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다행히 회사에서 포지션은 보전했지만 정서적인 업다운을 상당히 크게 겪었다. 자존심 때문에 어디가서 말하기도 어려운 부분이다.
정서에 영향을 끼친 요인 (이렇게 쓰니까 보고서 같네...)
1. 주거환경 변화
여름에 이사를 했다. 룸메와 살다가 혼자쓰는 원베드룸으로 옮긴 것이다. 월세는 예전보다 아주 조금 높지만 침실과 거실이 나름 분리돼 있고 깨끗해서 좋다며 옮겼다. 그런데 한달쯤 지나고 집에 잘 적응을 못하며 정서적인 변화가 일었다.
1) 월세는 약간 높은대신 건물 질이 굉장히 낮아졌다. 지저분하고, 경비 - 즉 24시간 관리인이 없으며 툭하면 이웃집에서 싸우는 고성이 들린다. 옆집 (거의 옆방이나 마찬가지로 가까움)은 늘 현관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워 나도 현관 근처로 가면 담배 냄새가 난다. 거실 너비가 2미터 좀 넘는데 폐소공포증 비슷한 것이 생겼다. 소파에 앉으면 자연히 흰 벽을 바라보게 되는데 언젠가부터 그 흰 벽 이미지가 내가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2) 집주인이 80세 넘은 노인이라 집주인 비서(홍콩인)와 왓츠앱으로 소통하는데, 주인 측에서 당장 필요한 일 (월세 관련)이 아니면 대답을 잘 안 한다. 집주인과 연락이 빨리 되고 무엇이 수리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라는 답을 빨리 듣는게 집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준다. 내경우는 그렇지 못하고, sub divide (한 집을 여러 집으로 쪼갠 레노베이션) 특성상 전기값이 집주인 마음이라...원래 살던 집에서 2배 이상 뛴 전기세를 보고 놀라 기절할 뻔했다.
흰 벽면. 시선을 분산하려고 나름 아기자기하게 열심히 꾸몄다.
2. 직업
한국에서 7년 정도 언론, 방송계에 있었고 홍콩에서 3년째 영어로 기사를 쓰고 있다. 그런데 정말 내가 한국에서 기사쓰는걸 어떻게 배웠나 싶을 정도로 저널리즘 기초부터 다지는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팩트체크, 당사자가 아닌 제 2자와 제 3자의 코멘트로 기사 쓰지 말기, 아주 일부에 불과한 취재내용으로 제목 잡지 말기, 확대해석처럼 보이도록 문장 쓰지 말기,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독자의 호기심 끌 제목과 부제목 짓기, 독자가 오해하게 뉘앙스 전달하지 말기...다수의 한국 언론에서 안 지키는 부분들이다. 영어도 어려워 죽겠는데 이런 글쓰기 습관 때문에 참 많은 지적을 받았고 창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3. 코로나와 집콕
원래 집순이라 코로나 - 재택근무 - 우와 잘됐다 모드였는데, 이게 나도 모르게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3월엔 나름 아마추어 합창단도 들어가고 줌으로 화상 노래연습도 했는데 - 어느샌가 화상연습 틀어놓기만 하고 내 마이크폰은 끄고 저녁을 먹고 있는 나 자신 발견. 그리고 코로나로 대면이 어려워 홍콩에서 전문가 미팅을 잡기도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만남에서 영감을 얻거나 fresh idea를 찾는 일이 많지 않았고, 신체적, 심리적으로도 위축되었다.
4. 가족관계
30대에 결혼을 안 했다보니 가족들의 걱정에 무심할 수가 없다. 카톡너머로 전해지는 엄마아빠의 한숨 (음성지원)...남성들도 남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인생에서 포기하고 남들 눈치보는 게 있겠지만, 여성은 결혼을 안하고 +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안 돌보고 + 해외에서 일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진 않은' 상이다.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주위에 피해 안 끼치고, 커리어도 발전시키고 있는데, 자신이 좀더 이루고 싶은 걸 이루기 위해 결혼하지 않았고 부모 곁에 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올바르지 않게' 보이는 쪽은 남성보다 여성이다. 이럴 땐 속상하면서 어떻게 이걸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고민한다.
올해는 특히 일이 challenging했다. 그리고 해외살이 대해 가장 컸던 환상, 즉 해외에서 일하며 살면 더 씩씩하고 스마트하고 인텔리전트하고 시야가 확장될 거리는 막연한 믿음을 고쳤다. 내가 꼭 해외에서 살아야만 한국에서보다 넓은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외국어 능력을 키워 글로벌 인재들과 의사소통 능력을 높이고, 팟캐스트나 유튜브, 독서로 여러 지식이나 영감을 캐치하고, 화상회의 등 여러가지 신기술 플랫폼을 통해 그 의사소통 또는 지식 흡수 기회를 적극적으로 차지하면 되는 것 같다. 내가 미국 실리콘밸리나 홍콩 금융업계의 최전선에 가보지 못해 모르는것일수도 있지만. 홍콩에서 3년째 살아가는, 이제는 담담하게 내리는 내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