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프랑코포니의 연극 <벨기에물고기>
극단 프랑코포니가 신작을 올렸다. 현재 36세의 현역 배우이자 프랑스 연극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여성 극작가 레오노르 콩피노의 작품 <벨기에 물고기>(3.15~4.3, 알과핵 소극장)가 바로 그것이다. 공연은 ‘다름’을 주제로 내세워 다르다는 이유로 상처받은 두 사람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들은 얼마나 다르기에 이다지도 많이 상처받아야 했을까.
작품에 등장하는 두 인물부터 우리가 쉽게 접해온 캐릭터는 아니다. 여자의 모습을 한 남자와 소년의 모습을 한 소녀. 남자는 진한 립스틱을 바르고 부푼 올린 머리를 하고 있다. 속눈썹도 붙였다. 소녀는 멜빵바지를 입고 단발머리이다. 이들은 벨기에의 어느 호수 앞의 한 벤치에서 만났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은 듯한 남자는 굶주렸다는 소녀에게 초코바를 주려다 이윽고 집으로 데려갔다. 남자는 왜 소녀를 집으로 데려갔을까. 어딘가 자신과 닮은 구석이 보여서가 아니었을까.
그랑드 무슈와 클로드 클로케 둘 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겉도는 인물들이다. 그랑드 무슈는 그의 외모에서 알 수 있다시피 여장남자다. 그랑드 무슈의 역을 맡은 전중용 배우의 생김새는 선이 굵다. 남성스럽게 생긴 남자가 올림머리를 하고 속눈썹도 붙이고, 빨간 매니큐어도 바른 모습은 우리게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역시 극 중의 그랑드 무슈도 그런 여성성으로 인해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서나 데이트 상대를 만나고, 누군가에게 맞고 들어오기도 한다.
클로드 클로케는 외양만 봐서는 소녀인지 소년인지 알기 힘들다. 일단 클로드는 소년의 모습을 한 소녀다. 소녀라기엔 어울리지 않는 외양으로, 굉장히 활동적인 옷을 입었다. 클로드는 자신은 물고기라서 아가미로 숨을 쉰다며 몸에 상처를 내기도 했다. 클로드의 학교 친구들은 이런 클로드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관객들이 만난 그랑드 무슈와 클로드 클로케는 굉장히 다른 인물들이다. 연령대와 성별, 취향 등 많은 것이 다르다. 그러나 종국에는 둘이 한 인물임이 밝혀진다. 클로드 클로케는 상처받은 그랑드 무슈의 어린 시절이었던 것이다. 사실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힌트는 작품 곳곳에 숨어있었다. 먼저 작품 처음에 초코바를 먹던 그랑드 무슈의 모습이다. 그의 정체성이 무엇이든, 그랑드 무슈의 외양과 초코바는 어울리지 않는데, 그는 첫 장면에서 초코바를 하나 먹는다. 그 모습을 발견한 클로드는 자신도 하나 달라며 그의 옆자리로 와서 앉는다. 둘 다 같은 간식을 좋아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랑드 무슈의 집이다. 공연의 중심 공간인 그의 집엔 이질적인 장소가 하나 있다. 바로 욕실이다. 그랑드 무슈 집의 다른 가구들은 낡고 허름하다. 집엔 변변찮은 먹을거리 하나 없다. 그러나 무대 전면에 위치한 그의 욕실은 반투명유리로 가려지긴 했지만, 클로드에 의하면 클로드가 꿈꾸던 아주 비싼 욕조를 가지고 있는 집이다. 그랑드 무슈 또한 그의 욕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클로드가 자기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그닥 놀라지 않는 모습이라던가, 중년 남성과 함께 머무르면서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클로드의 모습에서도 둘이 한 사람이라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연극 <벨기에 물고기>는 한 인물을 다른 두 사람으로 표현해냈다. 덕분에 ‘다름’이란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남긴다. 이 작품은 다르기 때문에 사회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들은 다르기 때문에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나중에 밝혀진 그랑드 무슈의 어린 시절의 경험은 다르다는 이유로 학대받았던 것이다. 그랑드 무슈의 내면에 어떤 여성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옷을 입었고 그 이유로 그는 달리는 자동차를 쫓아 한참을 뛰어야만 했다. 또 그는 다르다는 이유로 정상적으로 사람들을 만날 수 없고, 인터넷 채팅으로 알게 된 사람을 만나 밖에서 한참 기다리기도 했으며, 구타당하고 들어오기도 한다. 그의 성적 취향은 남자를 딱히 좋아하는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처로부터 여자 옷을 입는 사람이라서 버림받았다. 아들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클로드는 나이가 많지 않지만, 이미 다르기 때문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클로드를 두고 정신분석학자인 그의 부모는 매일 싸워댔고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을 남들과는 다르게 인식했고, 본인은 자신의 아가미라고 했지만 배에 흉터가 가득한 모습은 건강과는 거리가 멀다. 클로드와 그랑드 무슈는 이렇게 상처받았지만 사회는 그들을 돌봐주지 않았다. 어느 순간 클로드를 찾는 신문 기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랑드 무슈는 한 개인으로 살기 위해 부모로부터 등을 돌리고 반대로 달렸다.
둘은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상처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은 그랑드 무슈의 집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허름한 공간이지만 화려한 욕실을 가진 그랑드 무슈의 집에서 클로드는 자신만을 위한 수학 문제도 얻었고, 물속에서 문어와 놀며 만족한다. 그랑드 무슈는 클로드의 권유 덕분에 덮어두었던 자신의 상처들을 들여다 보게 된다. 이렇게 둘이 치유받는 그랑드 무슈의 집이라는 공간은 환상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연출은 물고기가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을 무대 전반에 비춰주며 그 공간을 푸른 바다 속으로 만든다. 애니메이션과 어우러진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는 다른 공간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며 물 속같은 공간의 분위기를 창조해냈다.
한편, 다르기 때문에 공격받아왔던 둘은 한 의식을 통해 무언가를 얻었다. 그 의식은 눈물을 담은 어항에 있던 물고기를 때려 죽이고 먹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어항에 클로드의 눈물을 담았다. 그들은 물고기를 죽이기 위해 여러차례 시도했으나 물고기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는 물고기를 보고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일단 클로드는 욕실 입구 옆에 걸려있던 사진의 주인공을 만나러 가자고 한다. 그는 그랑드 무슈의 아들로,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들이다. 그리고 떠나기 위해 짐을 싸는 과정에서 클로드의 요청에 의해 둘은 강하게 포옹하게 되고, 서로가 동일인물임을 알게 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아픔과 슬픔을 감싸주고서야 자신의 내면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연극 <벨기에 물고기> 속에서 다름을 가진 사람은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상처주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당하고 피해입고 숨죽여 살아야했음을 보여주었다. 정신분석학자라는 클로드의 부모는 클로드를 학대했고, 그랑드 무슈는 자신과 맞는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가 부상만 입고 돌아왔을 뿐이다. 다르다는 이유 하나가 이렇게 인물들을 고통 속에 살게 했다.
연극 <벨기에 물고기>는 사회가 배제시켜온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상처받았고 또 어떻게 그 상처를 치유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는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대화할 때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가 ‘다르다’는 단어를 ‘틀리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역시나 ‘다름’을 가진 사람들을 차별한다. 이를테면 왼손잡이들에게 불편한 물건들이 아주 많다던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던가 하는 눈에 쉽게 보이는 차별부터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사람이 어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점 하나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든가 하는 내면적인 차별들까지 말이다. ‘다름’은 사실 상대적인 것이다. 과연 누가 그 잣대를 만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