌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뛰고, 웃고, 싸우고, 울고, 이런 일들이 매일 반복됐다. “아이들일지라도 사연이 있을 것 같았어요.” 임희선은 공을 차는 발걸음에서 활기를, 축 처진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슬픔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손짓에서 다정함을 느꼈다고 한다. 삶의 고독감과 상실감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아이들의 마음에 집중하면서 임희선을 짓누르던 바위 같은 고통이 모래알처럼 작아지고 있었다.





Inspired
진료 기록의 객관적 정보로
질병과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


임희선은 책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보기로 했다. 책에 쓸 메인 이미지는 방에서 촬영한 운동장 사진. 사진과 글을 싣고 싶어서 일기 속 문장을 골라서 사진과 나란히 뒀다.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제삼자의 입장에서 질병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차곡차곡 잘 모아뒀던 병원 서류가 떠올랐다.





그는 먼저 수백 장의 병원 서류와 약 설명서를 스캔했다. 모니터에 스캔한 이미지를 띄우고 깨알같이 작은 글자를 크게 키워서 프린트로 인쇄한 다음 가위로 단어들을 일일이 오렸다. 그 종잇조각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가며 시인이 시를 짓듯이 문장 만들기에 열중했다.



‘때때로’ 장애가 나타날 수 있고, 치료에 ‘실패한’ 경우가 있으며, ‘어린이’는 주의해야 하고, 기존 제형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라는 주의 사항을 신중하게 연결해 문장을 완성했다. “때때로 실패한 어린이는 훨씬 더 강합니다.”



무미건조한 글에 감정이 만들어지는 창작의 과정이 놀라웠다. 또한 임희선은 진료 기록의 객관적 정보를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변화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성을 깨닫게 되었다. 약을 먹고 회복하는 것도, 검사를 통해 건강해지는 것도, 설령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것도 모두 스스로 선택에 의한 결과였다. 행위가 결과로 정직하게 이어지는 것은 체력 단련만이 아니었다. 질병을 받아들이는 것도 행위와 결과가 일치했다.


창작의 결과물에 임희선은 재밌는 이름을 붙였다. 매일 관찰하던 네모난 운동장은 모래섬이라고 표현하고, D469는 자신의 질병 분류 기호에서 빌려왔다. 그는 『모래섬 D469』를 “개인의 마음속에 구축된 공간을 탐구한 기록물”이라고 표현했다.





Work
회복된 마음


돌이켜보니 삶을 나아가게 하는 힘은 휴식에 있었다. 상처받은 마음에 새살이 돋아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쉬는 걸 못 했어요. 아침에 늦잠 잔 적 없고, 낮에 누워있는 건 용납할 수 없었죠.” 아프고 나서 깨달은 것이 쉼의 중요성이다. 부모님이 충북 괴산군의 한살림마을로 이사를 하실 때만 해도 그곳에 1년만 내려와서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괴산에 이사 오고 나서 잠자는 기쁨이 뭔지 알게 되면서 아예 눌러 살기로 했다. 지금도 잠은 각별하게 챙긴다. “밤에 화장실 갈 때 한쪽 눈만 뜨고 다녀오면 잠이 안 깬대요.”





임희선이 생각하는 진정한 휴식의 끝은 시작이다. “쉼은 새로운 일을 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죠.” 그도 쉼을 연료로 책을 썼다. 꿈 일기를 엮은 『침묵의 바위』, 괴산의 동식물과 풍경을 글과 그림으로 담은 『괴산 일기』, 『모래섬 D469』, 초록 풍경을 사진에 담은 『포개진 계절』까지 그가 2년 동안 쓴 책이 4권이나 된다.


지금의 임희선은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귀촌, 귀농한 청년들과 2020년부터 밥상 모임을 시작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함께 밥을 먹는다. 작년 여름엔 읍내에 ‘청년창작소 오롯’이라는 청년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도 만들었다. 이곳에서 월요일에는 영화 모임, 화요일에는 밥상 모임, 수요일에는 노래 모임을 한다. 올해 하반기에는 괴산에 사는 출판인들과 만든 매거진도 출간된다.


잊지 않는 것은 천천히, 적당히, 건강히 살려는 마음이다. 비둘기 울음소리에서 딴 출판사 이름 ‘쿠쿠루쿠쿠(cucurrucucu)’처럼 한 마리 새가 되어 느린 호흡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처럼 작은 몸짓이 주는 커다란 감동에 위로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사는 삶을 새롭게 꿈꾸고 있다.




진정한 휴식의 끝은 시작이다










Editor Lee Anna

Photographer Lee Ju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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