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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Feb 09. 2023

[리뷰] 정이(JUNG_E)

익숙한 노란빛 얼굴, 새로운 세상

넷플릭스 원작 SF 영화 [정이]


  넷플릭스 원작 영화 [정이]를 알게 된 건 엄마 덕분이었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다 넷플릭스 어플에 들어가 이것저것 작품 사이를 유영하던 중,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가 이번에 새로 나온 한국 SF 영화가 호평이라며 운을 뗐다. 나는 선호가 확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잘 수용하는 편이 아닌데, 내 취향을 죄다 때려 박은 영화 포스터를 보는 순간 마음이 활짝 열렸다. 주인공처럼 보이는 강인한 인상의 여자 군인과 망가진 미래 세상.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지는 조합이지 않은가. 마침 러닝타임도 1시간 반 가량으로 적당해서 고민할 것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더 젊은 김현주 배우가 강수연 배우의 엄마 역할을 맡았다는 아리송한 스포 아닌 스포만을 듣고 영화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첫 장면부터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본 것 같은 전쟁 로봇이 우르르 튀어나오며 시원한 액션씬이 한참 이어진다. 작살과 줄, 그리고 총을 함께 사용하는 신박한 액션은 기존 SF 액션과는 조금 다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아 신기하다. 역시나 주인공은 어떤 역경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큼 강해서 재미있다. 하지만 초반의 장면이 단지 시뮬레이션일 뿐이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분위기가 반전된다. 새로이 마주한 흐름은 살짝 지루하다. 처음 보여준 강렬한 액션은 어디로 가고,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과 히스테릭을 부리는 직장 상사의 쇼맨십이 한참 이어진다. '그래서 결국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이와 윤서현 박사의 관계가 드러나고, 영화는 다시금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박사가 마지막 남은 유일한 정이를 놓아주는 순간, 쉬지 않고 달리던 내 사고회로도 뚝 멈췄다. 마음에 드는 결말이었다.




  앞서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에서 묘사된 2075년의 세계가 생각보다 세밀해서 감탄했다고 했는데, [정이]의 세계도 눈여겨볼 만한 설정이 몇 가지 있어 재미있었다. 죽은 사람의 뇌 구조를 기반으로 AI를 만든다는 설정은 SF 소재에서 무척 흔하지만, 거금을 받는 대신 본인의 사후 뇌 지도를 모두에게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는 구체적인 설정은 처음이라 흥미로웠다. 우리는 가끔 현대 사회의 문제가 전부 해결된 미래를 그리며 낙관하지만, 그 기대는 대부분 좌절된다는 걸 겪기 전에는 모른다. 특히 전쟁이 종식되고 상품성 AI가 유행할 기미가 보이자 정이 디자인을 그대로 성산업 로봇에 가져다 붙인 부분은, 현실의 문제를 예리하게 집어내었기 때문에 더욱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다. '정이'가 테스트를 받는 장소는 기술적으로 무척 신박했다. 현대의 가상현실은 아직까지 사용자의 시야만 통제할 수 있으며 물리적인 감각은 대체할 수 없다. 매번 다양하게 바뀌는 가상 환경을 위해 고정된 사물을 세팅하는 건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 이를 가상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바뀌는 와이어와 철심으로 극복했다는 건 놀라운 발상이었다.


  영화의 인물도 전부 납득이 가는 성격과 서사라 마음에 들었다. 연구소장 상훈의 초반 연기가 묘하게 튄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도 복제품 중 하나였음을 생각하면 좋은 설계라고 생각한다. 딸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인 '정이'의 캐릭터는 자칫하면 진부할 뻔했지만 똑같이 진부한 설정인 세계 제일의 전투원이라는 설정과 합쳐지니 오히려 참신한 인물이 되었고, 이들이 정이 프로젝트를 담당하며 엄마에 관한 복합적인 생각을 끌어안게 된 '윤서현' 박사와 결합하여 이 영화만의 특색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엄마의 명성을 존중하는 형태라고 생각하는 게 위안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실존했던 사람의 뇌 구조를 기반으로 한 양산형 AI 생산 자체가 인권침해적이라는 건 무의식적으로라도 알 수밖에 없다. 변명과 방관으로 범벅된 길은 도피처보다도 못하다는 걸, 사람들은 항상 결말에 직면하여 깨닫는다. 마주하지 못한 용기에 대한 결과로써 윤서현 박사는 정이의 자유로운 마지막을 보지 못한다.


  이 영화는 현대 SF 소설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 같달까. 옛날의 SF 소설이라 하면 보통 우리가 초등학교 때 자주 했던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같이 미래 세계가 어떻게 발전했고 어떤 신기술을 쓰느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현대의 SF 소설은 양상이 좀 달라졌다. 과학 기술은 여전히 SF의 메인이지만, 해당 기술이 사회와 개인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 중요시해 인문학적인 질문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 많다. [정이]도 그런 느낌이다. 초반의 화려한 전투 다음으로 이어지는 중반의 정적이고 조용한 장면은 심심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공백이 오히려 영화를 보는 동안 이것저것 깊은 고민을 할 수 있게 한다. 기술이 인간성을 지워가는 환경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사람의 뇌를 복제하여 만든 AI는 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기억을 복제한 뒤 부서지지 않는 기계 몸에 옮겨 삶을 연명해 가는 건 영생의 개념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아의 개념은 소멸해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숨을 쉬는 이 사회에서 그들을 단순 복제품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것이 윤서현 박사가 단 하나가 된 정이에게 자유를 내어준 이유가 될 것이다. 네이버 웹툰 [네버엔딩달링]에서 형사가 이미 수많은 대체제를 거쳐간 자신의 친구를 끝까지 구해내려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이런 영화는 단편으로도 충분히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괜찮은 소재를 제대로 뽑아먹지 못한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사전에 투자한 돈에 따라 안전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은 후 내 뇌 지도가 어떤 식으로 남용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사이버 세상을 떠도는 망령이 될 수도 있다는 발상은, 과학 기술이 현실과 맞닿았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예리한 설정을 토대로 옴니버스 시리즈를 만들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을 여럿 등장시켰어도 참 재미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넷플릭스 원작 영화 [승리호]로 시작해서 [정이]까지, 한국 영화계에도 SF붐이 부는 것 같아 반갑다. 외국의 블록버스터 SF 영화들만 보다가 익숙한 우리나라 배우들이 나오는 SF를 처음 봤을 땐 무척 어색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왜 진작 SF 영화에서 동양인들이 안 보이는 걸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했는지 참 아쉽다(물론 중요 역할을 맡은 동양인 배우도 몇 있었지만 주연이 된 적은 없으며 등장인물이 전부 동양인인 영화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사회에서 정한 정상과 비정상, 주류와 비주류가 미디어 노출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만큼 동양인이 바글바글한 SF 영화가 늘어나는 건 좋은 신호다. 우리는 [승리호]와 [정이]를 길잡이로 삼아 기존의 블록버스터 영화와 차별점을 둘 수도 있다. 무장 세력들의 이권 다툼과 화려한 CG가 난무하는 익숙한 성공의 길을 뒤로하고, 사회 문제를 파고들어 휴머니즘에 대해 고찰하는 우리만의 심심한 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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